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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태일 목사
작성일 2018-09-27 (목) 11:46
분 류 수요설교
ㆍ조회: 1247    
내가 여기 있나이다(창 22:1-14)
오늘 함께 읽은 본문은 우리가 너무 잘 알고 있는 내용입니다. 어느 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test) 하기 위하여 100세에 얻은 독자 이삭을 모리아 땅으로 가서 번제물로 바치라고 합니다(창 22:1-2). 그렇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기 위하여 부르실 때에 아브라함은 “내가 여기 있나이다”(1절)라고 대답합니다.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듣고 순종하겠다는 자세입니다. 이는 헌신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하신 것을 보면, 대부분의 아버지들처럼 독자 이삭은 아브라함이 엄청 사랑하는 아들이었습니다. 75세에 아들을 주시겠다고, 그 후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많아질 것이라고 약속하신 하나님이셨습니다. 그 후 25년이 지난 다음에 90세 된 사라의 몸에서 기적같이 드디어 아들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 편에서 생각하자면, 하나님의 요구는 참으로 너무한 것이기에 얼마든지 하나님께 대항하며 참 하나님답지 않은 요구라고 생각하고 그 명령에 망설이거나 불복종 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아무 말없이 다음날 아침 일찍 독자 이삭과 두 하인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도 준비해서 하나님께서 지시한 땅 모리아 땅(지금의 예루살렘)으로 아침 일찍이 가는 것을 봅니다(3절). 브엘세바에서 모리아 땅까지는 약 50 마일입니다. 3일 길입니다(4절). 아마 그 3일이 아브라함에게는 고통의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자신과 싸움하는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얼마든지 마음을 바꾸어 돌아갈 수도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아가 죽는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한편 부인 사라는 어떻게 된 것입니까? 왜 성경에 사라에 대하여 전혀 언급이 없을까요? 아브라함이 사라에게 알렸다면, 사라와 의논했다면 어떻게 되었을 것 같습니까? 저는 크게 부부 싸움이 일어났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누가 더 이삭을 사랑했을 것 같습니까? 부성애라는 말보다 모성애라는 말이 우리의 귀에 더 익숙한 이유는 아무래도 만 9개월 자신의 몸 안에서 키운 어머니가 아버지보다 자식을 조금 더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이삭을 번제로 바친다고 이야기를 했더라면 아마 아브라함에게 욕을 했을 것입니다. 당신이나 제물로 바치라고, 아니 나를 대신 바치라고 울부짖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아무 말도 사라에게 하지 않은 것으로 생각됩니다.
또한 모리아 땅에 도착하자 아브라함은 하인들에게 말합니다.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경배하고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5절). 아마 하인들과 같이 산에 올라갔으면 그들이 자기의 행동을 막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산 아래에 떼어놓은 것 같습니다. 이런 행동들이 믿음으로 여겨집니다. 그런데 이 구절에서 중요한 말이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we will come back to you)” 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이삭을 살리실 줄을 믿었던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었던 믿음의 근거를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히 11:19)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이삭이 아브라함의 가슴을 찢어지게 하는 질문인“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7절하) 물으니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8절)고 대답을 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잘 알고 믿었던 아브라함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이삭을 요구하실 때에는 이미 준비해 놓으시고 허락하실 줄을 믿고 순종하였던 것입니다. 이 전에 주신 약속의 말씀인 자기의 후손이 하늘의 뭇 별들과 같이 많을 것이라고 하였기에 조금도 의심 없이, 만약 독자 이삭을 요구하시면 분명히 무슨 뜻이 있을 것이며, 아마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시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실 것을 알았습니다. 신뢰하였습니다.
이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표이기도 합니다. 모리아 땅(예루살렘), 번제물 어린 양, 기적으로 얻은 독자 이삭, 다시 살리심! 하나님 아버지께서 독생자 예수님을 온 세상 죄를 위하여 바치신 것처럼, 아브라함은 자신의 독자를 아무 불평도 없이 기꺼이 바치고 있습니다.
정확한 장소에 도착하자, 아브라함은 돌로 제단을 쌓고 그 위에 나무를 얹었습니다(9절). 그런 다음 그는 이삭을 결박하여 나무 위에 놓았습니다. 아브라함이 손을 들고 칼로 자기 아들의 가슴을 찌르려는 순간(10절), 단 일초도 어긋남이 없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가라사대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11-12절)!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또 다시 “내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합니다.
결정적인 순간,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눈을 들어보니 근처 가시나무에 뿔이 걸려 꼼짝 못하고 있는 수양 한 마리를 보았습니다(13절). 자기 아들의 생명을 취하는데 사용하려던 그 칼로 아브라함은 수양을 죽여 피를 내고, 아들 대신 번제물로 제단에 놓고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그리고는 그 곳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 불렀습니다(14절). 히브리어에 ‘이레’라는 말은 ‘준비하다, 제공하다(provide)’ 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나온 말이 섭리(Provision) 입니다. 미리 보신다는 뜻입니다. 즉 ‘이 곳은 하나님께서 나의 필요를 보시고 미리 양을 준비해 놓으신 곳이다’라고 신앙고백을 한 것입니다.

