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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 태일 목사
작성일 2010-11-23 (화) 01:09
분 류 주일설교
ㆍ조회: 1718    
감사의 생각으로 바꾸면
감사의 생각으로 바꾸면 (고린도후서 12:5-10)

왜 착한 사람들에게 고통스러운 일들이 생기는지 의문을 가져보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아니 왜 믿음이 좋은, 신실한 성도들에게 전혀 생각지도 못한 어려움이 닥치는지 하나님께 여쭈어보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 사람 자신이 아니면 가족들에게 일어나는 뜻밖의 사고라든가, 불치의 병, 가난, 혹은 자연재해 등을 만나는 경우 말입니다. 하지만 죄성을 지닌 인간들은 예외 없이 누구나 고난을 만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인생은 고난을 위하여 났나니 불티가 위로 날음 같으니라”(욥 5:7)고 하였습니다.
   심지어 하나님께서 귀하게 사용하시는 신실한 종들에게도 고난은 예외가 아닙니다. 오늘 본문의 사도 바울도 예수님을 만난 후에 많은 고난을 겪었습니다. 자신이 돌보고 섬겼던 자들에게 배신을 당하기도 하였고, 자신이 개척한 교회가 거짓 선지자들로 흔들리며 어려움을 당하는 것을 목격했고, 개인적으로도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엄청난 고통을 겪었습니다(고후 11:23-28). 뿐만 아니라 그에게는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육체의 가시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많은 고통을 오히려 감사하며 살았음을 오늘 본문이 가르쳐주고 있었습니다. 고통에 대한 해석을 잘 한 것입니다. 인생의 어떤 어려움을 대할 때에 불평과 원망보다 감사의 생각으로 바꾸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놀라운 영적 체험을 많이 한 사람입니다. 주님께서 허락하신 환상과 계시가 많은 사람입니다(1절). 그의 영혼이 천국을 다녀오기도 했습니다(2-4절). 셋째 하늘이나 낙원은 천국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만약 오늘날 누가 그런 체험을 하고 주님으로부터 많은 환상과 계시를 직접 받는다고 한다면 얼마나 그것들을 자랑하고 다니겠습니까? 그런데 바울은 자랑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오히려 약한 것들 외에는 자랑하지 않겠다고 합니다(5절). 왜냐하면 그에 대하여 사람들이 지나치게 생각하지 않기를 원했던 것입니다(6절). 과대평가를 하지 않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물론 다 거짓이 아닌 진실한 말들이지만 말입니다. 이유는 사람들에게 영광을 받기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왜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육체의 가시를 주셨는지 잘 깨닫고 있습니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7절)고 합니다. 여기서 ‘가시’라고 하는 것은 원어에 의하면 실제로 ‘말뚝’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성경학자들마다 바울이 이야기하는 육체의 가시에 대한 해석이 다양하지만, 거의 대부분의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육체적인 질병으로 안질이나 말라리아 열병, 아니면 류마티즘, 혹은 간질병 등으로 생각합니다. 문제는 그의 질병이 어떤 것이었던 간에 그것이 주기적으로 찾아왔으며, 그 때마다 그를 죽음 직전까지 몰고 가는 무서운 병이었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사탄의 사자라고 표현했겠습니까?
   그래서 그가 간절히 어떻게 기도했느냐 하면, “이것이 내게서 떠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8절) 하였습니다. 바울이 세 번이라고 말하는 것은 한번에 40일 작정을 하고 기도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그 동안 통틀어 120일을 육체의 가시를 없애달라고 기도한 것입니다.
