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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태일 목사
작성일 2018-07-09 (월) 08:43
분 류 주일설교
ㆍ조회: 1151    
더 좋은 본향을 사모하며 믿음을 따라 죽었으니(히 11:11-16)



국가대표 축구선수였던 이영표는 그의 책 ‘생각이 내가 된다’에서 ‘하나님은 어떻게 사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죽느냐, 어디서 사느냐가 아니라 어디서 죽느냐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신다. 그리고 남겨둘 자들을 이 땅에 남겨두셔서 여전히 주님의 일을 행하게 하신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정말 지혜로운 사람은 이 세상을 어떻게 잘 사는 가를 생각하기보다 훗날 자신이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이 세상에 살다가 죽는 것으로 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후에 영원한 세상이 있고, 하나님에게만 아니라 이 땅에 남겨두고 가는 주위 사람들에게 어떤 평가를 받게 될 것을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생각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사는 것이 그냥 막 사는 사람과는 다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을 떠난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그의 가족과 주위 사람들에게, 아니 후대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을 끼치고 간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바로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믿음의 영웅들과 기독교 2000여년 역사에서 아직도 우리의 마음에 남아있는 훌륭한 신앙의 선배들이 그 예입니다.
진실로 믿음을 가진 성도들은 죽을 때 믿음을 따라 죽습니다. 특별히 죽은 후의 영원한 세상에 대한 확실한 소망을 갖고 이 세상을 떠납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삶이 전부가 아니라 그 후에 돌아갈 본향에 대한 사모함 때문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예외 없이 나이가 들면 자신이 자란 고향을 그리워합니다. 인간의 본성입니다. 우리처럼 이민을 온 교포들 가운데 고향인 한국에 돌아가서 죽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은 그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육신의 고향만을 생각해서 그렇습니다. 우리 믿는 자들에게는 영혼의 고향이 있습니다. 우리들은 하나님께로부터 났습니다.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니”(요일 5:1절상)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품 안이, 하나님 계신 곳이 우리의 영혼의 고향입니다. 우리가 죽으면 우리의 영혼은 곧바로 천국에 갑니다. 바로 오늘 본문에서 이야기하는 더 나은 본향입니다. 지난 주일에 살펴본 대로 아브라함의 가족들은 비록 멀리 이민을 와서 가나안 땅에 발 붙이고 살았지만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 곧 더 나은 본향을 바랐다고 하였습니다(10절).

사랑하는 여러분! 살아있는 믿음은 역동적이며, 그 능력을 나타냅니다. 믿음은 보지 못하는 것들을 보게 하며, 듣지 못하는 것들을 듣게 하며, 만질 수 없는 것들을 느끼게 하며, 불가능한 일들을 성취합니다. 인간적인 생각으로 100세의 아브라함과 90세의 사라가 아이를 갖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약속대로 사라는 이삭을 낳았습니다.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 늙어 단산하였으나 잉태하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앎이라”(11절)고 하였습니다. 창세기를 보면 사라는 처음에 믿음이 별로 없었던 것 같습니다. 아브라함이 75세 때에 부르심을 받고 믿음으로 고향을 떠났으며, 자손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으나(창 12:2, 13:16, 15:4) 사라는 믿지를 못하고 여종 하갈을 아브라함에게 주어 이스마엘을 낳게 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이 99세가 되어 89세의 사라의 몸에서 낳을 아들이 있으리라는 약속을 다시 받지만(창 17:16, 18:10), 사라는 속으로 웃고 맙니다(창 18:12). 자신의 경수가 끊어진 지 오래되는데 무슨 임신을 하겠느냐는 인간적인 생각으로 말입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굳게 믿어 사라에게 영향을 준 것 같습니다. 가정의 영적 지도자로서 아내에게 믿음이 생기도록 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라는 약속하신 하나님이 미쁘신 줄, 신실하신 줄 알게 되고 믿어 잉태하는 힘을 얻었던 것입니다. 그 결과 “이러므로 죽은 자와 방불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에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이 생육하였느니라”(12절)고 하였던 것입니다. 100세나 되어 이미 아기를 낳을 수 없게 된, 죽은 자와 같은 아브라함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훗날 그의 후손, 2백만 명이 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을 하게 되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정복하여 나라다운 나라가 된 것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신실하심을 믿는 것입니다. 하신 약속을 반드시 지키시는 전능하신 분임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민 23:19)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계획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 9:23)고 하셨고,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마 19:26)고 하셨습니다. 할렐루야!

