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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태일 목사
작성일 2017-11-13 (월) 07:49
분 류 주일설교
ㆍ조회: 1444    
더 좋은 새 언약(히 8:1-13)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합니다. 어느 누가 생각할 수 있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사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게 하시고, 부활 승천하시게 한다는 오묘한 섭리를 말입니다.
옛 언약의 사랑도 귀하지만, 새 언약의 사랑에 비하면 큰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님 사랑은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지만 우리가 보기에 말입니다. 옛 언약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과 그림자만 있었습니다. 그러나 새 언약에서는 그 실체,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나신 것입니다. 더 확실히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옛 언약의 백성들보다 우리는 훨씬 더 잘 믿을 수 있습니다. 더 확신에 찬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더 좋은 새 언약의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었으며 새 언약이 왜 더 좋은 언약인지 말해주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제 하는 말의 중요한 것은 이러한 대제사장이 우리에게 있는 것이라”(1절상)고 8장을 시작합니다. 여태까지 구약의 제사장들과는 다른 월등한 예수님의 대제사장 직분에 대하여 설명해 왔습니다. 왕이며 대제사장이었던 멜기세덱의 반열을 따르는 대제사장 예수님이 바로 우리에게 있다고 합니다. 지금 여기에 계십니다. 우리 안에 계십니다. 영으로 말입니다. 신앙생활이란 이런 예수님을 만나고, 교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 예수님이 어떤 분입니까? “그가 하늘에서 위엄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으니”(1절하)라고 하였듯이 존귀하신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계신 분입니다. 절대주권으로, 못 하실 일이 없는 무한한 능력으로 다스리시는 분입니다.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이십니다. 그런데 그런 위대하신 분께서 우리를 섬기십니다. “성소와 참장막에 부리는 자라 이 장막은 주께서 베푸신 것이요 사람이 한 것이 아니니라”(2절)고 하였습니다. 여기 ‘부린다’는 단어는 사역한다(minister), 섬긴다는 뜻입니다. 성소와 참장막은 예수님께서 현재 사역하시는 곳, 하늘의 성소를 가리킵니다. 이는 오늘날 그 모형인 예수 그리스도의 몸인 하나님의 집을 말한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즉 높고 높은 곳에 계신 영광의 주님께서 우리를 섬기고 계십니다. 중보하고 계십니다. 얼마나 감사할 일입니까?
그리고 예수님도 옛 언약의 대제사장들처럼 예물과 제사를 드려야 했는데, 그들은 계속해서 속죄를 위한 희생제물을 드렸지만 예수님은 단번에 자신을, 몸을 드렸던 것입니다(3절). 이유는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가 되시기 때문이었습니다(6절). 훨씬 더 아름다운 직분입니다. 율법에 의한 제사장으로 섬기는 지파에서 나신 분이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만일 땅에 계셨더면 제사장이 되지 아니하셨을 것이니 이는 율법을 좇아 예물을 드리는 제사장이 있음이라”(4절)고 하였습니다. 땅에 있었던 제사장 직분은 모형과 그림자일뿐이었습니다(5절).
여기 6절에서 더 좋은 약속, 더 좋은 언약이라고 할 때 사용한 언약이라는 단어를 살펴보기 원합니다. 헬라어에는 언약이라는 뜻으로 번역되는 단어 둘이 있습니다. 하나는 '숨훠논'과 다른 하나는 '디아테이케이'입니다. 숨훠논(agreement)은 쌍방이 어떤 조건 하에 서로 동의하여 이루어지는 약속입니다. 이는 한 쪽에서 약속을, 조건을 지키지 않으면 깨어지는 것입니다. 오늘날 ‘계약(contract)’이라고 번역하면 좋습니다.. 집을 사고 팔 때, 사업을 사고 팔 때, 국가 간에 조약을 맺을 때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이런 계약은 파기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런데 디아테이케이(covenant or testament)는 그것보다 훨씬 더 쌍방을 강하게 묶어주는 개념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단어입니다. 어떤 조건 하에 동등한 입장에서 약속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하시는 약속입니다. 우리와 의논해서 하는 약속이 아닙니다. 계약은 타협이나 흥정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언약은 우리 인간 쪽에서 하나님을 믿고 받아들이느냐, 못 믿고 받아들이지 않느냐가 문제입니다. 이 단어에는 유언장의 의미도 있습니다. 유언은 받아들이느냐 안 받아들이느냐에 달린 것이지 타협이나 흥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순종하느냐 하지 않느냐 선택의 문제일 뿐입니다.