   여러분! 바울이 어떤 사람입니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질병을 고쳐주었습니까? 병 고치는 은사를 받았던 분이었습니다. 자기 설교를 듣고 졸다가 창문에서 떨어져 죽었던 유두고를 살린 바울이 아니었습니까? 그런데 자신의 육체의 질병은 못 고치고, 하나님께서 고쳐주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7절에서 두 번씩이나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이 질병을 준 것은 자고(자만)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서 임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 질병 때문에 교만하지 않을 수 있었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하나 배울 수 있는 것은 어떤 고통이나 어려운 일 가운데 원망과 불평이 있어도 사람에게는 하지 않고, 하나님께 나아가 부르짖는다는 것입니다. 인간이기에 전혀 원망하지도 않고 불평, 불만하지 않을 수 없으면, 하나님께 직접 한다는 것입니다. 많은 시편을 기록한 다윗처럼 종종 하나님 앞에 나아가 하소연을 하고, 억울함을 호소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깨닫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의 생각을 바꾸게 하셨다는 말입니다. 그 질병이 내게 꼭 필요한 가시임을 알고, 오히려 그 가시로 인하여 자신을 겸손하게 하심을 감사 드린다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처음에도 언급하였지만 이 세상에 가시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다만 종류가 다를 뿐 각자 다 하나 이상 가시가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마다 그 가시를 대하는 태도가 다릅니다. 여러분에게 있어서 가시는 무엇입니까? 그 괴로운 가시로 인하여 여러분이 겸손하여져서 더욱 성숙하게 되고 주님을 닮아가게 된다면 오히려 그 가시에 대하여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나를 괴롭게 하는 가시 때문에 내 인생이 하나님 앞에 성공하게 되니까 감사해야 합니다. 물론 생각하기 나름입니다. 반대로 생각하며 좌절할 수 있습니다. 낙심하며 살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생각을 바꾸시라고 하는 것입니다. 결코 가시가 불평의 조건이나 실패의 조건이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감사의 조건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기도해도 해도 가시가 없어지지 않으면 가시를 없애려고 하지 마십시오. 가시를 바꾸려고 하지 마시고 나를 바꾸어야 합니다. 내 생각을 바꾸어야 합니다. 만약 가시 같은 사람이 옆에 있다면 그를 이해하려고 하십시오. 그를 긍휼히 여길 마음을 달라고 하십시오. 축복하며, 격려하고 사십시오. 하나님께서 그 가시를 품을 수 있는 능력을 허락해 주십니다. 내가 달라집니다.
   육체의 가시를 없애달라고 기도했더니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어떻게 응답하셨습니까?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 짐이라 하신지라”(9절상)고 하셨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육체의 가시가 있는 그대로 내게 감당할 은혜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 가시 때문에 내가 약하여질 때, 겸손해질 때 하나님 앞에서 온전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 가시 때문에 끝까지 교만하지 않고 주님의 뜻을 따라 가도록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 깨달음 이후로부터 바울은 생각을 바꿉니다. 태도가 달라집니다.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을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함이라”(9절하)! 육체의 가시로 말미암아 연약해진 자신의 모습을 기뻐하면서 오히려 자랑했더니 주님의 능력이 나타나더라는 말씀입니다. 할렐루야!
   여러분! 만약 모든 것이 우리 뜻대로 된다면 우리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교만하여 완전히 타락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가 주님을 떠나지 못하도록 육체의 가시들을 주십니다. 모든 것을 우리 뜻대로 되지 않게 하시고 자주 영적으로 힘들게 하심으로 우리의 실체를 보게 하십니다. 하나님을 의존해야 하는 피조물임을 깨닫게 하십니다. 만약 우리 중에 우리 혼자 힘으로 주님의 일을 잘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위험한 인물입니다. 이유는 그가 지금 교만한 자리에 있으며 언제 넘어질지 모르는 그런 상태에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얼마나 잘 넘어지는 사람인지 아시고 여러 가지 안전장치를 마련해 놓으신 것입니다. 끝까지 주님을 붙들고 그 분께 매달려 있게 하기 위해서 입니다. 그래야 주님의 능력이 나타나니까요. 만약 하나님의 능력이 여러분 개인의 삶에, 우리 가정에 나타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만약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 교회에 나타난다면 어떤 일이 생길까요? 심령에 부흥이 일어나고, 사람들이 새롭게 변화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런 주님의 능력을 체험했기에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10절)! 자신의 연약함에 대한, 가시에 대한 관점이 바뀌니 약한 것들을 싫어하거나 수치스럽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기뻐한다고 합니다. 이유는 그럴 때 곧 하나님의 능력으로 강해짐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경향가든 교우 여러분!
