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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태일 목사
작성일 2021-01-03 (일) 10:35
분 류 주일설교
ㆍ조회: 862    
품격을 갖추어 주님의 아름다운 덕을 드러냅시다 (벧후 1:3-7)


2021년 새해를 맞았습니다. 여전히 코로나바이러스가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백신들이 이미 나와서 우리 모두 접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만 언제가 될지 모르는 상황입니다. 작년 4월 목회칼럼에서 솔로몬 왕이 한 이야기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말을 인용하며 참고 인내하자고 하였는데, 정말 올해 중순 쯤에는 우리 모두가 백신을 맞음으로 코로나바이러스가 지나가리라고 믿습니다.
여러분은 새해를 맞이하면서 어떤 결심을 하셨습니까? 작년에 교회 표어를 ‘내용이 있는 교회에서 품격이 있는 교회’로 정하고 시작했는데, 코로나바이러스로 3월 중순부터 두달 가량 모이지 못하고, 그 후에도 주정부의 guidline 을 따라 소수의 무리들이 모여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감염될까 거리낌으로 함께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배를 드려도 후에 교제를 하지 못합니다. 교회로서의 그 사역을 정상적으로 하지 못하기에 표어를 따라 살려는 노력을 그다지 못한 것 같아서, 올해 한해 더 ‘내용이 있는 교회에서 품격이 있는 교회’ 표어를 정하고 노력하기 원합니다. 다시 한번 우리 그리스도인이 누구인가를 마음에 새기기를 원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베드로는 한 마디로 우리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보배롭고 큰 약속을 받은 자들이기에 성령님께서 하나님의 성품(덕)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셨다고 하였습니다. 당시 핍박을 피해 흩어져 있던 디아스포라 성도들에게 우선 하나님의 능력이 그들에게 주어졌다고 합니다.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자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니라”(3절)고 하였습니다.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을 체험하여 앎으로 그 영광과 덕(goodness)을 나타내기 위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관한 모든 삶에 필요한 것들이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바로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님의 역사를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신 후 약속대로 보내주신 성령님의 능력을 말합니다. 그래서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4절)라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영광과 덕을 기리기 위하여 능력을 주시는 성령님의 사역과 관련하여 주신 보배롭고 큰 약속입니다(요 14:15-17; 16:7, 행 1:4-5, 8). 우리가 정욕으로 세상의 썩어질 문화에 물들지 않고, 하나님의 성품(덕)을 나타낼 수 있도록 약속대로 성령님을 보내시고 우리 안에서 역사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죄성(sin nature)의 문화를 물리치고, 신성(divine nature)의 새 문화를 창조하게 하신 것입니다. 정욕적이지 않고, 상스럽지 않고, 세속적이지 않고, 시기와 질투하지 않고, 편가르기나, 거짓과 다툼이 없고, 오히려 화평과 관용하며 양순하고 긍휼과 선함이 가득한 모습이 드러나게 하신 것입니다. 품격을 갖추어 주님의 아름다운 덕을 드러내며 살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우애를, 형제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5-7절)고 하였습니다. 우선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세주(Savior)와 주(Lord)로 믿는 기본적인 믿음이 있다면, 거기에 걸맞게 덕을 나타내라고 합니다. 여기 ‘덕(ἀρετῇ, virtue)’은 도덕적인 탁월함, 혹은 선함(goodness)을 뜻합니다. 불신자와 달리 우리는 도덕적으로 부끄럼이 없어야 합니다. 아니 불신자들보다 훨씬 더 높은 수준의 도덕성이 있어야 합니다. 만약 믿는다는 사람들이 부도덕하게 살면 주님의 이름에 먹칠을 하며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불신자들보다 더 욕을 먹게 됩니다. 그러니 당연히 높은 수준의 도덕성을 가지고 사는 것을 나타내야 합니다. 그리고 ‘지식’이라 함은 머리로만 아는 지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지식, 즉 생활에서 실천되는 경험적인 지식을 뜻합니다. 진리의 말씀을 바로 알아 무엇이 옳고 그른지, 어떤 말과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 위로와 격려가 되는지 아니면 상처가 되는지 구별할 수 있는 지식입니다. ‘절제(self-control)’는 자신의 욕구를 통제할 수 있는 내적인 힘을 뜻합니다.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에 사로잡히지 않을 수 있는 것을 말합니다. 기꺼이 그런 것들을 버릴 수 있는 힘이 절제입니다. 