새 언약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믿고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다음에는 깨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한번 언약을 맺으면 내가 아무리 잘못을 해도 하나님 사랑이 끊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이런 언약의 개념이 강한 것이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새 언약입니다. 옛 언약, 특히 모세의 언약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 조건이 들어간 언약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언약이 흠이 있어서 새 언약을 허락했다고, “저 첫 언약이 무흠하였더면 둘째 것을 요구할 일이 없었으려니와”(7절)라고 한 것입니다.
그럼 결혼은 계약입니까? 언약입니까?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계약일 수 밖에 없습니다. 살다가 남편이나 아내가 일방적으로 싫다고 파기할 수 있습니다. 한 쪽이 신실하게 자기의 본분을 다 한다 하더라도 소용이 없습니다. 다른 한 쪽이 신실하지 못해서 헤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요즘은 부부가 Pre-nuptial Agreement 하고 결혼을 합니다. 그래서 파기되면 재산 분배를 약속한대로 하자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는 사람들에게 결혼은 언약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아무 조건 없이 서로 서약한 것이니 한 쪽에서 파기한다고 깨어질 수 없습니다. 바로 성경이 말하는 결혼관입니다. 잊지 마십시오.

히브리서 저자는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면서, 이미 예레미야 31장 31-34절에서 말한 새 언약에 대한 예언을 인용하면서 계속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선 하나님께서 새 언약을 주시는 이유를 말합니다. “주께서 가라사대 볼지어다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으로 새 언약을 세우리라 또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저희 열조들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저희와 세운 언약과 같지 아니하도다 저희는 내 언약 안에 머물러 있지 아니하므로 내가 저희를 돌아보지 아니하였노라”(8-9절)고 하였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의 놀라운 기적을 체험하고 광야에 들어서자 마자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그들과 언약을 세웠건만 하나님과의 언약 안에 머물러 있지를 않고 자꾸 우상을 섬기면서 하나님을 멀리 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아무 조건이 없는 새 언약을 세우겠다고 하셨습니다.
이어서 이 새 언약의 내용을, 그 특징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옛 언약과의 차이를 말하고 있습니다. 우선 헬라어에 ‘새롭다’라는 단어도 둘이 있는데 하나는 '네오스'며, 또 하나는 '카이노스'입니다. 네오스(fresh, young)는 시간이 새로운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카이노스(new quality, unused)는 질적으로 새로운 것을 뜻합니다. 바로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7)에서 사용한 단어입니다. 즉 첫째로, 새 언약은 옛 언약과는 질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새 언약을 맺은 우리는 본질적으로 달라진 사람들입니다. 성령으로 완전히 새로 태어난 사람, 거듭난 사람들입니다.
