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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태일 목사
작성일 2019-03-18 (월) 05:39
분 류 주일설교
ㆍ조회: 953    
세례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눅 3:21-23)
자녀들이 가장 기쁠 때가 부모님에게 인정을 받을 때라고 생각합니다. 낳으시고 기르신 부모님, 사랑하고 공경하는 부모님으로부터 칭찬을 받을 때, 훌륭한 아들이나 딸로 인정을 받음으로 부모에게 큰 보람을 느끼게 해드린다고 생각할 때입니다.
사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예수님의 세례를 받으시는 장면은 사복음서에 모두 기록된, 만왕의 왕으로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대관식(戴冠式, Coronation), 혹은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이제 온 세상 구세주로 위임(委任)을 받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인정(Confirmation)을 받는 것입니다. 그 동안 누가는 세례 요한이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준비하는 모습을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했습니다. 이제 예수님의 세례를 받으시는 모습과 그의 족보를 기록함으로 온 백성들의 메시아, 구세주로서의 자신을 드러내는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뚜렷한 삼위(Trinity), 성부, 성자, 성령께서 나타나시는 계시의 말씀입니다.

첫째, 세례를 받으시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백성이 다 세례를 받을새 예수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리며”(21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고자 나온 사람들 사이에서 그들과 자신을 동일시 하면서 나오신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전혀 생각지도 못하는 일입니다. 그는 예수님이 메시아로서 참 하나님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요 1:29)고 함으로, 분명히 예수님이 메시아임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마 3:14)라고 말렸던 것입니다. 세례 요한이 주는 세례는 죄에 대한 고백과 회개에 따르는 외적 표시였기에, 자신이 오히려 세례를 받아야지 죄 없으신 주님이 세례를 받는다는 것이 용납이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지 않고 나오는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에게 세례 주기를 거부했던 이유와는 정반대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요 1:29)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를 인정했던 세례 요한이었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 4:15)고 하였듯이, 죄가 없으신 분이 회개의 세례를 받으러 나왔으니 요한이 당황한 것입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에게 물 세례를 받으시고자 하였습니까? 마태복음 병행구절에 해답이 나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신대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마 3:15)고 하였습니다. 한마디로 세례를 받으시는 이유는 모든 의를 이루기 위해서라는 말씀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우선, 첫 대제사장으로서 그 예표인 아론처럼 백성의 속죄를 위하여 몸을 씻고 기름을 발라야 했습니다(출 29:4-7; 레 8:6-36). 아니 그보다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에게 순종의 본을 보이기 위해서였습니다. 세례 요한과 더불어 모든 의를 이루기 위하여 요한의 의의 기준이 옳고, 모든 사람이 그 뒤를 따라가야 할 하나님의 뜻임을 입증하는 행동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죄인된 사람들과 동일시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심은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오신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나 의지적으로 죄인들과 하나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메시아를 가리켜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음이라 그러나 실상은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지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하시니라”(사 53:12하)고 공언하였습니다. 사실 오늘 이 세례를 받으시는 행위가 주님께서 성취하실 구속사역의, 공생애의 첫 걸음인 것입니다. 죄 없으신 분이 죄인들이 받을 세례에까지 자신을 순종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죽음과 부활의 상징으로 세례를 받으셨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공생애 사역 가운데 세례를 꼭 두 번 언급하셨는데, 한번은 죽음을 앞두고 예루살렘 성전에 오르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 이루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눅 12:50)고 하셨고, 또 한번은 야고보와 사도 요한이 천국에서의 높은 자리를 요구하자,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 도다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막 10:38)고 하시면서 그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상징하였습니다. 마치 바울이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라”(롬 6:4)고 우리가 받는 세례의 의미를 말하였던 것처럼 말입니다.

둘째로, 성령의 기름 부으심 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리면서, “성령이 형체로 비둘기 같이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22절상) 라고 합니다. 이미 하나님께서 세례 요한에게 약속하신 말씀,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인 줄 알라”(요 1:33) 하신 것처럼 성령이 임하였습니다.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했다는 구절이 성경 전체에서 여기 밖에 없는데, 혹자는 당시 비둘기라 함은 희생제물을 이었기에 주님의 희생을 상징하는 것이 아닌가 여깁니다. 부자들을 제외한 많은 가난한 사람들은 절기에 제사장들에게 비둘기 정도 밖에는 제물을 드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헌데 오해하지는 마십시오. 성령의 모습이 비둘기 같다는 뜻이 아닙니다. 성령이 예수님 위에 임하시는 것이 마치 비둘기가 땅에 내려오는 것과 같더라는 표현합니다.
하여튼 왜 성령이 예수님에게 임하였을까요? 예수님께서 사람의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고 하여 그의 신성(Divinity)이 없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태초부터 참 하나님이셨습니다. 그 안에 성령이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곧 성령입니다(롬 8:9, 11). 그러나 그의 인성(Humanity)으로 인하여 사역을 위한 기름부음이 필요하였던 것입니다. 구약시대에 왕과 제사장, 선지자들에게 기름을 부어 세웠듯이 말입니다. ‘즉 사역을 위한 성령의 기름 부으심’ 이었습니다.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사 61:1) 라고 예언한 말씀처럼 말입니다. 그의 인성에 부어주신 성령은 하나님 말씀을 전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없이 주심이니라”(요 3:34)고 하셨듯이 말입니다. 이 성령의 힘으로 마귀들을 쫓아 내시며(마 12:28), 이적과 기사를 행하십니다(행 2:22). 여느 사람들처럼 예수님께서도 피곤해 하셨고, 배 고프셨고, 주무시기도 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의 능력이 필요하였던 것입니다.

