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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 태일 목사
작성일 2010-11-15 (월) 06:24
분 류 주일설교
Link#2 시편 107:1-9
ㆍ조회: 1776    
[11/14/10] 여호와께 감사하라
여호와께 감사하라 (시편 107:1-9)
    옛날에는 노예들이 많았습니다. 노예들이 자유를 얻으려면 주인에게 팔려온 값을 지불해야 했습니다. 그것을 속전(贖錢, redeem)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자유를 얻은 노예들은 비싼 값을 지불하고 자신들을 자유롭게 한 그 사람의 은혜를 잊지 못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과거에 애굽에서 430년을, 바벨론에서 70년을 노예 생활을 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해방을 맛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께서 육체적인 노예 상태에서 건져주신 것만 대단히 감사했을 뿐, 영적인 죄의 노예 상태에서 건져주신 것은 깨닫지를 못했습니다. 사실 그것이 훨씬 큰, 엄청난 은혜인데 말입니다.
    오늘날도 우리 눈에 보이지 않지만 무서운 죄의 지배가 있습니다. 악한 영의 지배가 있습니다. 오늘 성경 본문 바로 뒤 10절에 보면 “사람이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으며 곤고와 쇠사슬에 매임은”이라고 표현한 것이 바로 그 죄로 말미암은 인생을 표현한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세상 사람들이 무서운 속박 아래 있으면서도 깨닫지를 못합니다. 믿는 우리들도 과거에 온통 죄의 노예로 살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아 죄의 능력으로부터 자유함을 얻게 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시편 기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과거 포로생활에서 자유를 허락해주신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하라고 합니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여호와께 구속함을 받은 자는 이같이 말할지어다 여호와께서 대적의 손에서 저희를 구속하사 동서남북 각 지방에서부터 모으셨도다”(1-3절)! 구속이란 앞서 언급하였듯이 노예의 주인에게 속전을 지불하고 사서 해방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하나님께 죄 짓지 않은 것도 아니고, 충성한 것도 아닌데 그들을 모두 자유하게 하셨습니다. 이유는 우리 하나님이 선하시고 인자하심, 즉 긍휼이 풍성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은혜를 입은 자들은 선포하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대적의 손에서 그들을 구속하셨고 동서남북에서 모으셨다고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선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 값을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 치르게 하시고 우리를 그 피 값으로 사셨습니다. 그 은혜를 깨닫고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들을 동서남북에서 모아 주셔서 이렇게 예배를 드리게 하시니 선포해야 합니다. 우리 하나님의 무한하신 자비와 긍휼을 선포해야 합니다. 진실로 감사를 드리며 찬양을 드려야 합니다.

    그런데 이 시편 기자는 노예에서 해방되어 자유함을 얻은 자체뿐만 아니라, 그 후의 고달픈 삶 가운데서도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릴 것을 촉구합니다. “저희가 광야 사막 길에서 방황하며 거할 성을 찾지 못하고 주리고 목마름으로 그 영혼이 속에서 피곤하였도다”(4-5절)라고 말입니다. 이 말씀의 분위기를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을 하고 광야에서 방황했던 40년을 의미하는 것 같기도 하고, 바벨론 포로 생활을 끝내고 수백 마일 떨어진 본국으로 귀환할 때의 모습 같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광야 사막 길에서의 방황은 종살이가 아니라 하나님께 훈련 받는 기간이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하나님의 훈련을 받는 때가 남의 나라 종살이할 때보다 더 고달프고 힘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정처 없이 방황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고 있었습니다. 출애굽을 한 후 광야를 지날 때에는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그들을 인도하고 있었으며, 생수와 만나, 메추라기로 일용할 양식을 공급 받았습니다. 