둘째로, 새 언약은 하나님의 법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에 새겨지는 것입니다. “또 주께서 가라사대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으로 세울 언약이 이것이니 내 법을 저희 생각에 두고 저희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 나는 저희에게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내게 백성이 되리라”(10절)고 하였습니다. 옛 언약의 율법은 돌판에 기록하였었습니다. 율법대로 살지 않으면,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하나님의 징계를 받았습니다. 할례는 육체에 행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새 언약은 그런 돌판이나 육체에 새기는 것이 아니라 마음(heart)과 생각(mind)에 새기는 것입니다. 마음에 할례를 받는 것입니다. 즉 새 언약은 내적인 것입니다. 전인격적인 것입니다. 성령의 인침으로 속 사람이 바뀌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이, 그 도가 우리의 삶 전체에 영향을 미치게 된 것입니다. 옛 언약에서는 무엇이 선한 길이고 무엇이 악한 길인지를 가르쳐줄 뿐이었지, 선한 길, 의의 길을 갈 수 있는 힘을 제공해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새 언약에서는 우리 안에 성령님을 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의 법도를 따를 수 있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선한 길, 의의 길을 알게 하실 뿐만 아니라 그 길을 갈 수 있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얼마든지 의의 삶을 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어쩌면 이것이 옛 언약과의 가장 큰 차이입니다.
셋째로, 새 언약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고 우리는 하나님께 속한 백성들이 되는 것입니다. 구약 시대보다 그 개념이 훨씬 강합니다. 즉 뗄레야 뗄 수 없는 친밀한 관계가 이루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다 하나님을 잘 알게 됩니다. 가까이 동행할 수 있게 됩니다. 마치 자녀가 부모를 잘 알듯이 말입니다. 이것도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또 각각 자기 나라 사람과 각각 자기 형제를 가르쳐 이르기를 주를 알라 하지 아니할 것은 저희가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11절)고 하였습니다. 여기 보면 세상 모든 나라, 민족들을 초월하여 하나님을 알게 된다고 합니다. 신분의 차이를 넘어서서 다 알게 된다고 합니다. 누구나 차별 없이 믿음으로 복음을 받아들이면 구원을 받게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넷째로, 새 언약은 우리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한이 없다고 합니다. “내가 저희 불의를 긍휼히 여기고 저희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12절)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어떤 잘못도, 어떤 죄도 회개하기만 하면 그의 긍휼하심으로 인하여 다시 기억조차 하지 않으신다고 합니다. 사실 우리가 회개하지 않은 죄조차도 그에 대한 형벌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갚으셨으니 우리에게는 정죄나 심판은 없는 것입니다. 옛 언약의 율법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용서와 긍휼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사랑하는 가든교회 교우 여러분!
옛 언약에서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유지하려면 율법을 지켜야 했습니다. 그러나 새 언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주님과의 관계가 설정됩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목자와 양과의 관계, 신랑과 신부의 관계가 맺어지는 것입니다.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이 관계가 영원히 보증이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며, 우리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께 속했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하면서 우리가 하나님과 이런 언약을 맺고 있다는 사실을 한 순간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러면 신앙이 흔들리지 않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잘못해도 주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시며, 목자이시며, 신랑이십니다. 회개할 때까지 잠시 교제가 끊어질 수는 있어도 여전히 사랑의 아버지이시며, 목자이시며, 신랑이십니다. 무한한 용서와 사랑을 경험합니다.
또한 우리 안에 성령 하나님께서 내주하셔서, 우리 마음과 생각에 하나님의 법을 새겨주셨기에 얼마든지 죄를 이기게 하시며, 선한 일을 하게 하십니다. 만약 우리가 우리 자아를 내려놓고 성령님께서 일하시도록 양보한다면 능력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 안에 거하기만 하면 풍성한 삶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요 10:10).
뿐만 아니라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필요를 다 아시고 하나님 아버지께 간구하셔서 채워주십니다. 우리도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담대히 하나님 보좌에 나아갈 수 있습니다(히 4:16). 소망을 잃지 않습니다.
이러한 새 언약의 진리를 깨닫는다면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습니다. 언제나 어느 때나 ‘하나님 아버지, 우리를 위하여 하신 놀라운 일들을 인하여 감사를 드립니다’라고 말하며, 찬송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을 참으로 경외하게 됩니다. 존중하게 됩니다. 두려워하게 됩니다. 사랑하게 됩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새 언약 아래 있게 되었음을 기억하고 사는 은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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