다른 사람이 갖고 있는 세상적인 것에 대해 전혀 부러움이 없는 것입니다. ‘인내(perseverance)’는 자신에게 주어진 짐을 잘 지고 간다는 뜻입니다. 인생에 어려움이 닥쳤을 때 그것을 다루는 용기를 말합니다. 고난 가운데서도 잘 견디는 것입니다. 억지로 어쩔 수 없어서 견디는 것이 아닙니다. 소망이 하나님께 있기에 견디는 것입니다. 목숨조차 아깝지 않은 것입니다. ‘경건(godliness)’은 3절에서도 언급한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나타나는 태도를 뜻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기에 그 말씀에 순종합니다.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알고 믿기에 무슨 말을 하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 앞에서 합니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죄를 거절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선한 말과 행동으로 경건함을 나타냅니다. ‘형제우애(brotherly love)’는 가족 간의 사랑을 나타내는 단어입니다. 주 안에서 한 피 받아 한 몸 이룬 교우들을 친 형제, 자매로 여기며 서로의 짐을 지고 나누는 것을 말합니다. 한 식구이니 당연히 짐을 나누어 집니다. 힘들어하는 형제, 자매를 나 몰라라 하지 않습니다. 손을 내밀어 붙잡아 줍니다. 그리고 마지막의 ‘사랑(ἀγάπη)’은 여러분들이 너무 잘 아는 희생적인, 무조건적인 사랑을 뜻합니다. “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라”(레 19:18; 마 22:39) 혹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3:34)고 말씀하시며 보여주신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따지지 않습니다. 돌아오는 것이 없어도, 아무 것도 바라지 않고 거저 주는 사랑입니다. 아무리 내게 잘못을 해도 예수님처럼 용서하고 용납합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성품, 예수 그리스도의 덕이 우리의 삶에 보여지는 것이 품격을 갖추는 것입니다. 이 같은 성품들이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성령님이 계시기에 가능하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3절에서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이미 주셨다고 했고, 4절에서는 성령을 보내주신다는 약속을 하신 대로 보내주셔서 우리 안의 성령님이 그렇게 살 수 있도록 해준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대로 우리 자신을 내어드리면 됩니다. 나를 양보하면 됩니다. 그러나 내 자아를 양보하지 않고 고집을 부리면 결코 품격이 있는 성도가 되지 못합니다.
즉 하나님의 인격이 우리의 인격이 되게 하기 위해서는 이 노력을 해야 합니다. 매순간 성령님께 항복해야 합니다. 바울처럼 자신의 몸을 쳐 주님에게 복종하게 해야 합니다(고전 9:27). 바로 성령 충만입니다. 말씀과 기도로, 신앙성장을 위한 독서로, 자신보다 성숙한 믿음을 가진 분들과 자주 교제함으로 믿음의 교양을 쌓아야 합니다. 열심히 덕을 쌓으려고 하고, 말씀의 지식을 넓혀가고, 실제로 적용하고, 절제하며 인내하고, 경건하기를 힘쓰며, 형제우애와 이웃사랑에 힘써야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야 품격이 있는, 품격을 갖춘 성도가 되는 것입니다.
물론 믿음의 교양이 없다고, 품격이 없이 상스럽다고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 아닙니다. 그런데 기왕이면 말씀대로 믿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저 천국에 들어가는 것만으로 만족하면서 아무렇게나 산다면 어쩌면 그 믿음이 참 믿음인지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갓난아기가 시간이 흐르면서 자라듯이, 참 믿음이라면 자라가게 되어 있습니다. 변화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주위 사람들에게 믿고 난 후에 변했다는 이야기를 들을 수 밖에 없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각자 고유한 개성을 주신 것이 있기에 변하지 않는 성격이 있을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는 성격이라면, 주님의 이름에 먹칠을 하는 성격이라면 반드시 고쳐져야 합니다. 우리 자신을 내려놓으면 성령님께서 고치십니다. 그래야 복음이 이 어두운 세상에 빛을 발하기 때문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또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함이니라”(벧전 2:9)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누구인지를 정확하게 알고, 깨닫고, 여기고 산다면 예수님의 아름다운 덕, 즉 선함, 고상함을 드러내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선택 받은 자들이며, 하나님과 세상 사람들의 중보자들, 제사장들이며, 구별된 거룩한 나라 백성들이요, 하나님의 소유로서 주님을 알기 전에 어두움에 있다가 그 크신 은혜로 빛의 자녀들이 되게 하신 주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입으로만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삶에 그 아름다운 예수님의 인격이 드러내야 합니다. 품격을 갖춘 자로서 주님의 덕을 드러내야 합니다.