그러면 하나님의 약속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믿는 믿음의 특징은 무엇일까요? 첫째로, 죽을 때 믿음을 따라 죽습니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13절상)라고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을 다 정복하고 각 지파 별로 땅을 기업으로 받은 것은 아브라함의 손자 야곱이 죽은 후 500년 가량 지난 다음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은 약속의 땅을 밟기는 했어도 두 번씩이나 기근으로 인하여 애굽에 내려갔으며 다시 돌아왔어도 그 땅을 차지하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그렇다고 슬퍼하거나 절망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다 성취되는 것을 보지 못했어도 미래에 이루어 주실 것이라는 확신 속에 죽었습니다. 멀리서 보고 환영했습니다. 기뻐하였습니다. 즉, 참 믿음을 가진 자들은 죽을 때에도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며 소망 가운데 이 세상을 떠납니다. 믿음으로 죽음을 맞이합니다.

둘째로, 이 세상에서는 외국인으로, 나그네로 살아갑니다. “또 땅에서는 외국인(foreigners)과 나그네(strangers)로라 증거하였으니”(13절하)고 하였습니다. 우리 이민자들이 너무 잘 적용할 수 있는 구절입니다. 우리가 한국에서 이민을 와서 미국 땅에서 살아가지만, 또 우리 자녀들이 비록 여기서 태어났다 하더라도 우리는 외국인으로 취급 받지 않습니까? 마찬가지로 불신자들에게 우리들은 영적으로 외국인 취급을 받는 것입니다. 나그네로, 낯선 자로 사는 것입니다. 사실 인생 자체가 나그네 인생이 아닙니까? 물론 불신자들도 나그네 인생이라고 노래하지만 그 의미는 판이하게 다릅니다. 불신자들은 죽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하지만, 우리 믿는 자들은 죽은 후에 영원한 세상이 있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그네라는 말보다는 순례자라는 말이 더 성경적입니다. 지난 주일에도 말씀드렸듯이 이 세상에서 순례자(pilgrims)로 살아갑니다. 예전에 즐겨 불렀던 복음성가가 생각납니다.
나는 순례자 낯선 나라에 언젠가 집에 돌아가리 어두운 세상 방황치 않고 예수와 함께 돌아가리
나는 순례자 방황하지만 예수 내 구주 이끄시네 영광의 나팔 소리 들릴 때 천사 날 위해 찾아오리
나는 순례자 피곤한 몸을 하늘나라에 누이시네 주 볼 때마다 영광 나타나 승리를 위해 찬양하리
 * 나는 순례자 돌아가리 날 기다리는 밝은 곳에 곧 돌아가리 기쁨의 나라 예수와 함께 길이 살리 *

우리는 순례자이기에 이 세상 눈에 보이는 것들에 그렇게 마음을 쓰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서 많은 것을 가지고 누리려고 하지 않습니다. 세상에 푹 빠지지 않습니다. 이 세상은 그냥 지나가는 정거장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세상보다 훨씬 더 좋은 곳이 기다리고 있음을 압니다. 그래서 그곳을 추구합니다. 한시도 잊지 않습니다.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14절)고 하였습니다.