   감사하지 못하는 것은 감사할 제목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감사할 생각을 못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풍부해도 감사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반대로 전혀 감사할 제목이 없는 것 같은 분들이 감사하는 것을 봅니다. 왜 그렇습니까? 생각의 차이입니다. 삶의 태도 차이입니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 잃어버린 것들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 있는 것을 생각하며 감사를 드리면, 하나님께서 이 어려운 상황을 어떻게 해서든지 선하신 뜻 안에서 바꾸실 것입니다. 내 믿음을 강하게 하시든지, 날 더욱 겸손하게 하셔서 주님의 인격이 드러나게 하실 것입니다. 원망하고 불평할 대상을 감사할 대상으로 여기십시오. 하나님께서 능력으로 역사하실 것입니다. 일이 잘 되거나, 세상적으로 성공해서 감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즉 환경이 감사의 조건이 아닙니다. 내가 감사함으로 환경이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감사하면 주어진 열악한 환경을 변화시킬 능력을 받게 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감사하는 마음이 있어서 일이 잘 되는 것입니다. 감사의 생각 때문에 성공하게 되는 것입니다.
   개척자 정신으로 시작된 미국의 역사는 실제로 개혁주의자들인 청교도(Puritans)들의 눈물의 감사로 시작되었습니다. 항해술이 취약했던 1620년 메리 여왕의 핍박을 피하여 영국에서 화란으로 건너간 청교도들이 성경적 신앙의 자유를 찾아 May Flower 라는 180톤의 작은 배를 타고 신대륙, 이 미국 땅으로 이민 와서 메사추세츠 주의 Plymouth 에 도착하여 정착을 했습니다. 146명이 함께 출발 했지만 긴 여행 중에 폭풍의 위험과 극심한 기아와 질병에 시달렸습니다. 1620년 성탄절 다음날 12월 26일, 117일간의 험난한 항해 끝에 Plymouth 에 도착하였을 때는 혹독하게 추운 겨울이었습니다. 도착하기도 전에 44명이 목숨을 잃는 아픔을 겪었으며 살아남은 사람은 102명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아주 추운 겨울에 도착한 그들은 그 해 겨울을 지내는 동안에 혹한(酷寒)과, 먹을 것이 없어서 굶주림의 기근(饑饉), 환경의 변화에 따른 풍토병(風土病), 원주민 인디안들의 습격(襲擊), 야생동물의 공격 등 수없이 많은 재난(災難)들로 이듬해 1621년 봄을 맞이하였을 때에는 겨우 50여명이 남았던 것입니다. 그들이 그 해 농사를 지어 가을에 처음 얻은 추수한 열매를 놓고 감격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그 곡식과 과일들을 가지고, 처음에 그들에게 친절을 베푼 원주민 인디언들을 초대하여 축제를 벌이며 하나님께 진심어린 감사의 열매를 드리고, 예배를 드리면서, 감사, 옥수수, 호박으로 만든 팬케이크를 굽고, 칠면조 고기를 요리해 함께 나누어 먹으며 교제한 것이 추수감사절의 유래입니다. 사실 환경만으로 보면 그들이 감사할 여건이 전혀 안됩니다. 지난 일년 동안 많은 생명을 잃었습니다. 그 가운데에는 부모들도, 자식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한 해 동안 겪은 고난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도 감사의 열매를 드리며 예배를 드렸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도의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진실과 겸손입니다. 진실하지 못하고 교만한 사람은 주님을 전적으로 의지하지 못하고 자기 힘과 머리만 믿다가 중간에 죄를 짓게 되고, 영적으로 육적으로 타락하게 됩니다. 또 다른 사람에게도 피해를 줍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육체의 가시를, 약점을, 약한 부분을 남겨 놓습니다. 그리하여 그 부분이 자기를 끊임없이 겸손하게 만들고, 그것 때문에 주님을 늘 의지하게 되어 그 약한 부분을 자랑하게 되고 사랑하게 됩니다. 즉 우리에게 있어서 치명적인 약점이 나중에는 자랑거리가 되고 면류관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진정으로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절대로 모든 것을 다 주시지 않습니다. 은혜를 주어도 어느 정도 남겨놓고 주시고, 나머지는 아무리 기도해도 주시지 않습니다. 이유는 그래야 끝까지 주님께 붙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생각을 바꾸십시오. 태도를 바꾸십시오. 우리의 고통은, 우리의 약한 부분은 우리에게 유익한 것입니다. 오히려 감사해 보십시오. 감사의 생각으로 바꾸면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날 것입니다. 그런 은혜가 넘치기를 축원합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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