우리 주위에 별로 많지는 않아도 어떤 교회는, 어떤 교인은 품격이 있어서, 덕이 있어서 주위 사람들에게 칭찬을 듣지 않습니까? 주님을 몰랐던 자들도 교회로 인도가 되지 않습니까? 매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이 예수님께로 인도되는 이유는 예수님에게 매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가까이 하고 싶은 인격이 있기 때문입니다. 비로 품격이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덕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가든교회 교우 여러분!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의 죽음으로 우리를 창조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시고 새 사람으로 만드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셨습니다. 그 결과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치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딛 2:12) 하였습니다. 처음 구원 받은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곧바로 천국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양육(교육)을 받는 것입니다. 훈련을 받는 것입니다. 마치 자녀를 낳아 기르면서 교육시키는 아버지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경건치 않은 것을 버리게 하십니다. 세상 정욕을 버리게 하십니다. 근신함, 의로움, 경건함으로 살게 하십니다. 근신함(live sensibly), 곧 자신을 절제하며 하나님의 뜻에 민감하게 살게 하십니다. 의로움(righteously)은 이웃과의 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의를 추구하는, 존경 받을만한 모든 말과 행동을 뜻하며, 경건함(godly)은 거룩하신 하나님과 가까운 데서, 친밀한 교제 속에서 나타나는 모습입니다.
그러니 사실 모든 믿는 자들은 품격을 갖추어 자신을 절제하며 하나님의 뜻에 따르며 하나님의 의를 추구해야 합니다. 주위 사람들에게 존경 받을만한 말과 행동으로 경건한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물론 정도 차이가 있겠지요. 성숙도의 차이가 있듯이 말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라면 누구나 품격이 있는, 품위가 있는 성도가 되려고 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주님의 아름다운 덕을 드러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새해가 되었으면 하나님 앞에서 무언가 다른 모습으로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자녀라면 아버지를 기쁘게 하기 원하는 아름답고 고상한 마음에서 나오는 덕스러운 말과 행실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주님과 함께 한 시간이 길어질수록, 신앙생활을 오래할수록 더욱 성숙해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달라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유명한 아인슈타인은 ‘어제와 똑같이 살면서 다른 내일을 기대하는 것은 정신병의 초기 증세이다’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지난 해와 똑같이 살면서 보다 나은 내일을 기대하는 정신병자가 되지 않기 원합니다. 자녀들이 이전과 달라진 성숙한 모습을 보면 기뻐하며 자랑스럽듯이, 우리가 점점 성숙해가면  하나님 아버지께서도 기뻐하며 흐뭇해하시고 더욱 풍성한 은사를 주실 줄 믿습니다.
다시 한번 묻습니다. 새해를 맞아 여러분은 무슨 결심을 했나요? 지혜로운 사람은 아무 의미 없이 그냥 새해를 맞지 않습니다. 과거를 돌아보며 반성할 것들을, 고칠 것들을 과감하게 고치고, 버릴 것들을 과감하게 버리고 미래를 위해 무언가 결단하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새해를 맞았으면 개인적으로 보다 나은 미래를 위하여 새롭게 해야 할 일들을 시작합니다.
그런데 여러분의 목사로서 교회적으로 새해의 소원을 말씀 드렸습니다. 우리 모두 품격을 갖춘 교인들이 되어서 우리 교회가 격이 있는 교회로 이 지역사회에 주님의 빛과 아름다운 덕을 나타내기를 축원합니다. 그래서 작년 초에도 말씀 드렸듯이 힘들고 지친 교포들이나 이곳 저곳에서 상처를 받은 심령들이 우리 교회에 와서는 우리 모두에게 감동을 받게 되었으면 합니다. 말로만 믿음이 있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 내용이 있고, 고상하고 품위 있는 교회임을 깨닫고 자신도 우리 교회에 속하여 품격이 있는 사람으로 주님의 아름다운 덕을 나타내기 원하는 분들이 많기를 축원합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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