바벨론이 무너지고 페르시아 제국이 등장하여 생각지도 않았던 고레스 왕의 배려로 말미암아 귀환 길에 필요한 것들을 공급 받았으며, 페르시아 제국의 사자들이 그들이 가는 길마다 다른 민족이 방해하지 않도록 지키게 하였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이든지 바벨론이든지 노예생활하고 있을 때에는 육신적으로 안정된 생활을 하는 것 같았습니다. 주인들이 시키는 대로만 하면 먹을 것은 주고, 거할 곳은 안전하게 보장되어 있었으니까 말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노예 상태를 벗어나니까 광야에서 더 방황하는 것 같습니다. 먹을 것이나 거할 곳이 보장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어떤 위험이 앞에 있는지 그저 모르고 나갔던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모르고 살 때에는, 구원의 은혜를 깨닫기 전에는, 세상에 있는 것들을 추구하며 죄 가운데 거할 때에는 육신적으로 오히려 더 안정된 길을 가는 것 같은데, 하나님을 믿고 난 후, 구원을 받고 난 후 연단을 받을 때에는 더 방황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정반대입니다. 믿는 자의 연단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길을 바른 길로 인도하는 과정이지만,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은 그저 죄의 노예로 살다가 영원히 죽는 길을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4절에 광야 사막 길에서 거할 성을 찾지 못했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출애굽하여 가나안 땅에 가기까지 40년의 방황을 뜻하거나, 바벨론 포로 생활을 끝내고 예루살렘까지 가는 동안 방랑자, 나그네의 삶을 뜻하는 것입니다. 즉 천성에 들어가기까지의 그 훈련 받는 삶이 고달프고 피곤함을 뜻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부르짖었더니 그 고통에서 건지시고 바른 길로 인도하셔서 거할 성에 이르게 하셨다고 합니다. “이에 저희가 그 근심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 고통에서 건지시고 또 바른 길로 인도하사 거할 성에 이르게 하셨도다”(6-7절)!
    우리도 마찬가지로 이 나그네 삶에서 피곤하고 목마름이 계속될 때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입니다. 그러면 생수이신 예수님께서 힘을 주셔서 천국까지 잘 가게 하십니다. 아무리 더운 사막 길을 걸어간다 해도 뱃속에서 생수가 넘치면 그 생수의 힘이 밖의 더위를 몰아내어 상하지 않게 합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거할 성에 도착할 때까지 결코 우리를 떠나지 않으시고 함께 동행하십니다.
    사실 우리 모두는 이 시간에 이르기까지 그러한 하나님의 도우심이 있지 않았습니까? 위기 때마다 하나님께 부르짖었더니 세밀하게 도움의 손길을 주셔서 여기까지 오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시편 기자도 그런 하나님을 경험하고서 감사의 찬송을 불러야 한다고 합니다.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이한 일을 인하여 그를 찬송할지로다”(8절). 여기 기이한 일이란 막막한 사막을 가는데, 길이 없는 곳에서 길을 내셔서 인도하심을 말합니다. 도저히 살 수 없는 위기 가운데서 놀랍게 우리를 건져내심을 말합니다. 이유는 하나님의 인자하심 때문입니다. 끝없는 자비와 사랑 때문입니다. 우리의 연약함보다 하나님의 사랑이 더 크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향한 인내, 오래 참으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도무지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될 조건이 아무 것도 없는 우리를 양자 삼으셔서 입히시고 먹이시며, 말씀으로 가르치시며, 때로는 징계도 하시지만 끝까지 참고 인내하셔서, 우리로 장성한 자가 되어 하나님 아버지를 위하여 살게 하시는 사랑 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우리 인생들에게는 기이한, 놀라운 일인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저가 사모하는 영혼을 만족케 하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9절) 하신 것처럼, 하나님께서 목마르고 주린 우리의 영혼을 먹여주시며 만족케 하십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 삶이 사실 주리고 목마른 인생길이 아닙니까? 우리는 결코 먹는 음식이나 좋은 물을 마신다고 해서 영혼의 갈증이나 굶주림이 채워질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님을 사모하면, 주님께서는 말씀으로 우리의 영혼에 힘을 주셔서 방황을 이기게 하시고, 두려움과 염려를 이기게 하시고, 분노와 불안을 이기게 하시고, 죄의 유혹을 이기게 하셔서 영원토록 거할 성에 도달할 때까지 믿음으로 살아남게 하십니다. “이에 저희가 그 근심 중에서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 고통에서 구원하시되 저가 그 말씀을 보내어 저희를 고치사 위경에서 건지시는도다”(20-21절)! 할렐루야!