셋째로, 그래서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합니다. “저희가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15-16절)고 하였습니다. 이 믿음의 영웅들도 자신들이 살던 본향, 즉 고향에 돌아가려고 했다면 기회가 있었다고 합니다. 아브라함이 죽기 전에 자신의 고향인 갈대아 우르로 얼마든지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더 나은 본향이 있음을 알고, 그 본향을 사모하였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욥도 그 어려운 가운데서도 “내가 알기에는 나의 구속자가 살아계시니 후일에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나의 이 가죽, 이것이 썩은 후에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욥 19:25-26)고 하였습니다. 하늘에 있는 천국을 소망하였던 것입니다.
참 믿음이 있는 모든 자들은 이렇게 앞으로 도래할 천국의 소망을 확신하고 사는 것입니다. 아니 천국을 사모하며 사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을 눈과 눈으로 마주 보기를 간절히 원하는 것입니다. 그 곳을, 그 때를 그리워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단들처럼 현실을 무시하는 것 아닙니다. 오늘 하루를 최선을 다하여 하나님 나라와 의를 위하여 최선을 다하여 살면서 그 때를 준비하는 것입니다.
그런 성도들에 대하여 하나님이 저희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신다고 하였습니다. 당연히 그럴 리가 없지요. 우리 하나님이 어떤 분입니까? 그런 믿음의 성도들에게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을 나타내 보이시는 분이십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히 여기리라”(삼상 2:30절하)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며, 그의 말씀을 청종하며 따르는 성도들을 하나님께서 존중히 여기십니다. 그리하여 정말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이미 예비하셨다고 했습니다(16절하). 예수님께서도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 14:1-3)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우리 믿는 자들이 죽으면 갈 곳을 이미 예비해 두신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살아있을 때에 재림하시면 직접 그곳으로 옮겨지게 됩니다.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사랑하는 가든교회 교우 여러분!
여러분들은 오늘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도성, 천국을 사모하며 사십니까? 다시 오신다고 약속하신 예수님이 그립고 보고 싶어서 오늘 밤에라도 오시기를 기다리십니까? 하나님께서 나를 오라 하실 때 믿음을 따라 이 세상을 떠나시렵니까? 아니면 죽기 싫어 발버둥을 치며 주위 사람들에게 전혀 은혜스럽지 않고 오히려 눈살을 찌푸리며 불쌍히 여김을 받으며 이 세상을 떠나시렵니까? 믿음이 있는 사람이라면, 천국 소망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렇게 이 세상을 떠나지 않습니다. 노래할 힘이 있다면 감사의 찬송을 하면서 떠날 것입니다. 기도하면서 떠날 것입니다. 비록 살아 생전에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들이 다 성취되는 것을 보지 못해도 말입니다.
어떻게, 어디서 죽음을 맞이하시겠습니까? 죽고 난 후에 어떤 아버지로, 어떤 어머니로, 어떤 자녀로, 어떤 형제, 자매로 각인되기 원합니까? 죽음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니 아직은 젊다고 생각하는 청장년들에게는 관계 없는 말씀으로 들리십니까? 아무도 모릅니다. 어제 죽음을 맞이한 사람 가운데 대부분은 어제가 마지막 날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몇 년이, 몇 날이 남은 것 같습니까? 만약 우리에게 아브라함을 비롯한 믿음의 영웅들이 가졌던 천국 소망의 믿음이 있다면 오늘을 그 날을 준비하는 마음으로 살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며, 존중히 여기며, 말씀을 따라 살 것입니다. 내 형제와 자매들을, 이웃들을 사랑하며 살 것입니다. 그래서 죽은 후에도 주위 사람들에게 은혜를 끼칠 것입니다. 죽음을 슬퍼하는 모든 이들이 ‘아, 이 분은 믿음을 따라 죽었다.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다가 결국 그곳으로 갔다’라는 말을 들을 것입니다. 남은 자들에게 믿음의 본을 보여서, 그 발자취를 따라 가려고 하는 자녀들과 성도들이 있을 것입니다. 마라나타!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계 22:21절하)! 그렇게 남은 여생을 살다가 주님을 만나는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충만하기를 축원합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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