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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정해경
작성일 2009-09-29 (화) 11:23
분 류 주일설교
ㆍ조회: 1826    
[9/27/09] 그리스도인의 교제를 통한 연합
그리스도인의 교제를 통한 연합 (시편 133:1-3)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들은 겉으로 좀 나타나는 휴매니즘(Humanism)의 이타적인 모습이 있다 하여도 궁극적으로는 자기 자신을 위한 이기적인 사람들이며, 어떤 문제에 부딪히면 결국 배신할 수 밖에 없는 사람들로 봅니다. 그리스도인들과는 진정으로 하나가 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성령이 아니고는 육체의 소욕을 이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령을 소유한 그리스도인들은 꾸준히 계속되는 진정한 교제로 말미암아 하나가 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아니 이미 성령께서 하나되게 하심을 지킬 수 있다고 믿습니다(엡 4:3). 주도 하나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하나님도 하나이시기 때문입니다(엡 4:5-6상). 바라보는 곳이 같기 때문입니다. 한 방향으로 걸어가기 때문입니다. 동일한 비전을 소유하였기 때문입니다. 바로 우리 모두 곧 얼굴과 얼굴로 예수님을 대할 날을 소망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 연합한 예를 다윗이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이 짧은 시편을 쓴 다윗은 표제에서도 언급이 되어 있듯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전에 올라가서 그들의 연합을 경험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성전에 모여 예배를 드리는 모습에서 발견한 것이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나되는 것이었습니다. 다양한 12지파에서 올라온 하나님의 백성들이 성전에서 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경배를 드렸습니다. 그들은 모두 같은 하나님을 믿었고 같은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갔습니다. 그곳에 성령께서 역사하심을 보았습니다.
사실 12지파로 구성되어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나뉘어지기 쉬웠습니다. 더욱이 이 지파들의 근원을 따지고 들어가 보면 본 부인에게서 난 자손이 있는가 하면 여종의 아들의 후손으로 이루어진 지파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이스라엘 자손들은 아버지는 같아도 서로 다른 배경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분열되기 쉬웠습니다. 그런데 그들을 하나로 묶는 강한 끈이 있었는데 바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믿음이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따르는 자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절기가 되면 모두 성전에 모여서 제사드리고 경배드렸습니다. 다윗이 그것을 생각하고 성전에 모이는 그 백성들을 바라보니 한 아버지 아래의 형제들로 그 모습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좋고 아름다운지 감격해 하고 있습니다.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1절)! 이 말이 함께 한 곳에 살기 때문에 좋고 아름답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을 믿는 한 믿음으로 모여 있는 공동체를 바라보니 그렇게 좋고 아름답더라는 고백입니다. 그리고 그 공동체에는 성령이 역사하였기에,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 옷깃까지 내림 같고”(2절) 라고 합니다. 이는 모세의 형 아론이 처음 대제사장으로서 기름 부음을 받을 때를 말씀합니다. 모세는 아론의 머리에 상당히 많은 양의 관유, 감람유를 부었고, 그래서 그 기름이 아론의 수염을 타고 흘러 그 옷깃까지 내려갔습니다. 이것은 바로 훗날 제사장들인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성령으로 기름 부음을 받을 것인지를 미리 내다보는, 예표하는 것입니다. 그 후 1000년 정도 지난 다음 우리 예수님께서 오셨고, 약속하신대로 부활한 후 오순절에 성령이 충만하게 내려와 예루살렘 교회가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그 성령의 충만한 은혜로 말미암아 모였던 그리스도인들에게 큰 기쁨이 넘치게 되었습니다.