셋째로,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직접 확인입니다.
“하늘로서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22절하)고 하였습니다. 제 2위의 아들께서 자신의 세례는 모든 의를 이루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셨고, 이어 제 3위의 성령이 그 위에 임하심으로 그의 메시아적 왕, 제사장, 선지자 임을 인정하였고, 이제 마지막으로 제 1위의 하나님 아버지께서 직접 예수님을 인정하시는(confirm) 음성을 들려 주십니다. 지금 자신을 죄인들과 동일시하며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 성령께서 임하시는 예수님을 향하여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고 하십니다. 구약에서 아무리 흠 없고 순전한 제물을 찾는다 하여도 그 제물이 하나님께서 정말 기뻐하시는 온전한 것으로 죄를 완전히 사할 수가 있겠습니까? 상징적인 희생제물이었을 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자신을 드림은 완전했던 것입니다.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벧전 1:19)고 하였듯이, 예수님이 우리를 위한 온전한 제물이 됨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아버지께서 ‘내가 기뻐하노라’고 오늘 말씀하신 것입니다.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할 때에도 아주 깊고 친밀한 관계를 뜻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표현합니다. 이 단어는 모든 성도들을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나타내기도 하였습니다(롬 1:7; 엡 1:4).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제 하나님의 자녀로 아버지께서 기뻐하실 수 있는 자녀들이 되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조금도 부족함이 없음을 발견하였습니다. 모든 의를 이루기 위하여 죄인들과 동일시 하면서 세례 요한에게 물 세례를 받기까지 순종하실 뿐 아니라, 나중에 십자가의 죽음까지도 순종하여 본을 보이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를 보면서 기뻐한다고 하였습니다.
한편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그를 믿고 의지하는 성도들을 보실 때에 예수 그리스도의 그 크신 은혜를 인하여 부족함이 있더라도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녀의 부족함을 보아도 기뻐하듯이 말입니다. 바울이 “한 사람의 범죄로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롬 5:17)고 하였듯이, 예수님 때문에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으며, 생명 안에서 왕자처럼 사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믿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사실 예수 그리스도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은 사복음서에 흐르는 주제입니다. 여기서 아들이라고 할 때에 아버지와 아들을 구분하기 위하여 부르는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그만큼 가깝고 닮았음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니 당연하지요.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을 참 하나님으로 경배하며 찬양하며 순종하지 않는 것은 곧 하나님을 경배하며 찬양하며 순종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 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들을 공경치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를 공경치 아니하느니라”(요 5:23)고 하였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과 예수님을 구별하여 동등하게 여기지 않으면서 그리스도인이라고 합니다. 얼마나 잘못된 신앙입니까? 그런 사람들에게 구원이 있다고 믿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가든교회 교우 여러분!
누가는 예수님의 세례 받는 장면 후에 “예수께서 가르치심을 시작하실 때에 30세쯤 되시니라 사람들의 아는대로 요셉의 아들이니 요셉의 이상은 헬리요”(23절) 하면서, 예수님의 인간적인 족보를 마지막 38절까지 기록하였습니다. 우리말 번역에 ‘요셉의 이상은 헬리요’라고 했지만, 정확한 번역은 ‘요셉은 헬리의 아들이요’라고 했어야 합니다. 즉 그의 아버지, 할아버지, 증조 할아버지, 고조 할아버지, 그 이상은 … 하다가 결국 아담까지 올라가서 그 이상은 하나님이라고 하였습니다(38절). 즉 아담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맨 처음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온 인류의 조상 아담까지 언급한 이유는 예수님이 단지 유대인의 메시아일뿐 아니라 세상 온 사람들의 메시이임을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할렐루야!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왜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셨다고 하였습니까? 모든 의를 이루기 위하여, 그 예표인 첫 대제사장 아론처럼 몸을 씻고 기름부음을 입으셨던 것입니다. 순종의 본을 보이기 위하여서였습니다. 죄가 없으시면서도 죄인들과 동일시 하며 앞으로 주를 따르는 자들을 위하여 본을 보이신 것입니다. 하물며 저와 여러분들이겠습니까? 주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세례를 받을 뿐 아니라 그의 삶을 본 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모든 의를 이루기 위하여 말씀에 순종하려고 몸부림 쳐야 하지 않겠습니까? 또한 세례는 그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상징하였습니다. 우리도 우리의 죄성을 종종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럴 때에 새 생명의 부활의 능력을 체험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또한 세례 받으시며 기도하실 때에 성령이 임하셨습니다. 만왕의 왕으로서, 대제사장으로서, 선지자로서 성령의 기름 부음을 받으시고, 가지신 인성을 성령의 권능으로 모든 것들을 이기고 감당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도 또한 내주하시는 성령의 지배를 받으며 그 권능으로 증인의 삶을, 악한 마귀와의 전쟁에서 승리하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도 성령의 능력이 필요합니다. 날마다 기도하며 성령의 능력으로 살아갈 수 있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께서 직접 하늘로서 말씀하셔서 참 아들이심을, 기뻐하시는 온전한 예수님이심을 공개하시면서 앞으로의 구속사역을 위임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인정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진정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께서 그렇게 사랑하시는 아들로서, 참 하나님으로 믿고, 섬기며, 경배하며 찬양하십니까? 그 분의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자녀임을 믿으십니까? 그 크신 은혜를 기억하고 정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자녀의 삶을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모두가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늘 동행하는 삶,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그의 자녀로서 인정 받는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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