우리가 이 본문의 이야기를 들을 때에 아브라함의 믿음과 순종에만 초점을 맞추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의 초점은 ‘우리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냐’는 데에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과 순종이 위대하다면, 우리 하나님은 훨씬 더 위대하십니다. 아브라함에게 불가능해 보이는 명령을 하시고, 아브라함에게 없는 것을 준비시켰다가 허락하셨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원하신 것은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의 죽음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자신이었습니다. 이삭은 아브라함 자신의 전부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을 온전히 드리는 아브라함이기에 자기 생각에 이해가 되지 않더라도 아무런 토를 달지 않는 순종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요구하셨던 일을 여러분에게 요구하신다면 여러분들은 어떤 반응을 보이시겠습니까? 여러분의 생각에 정말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을 요구하신다면 그래도 믿음을 가지고 순종하시겠습니까? 만약 여러분이 그럴 수 있다는 것은 여러분이 알고 믿고 있는 분이 아브라함의 하나님과, 신구약 성경의 하나님과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하나님을 그렇게 알고 보고 믿고 있다면, 여러분이 여러분 자신을 온전히 하나님께 드리는 헌신이 가능합니다. 충성이 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정말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삭을 번제로 드리려고 칼을 들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12절하)고 하십니다.
여러분은 정말 하나님을 경외하고 있습니까? 우리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잘 알고 경외하기에 하나님을 신뢰하여 헌신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내게 무엇을 말씀하실 때에는 순종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늘 우리를 놓치지 않으십니다. 언제나 신실하십니다. 실수가 없으신 분입니다. 정말 신뢰할만한 분입니다. 그래서 이런 믿음이면 얼마든지 헌신할 수 있습니다. 충성할 수 있습니다. 순종할 수 있습니다. 많은 교인들이 진실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이 없기에,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을 드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헌신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가든교회 교우 여러분! 에스더전도회 회원 여러분!
앞서 언급하였듯이 오늘 본문의 내용에서 우리는 복음을 만납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보고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 1:29)고 하였습니다. 구약의 백성들은 자신들의 죄 사함을 위하여 희생 제물을 제사장에게 들고 나와 예배를 드렸습니다. 제사장들은 매일 서서 백성들의 희생 제물들을 잡아 피를 뿌리고, 불에 태워야 했습니다. 그 짐승의 피로 그들의 죄가 잠시 덮어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완벽한 희생 제물인 순전한 어린 양,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주셨습니다. 우리의 죄를 위하여 바쳐진 하나님의 어린 양이었습니다. 구약 시대처럼 잠시 죄가 덮어지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사라지고, 제거되고, 지워지고 마는 것이었습니다. 죄의 대가를 일시에 다 치르셨습니다. 더 이상 동물의 피가 필요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 상에서 “다 이루었다”(요 19:30)고 외치신 것입니다. 구속의 역사가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죄 값을 다 치렀다’, ‘제사는 끝났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명이 완수되었습니다. 십자가를 지시는 것은 우리 예수님에게도 인간적으로 매우 고통스러운 시간들이었지만, 하나님께서 자신의 피를 요구하실 때에는 다시 살리실 것도 아셨기에 기꺼이 자원하여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선하신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아시고 채우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죄로 인해 죽은 것을 아시고 생명을 주시기 위해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우리 자신을 돌아볼 때에는 아무 소망이 없는 줄 아시고 천국 소망을 주시기 위하여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고아처럼 외로운 줄 아시고 하나님의 가족을 만들려고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가난하다는 것을 아시고 우리를 부유하게 하시려고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우리가 죄의 노예인 것을 아시고 우리를 자유케 하시려고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우리에게 능력이 필요한 줄 아시고 성령님을 보내셨습니다. 기도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우리에게 격려가 필요한 줄 아시고 교회의 형제 자매들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 거하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우리가 무엇이 필요한지 아시고 그 뜻 안에서 허락하십니다. 믿음으로 그 품에 안기면 됩니다. 헌신하고 순종하면 됩니다. 그 많은 복을 다 누릴 수 있습니다. 얼마나 좋으신 하나님이십니까? 할렐루야!

사랑하는 여러분!
믿음(faith), 헌신(commitment), 충성(faithfulness), 순종(obedience) 다 같은 맥락의 동의어들입니다. 다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참된 믿음이 있다면, 하나님을 삶의 주인으로 여긴다면 당연히 헌신하게 되어 있습니다. 충성하게 되어 있습니다. 주인의 말에 순종하게 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고 진실로 경외하고 신뢰하였기에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축복의 통로가 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만약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참 하나님으로 믿는다면 하나님께서는 오늘 여러분 자신을 원하십니다. 여러분의 마음을 원하십니다. 갈라지지 않은 전심을 원하십니다.‘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면서 나아갔던 아브라함처럼 여러분 자신을 드리며 헌신하시기를 바랍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요구하시는 하나님이십니까? 그 때에도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이미 허락하신 것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아니면 이미 준비해 놓고 허락해 주실 것입니다.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필요를 채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준비된 어린 양을 기억하십시오. 그 독자 예수 그리스도를 비롯하여 모든 것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약 1:17)고 하였으며,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롬 8:32)라고 하였습니다.
여러분! 사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다 준비해 놓으셨다가 허락하십니다. 모든 것이 다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온 것이 아닙니까? 사실 모든 것 다 갖고 계시는 하나님께 우리가 드릴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다만 하나님께서 먼저 주신 것을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되돌려 드리는 것에 불과합니다. 우리의 생명도, 영생도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 아닙니다. 죽었던 우리를 살려주셨습니다. 그리고는 우리 자신을 원하십니다. 우리 삶을 원하십니다. 이미 허락해 주신 것을 요구하시는데, 불순종한다면 그 같은 배은망덕한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 모두는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을 온전히 믿고, 부르실 때에, 쓰시고자 하실 때에 ‘내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하며, 우리 자신을 온전히 드리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참된 헌신입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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