성령님이 어떤 분입니까?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과 똑 같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성령님을 마치 물처럼 우리에게 부어주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령님에 대하여 ‘부어진다’ ‘넘친다’ ‘강같이 흐른다’는 표현을 씁니다. 이 성령님이 우리에게 십자가에서 죽으신 분이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믿어지게 하시고, 그 예수님이 나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것을 믿게 하십니다. 또한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의 심령에 오셔서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는 똑 같은 믿음을 가지게 하시며, 똑 같은 소망을 가지게 하십니다.
특히 성령님께서는 우리 안에서 무한대로 능력과 은혜를 부으실 수 있습니다. 그 때 우리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게 됩니다. 그야말로 우리의 인격이 성령의 감동으로 가득채워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격이 성령님께서 주시는 기쁨과 은혜로 충만하여져서 온통 그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성령충만함의 은혜는 개인적으로 주어지는 것보다 이렇게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모여서 예배를 드릴 때에 동일한 성령의 은혜로 충만해지는 일이 생긴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오순절에 예루살렘 어느 다락방에서 120명이 함께 모여서 기도에 전념할 때에 일어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다윗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함께 성전에 모여 예배를 드리면서 그런 놀라운 성령님을 체험한 것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축복들도 받았는데 마치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3절상) 라는 것입니다. 헐몬 산은 눈이 많이 덮여있는 이스라엘에서 가장 높은 산입니다. 이 산의 눈이 녹으면서 이것이 수증기가 되어 하늘로 올라가면 주위에 있는 모든 산들과 들에 충만한 이슬이 내리게 됩니다. 그런데 이 이슬의 양이 풍부하여 주위에 있는 밭이 충분한 수분을 공급 받게 되어 많은 곡식들이 잘되고, 과일들이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비가 잘 오지 않는 이스라엘 땅에서 이슬이라고 하는 것은 곡식이 자라는데 필수적인 수분을 공급합니다. 그래서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3절하) 하신 것입니다. 더 정확한 번역은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하시고 심지어 영생까지도 주셨음이니라’ 입니다. 즉 여호와 하나님께서 믿음으로 연합한 그들에게 영적인 축복만 주신 것이 아니라, 다른 축복들도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러한 이 땅에서의 복을 주시며, 영생까지 허락하셨다는 것입니다. 믿으시기를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사랑하는 경향가든 교우 여러분!
왜 이 세상 불신자들과의 교제에서는 믿을만한 참된 관계를 맺을 수 없기에 연합할 수 없는데, 그리스도인들의 교제를 통하여는 참된 관계를 맺고 연합할 수 있습니까?
첫째는, 다윗 때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하나님을 중심하고 함께 경배드리며 하나님을 믿는 믿음,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는 믿음 때문입니다. 하나되게 하시는 성령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한 마음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곧 그리스도인의 교제는 본질적으로 성령으로 인해 다시 태어난 생명에서 시작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가 내 모친이며 내 동생들이냐 하시고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켜 가라사대 나의 모친과 나의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마 12:48하-50절) 하셨습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입니다(요 6:29).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주 안에서 형제, 자매의 교제는 그 본질적인 출발이 믿음입니다. 이 믿음으로 영적인 형제, 자매가 된 것으로부터 출발합니다. 우리는 때때로 육친의 골육보다 영적 가족이 된 형제, 자매들이 마음으로 더 가까워지는 사실을 경험하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 권속들의 생활의 중심에, 구심점이 살아계신 하나님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그리스도인의 교제는 그 방향과 목적이 같기 때문입니다. 서론에서 잠시 언급하였듯이 세상에 믿지 않는 사람들과 마음이 하나되지 못하고 사이가 벌어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 자녀들의 인생의 종착역은 지금 예수님께서 계신 천국입니다. 그 곳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땅에 사는 인생의 의미와 목적이 하나님 나라에 있습니다. 하나님 영광에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고 하였습니다. 우리 각자가 하는 일이 다 다르지만, 그 방법이 다르지만, 그 모든 일들을 하고 사는 하나의 분명하고 확실한 목적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는 목적이 다른 사람들과 하나가 된다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습니까? 가는 방향이 다른데 어떻게 하나가 될 수 있겠습니까?

셋째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 방향과 목적이 같기 때문에 각자 행하는 모든 행동이 조금 달라도 금방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교제는 더욱 깊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나를 이해해 준다고 하는 것은 얼마나 두 사람 사이를 가깝게 해 주는지 모릅니다. 나를 이해할 수 없는 사람과는 말이 통하지를 않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불신자가 나를 이해한다는 말입니까? 물론 인간은 누구나 다 외로움을 느끼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라고 예외는 아닙니다. 그러나 그 누구보다도 우리 자신을 더 잘 아시는 예수님께서 친구가 되시고, 서로 예수님을 마음에 품고 있으니 진솔한 교제를 나누면 외로움을 이기고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요 15:14-15) 하셨습니다. 우리를 부르신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하여서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으며 사랑 가운데서 용납할 수 있습니다(엡 4:1-2).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좇으라”(딤후 2:22) 하신 말씀에 순종하여서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경향가든 교우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의 사랑의 교제는 불신자들에게는 전혀 불가능한 아름다운 관계를 만들어 하나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다윗의 고백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주 안에서 형제가 되어 연합하여 동거함이 그렇게 좋고 아름다울 수 있는 것입니다. 이유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는 믿음, 성령님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 살아가는 목적이, 걸어가는 방향이 같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조금 생각이 달라도 서로 이해할 수 있고, 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의 교제가 그러한 참된 그리스도인의 교제가 되어 하나됨의 기쁨과 즐거움을 누리고 신앙생활하기를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주여, 어느 친구와 악수했을 때
수심에 차고 슬퍼하는 그의 얼굴을 보고
그의 마음 속에 주님이 안 계시는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이 생겼습니다.
문이 닫혀져 있는 암실 앞에서
그 안에 주님이 계시는지 잘 모를 때처럼 그 친구 앞에 서 있기가 매우 거북했습니다.

주여, 당신이 나와 친구 사이에 계시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아마 차갑게 헤어졌을 것입니다.
내 손을 맞잡은 그의 손은 살덩이에 불과하고
내게 대한 그의 마음도 한 인간에 대한 정 이상의 것은 아니었습니다.
주여, 주님의 생명을 나에게 주시듯 그에게 따뜻함을 주시옵소서
주님의 힘이 있어야만 그가 참된 내 친구, 내 형제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이렇게 ‘내 친구’ 라는 제목의 글을 남겼습니다. 참으로 공감이 가는 글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 오신 이후 2000여년의 기독교 역사는 참된 그리스도인들의 연합으로 놀라운 일들을 창조해 내었습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의 교제가 꽃피는 곳에는 언제나 하나님 나라가 왕성하였습니다. 우리 경향가든의 동산에 참된 그리스도인의 교제가 넘쳐 나서, 하나됨의 열매들을 따 먹을 수 있는 동산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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