    사랑하는 경향가든 교우 여러분!
    다음 주일은 2010년 추수감사주일입니다. 한 해를 돌아보며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주일입니다. 오늘 시편은 당시에 예루살렘 성전에서 감사제를 드릴 때 불려졌던 찬송입니다. 본문에서 구원을 받은 성도들이라면 두 가지 이유 때문에 감사를 드려야 한다고 합니다. 하나는 죄 사함을 받은 것 때문에 감사를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죄의 노예로 살던 우리를 죄의 권세로부터 자유하게 하신 은혜를 감사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극심한 고통을 겪으면서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려주심으로 말미암아 그 모든 죄 값을 지불하셨기에, 구속하셨기에 감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도무지 하나님의 아들이 될만한 자격이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녀를 삼아주심에 감사를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이유는 구원을 받은 후 이 세상 나그네의 삶에서, 더욱 거룩해지도록 연단시키시는 삶의 훈련장에서 겪는 모든 어려움에서 건져주심을 감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이 주리고 목마를 때에 부르짖기만 하면 채워주시는 은혜에 감사를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방황할 때에도, 근심 중에도, 큰 고통을 겪을 때에도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놀랍게 건지셔서 바른 길로 인도하시니 감사를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들과는 달리 우리 하나님은 영원토록 선하시며 인자하심이 풍성하기 때문에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보통 사람들을 살펴보면 감사에 대하여 말씀을 드리면 세가지 형태로 나타납니다. 한 부류는 '감사가 뭐 필요있느냐' 라는 식의 태도로 감사가 없는 삶입니다. 모든 것이 당연히 자기에게 주어져야 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믿음이 전혀 없는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태도입니다. 만약 신자가 그렇다고 한다면 그 믿음이 진짜인지 의심해 보아야 합니다. 둘째 부류는 위선적인 감사입니다. 자기 의를 나타내기 원하는 바리새인들의 말,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눅 18:11) 라고 하는 사람들처럼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 같은데, 사실은 자기 자신에게 감사하는 자들입니다. 셋째 부류는 진실로 하나님께 감사하는 자들입니다. 한번은 예수님께서 문둥병자 열명을 고쳐 주었는데 사마리아인 한 사람 만이 주님께 돌아와서 감사할 때에, 예수님은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눅 17:19)고 하심으로 감사와 구원받는 믿음을 동등한 것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유명한 개혁주의 신학자인 William Hendriksen 은 ‘감사가 빠진 기도는 그 기도를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올려 보내는 날개를 부셔 뜨리는 것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사실 히브리어에서는 찬양(hallel)이라는 단어에는 그 감사의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찬양과 감사라는 단어는 서로 바꾸어 사용할 수 있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오늘 시편에 1절에 감사하라고 한 후에는 계속 찬송하라고 합니다(8절, 15절, 21절, 31절). 즉 하나님을 찬송하는 이유가 감사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 입으로 찬송하면서 그 입으로 불평을 한다면 위선인 것입니다.
    
    여러분! 1923년에 일본의 유명한 마쓰시타 전기회사를 설립한 마쓰시타 고노스케는 ‘경영의 신’으로 불리는 사업가였습니다. 독창적인 아이디어로 전기산업의 발전에 기여한 분으로 1989년에 돌아가셨지만, 일본 사람들에게는 아직도 존경 받는 전설적인 분입니다. 이 분이 한번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감옥과 수도원의 공통점은 세상과 고립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차이가 있다면 불평을 하느냐, 감사를 하느냐 그 차이뿐이다. 감옥이라도 감사하고 산다면 수도원이 될 수 있다’라고 말입니다. 공감이 가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마음에 감옥을 가지고 사느냐, 아니면 경건한 수도원을 세우느냐는 각자 스스로의 선택에 달렸습니다. 우리는 항상 내게 주어진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주권 하에 이루어진 것임을 믿고, 그 인자하심과 선하심에 감사한다면 지속적인 하나님의 축복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계속 불평하고 산다면 지옥 같은 생활의 연속인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의 사람 바울은 “내가 궁핍함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 처하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로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1-13)고 고백한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그러한 믿음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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