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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태일 목사
작성일 2024-03-31 (일) 02:27
분 류 절기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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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조회: 130    
부활의 능력을 믿는다면 (요 20:1-18)



[부활절]
아마도 사람들에게 가장 두려운 것이 죽음일 것입니다. 아무리 문명이 발달하고, 의료기술이 뛰어나다 하더라도 사람이 죽음을 이기지는 못합니다. 돈이 아무리 많아도 암과 같은 중병에 걸리거나 큰 교통사고를 당하면 모든 것을 내려놓고 살기 위하여 몸부림을 쳐야 합니다. 그래도 사람은 언젠가 죽습니다.
만약 누군가가 우리를 죽지 않게 해 줄 수 있다면, 아니 죽음을 이길 수 있게 해 줄 수 있다면 이것 이상 기쁜 소식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신 예수님께서 인간의 죽음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셔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게 하셨습니다(고전 15:23).

오늘 2024년 부활절을 맞아 우리는 다시 한번 부활의 의미를 정확하게 알고, 부활의 능력을 믿는 믿음으로 살기를 원합니다. 부활하려면 한번 완전히 죽어야 합니다. 완전히 죽은 상태에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에도 엘리사로 말미암아 수넴 여인의 아들이 죽었다가 살아난 적이 있었고, 신약 시대에도 나사로가 죽었다가 살아났습니다. 하지만 그들도 다 다시 죽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그런 살아남이 아니라, 전혀 다른 새로운 몸으로 다시 사는 것입니다. 이 새로운 몸은 늙지도 않고, 병들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 몸으로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지 않습니다. 그래서 영원히 죽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런 몸으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즉 우리 인간들이 과학적으로 연구를 해서 어떻게 늙어가는 것을 천천히 하거나, 죽음을 연장하는 정도가 아닙니다. 우리를 완전히 새로운 생명체로, 영원히 살 수 있는 몸으로 부활하도록 길을 열어놓으신 것입니다. 이러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예수님이십니다. 이 진리가 너무나 놀라와 주님의 제자들은 다 목숨을 걸고 부활을 전하다가 순교까지 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었던 상태에서 다시 살아나는 장면을 영화처럼 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단지 사람들이 본 것은 죽어 장사 지냈던 예수님의 무덤이 열려 있었고, 무덤 속에 있던 예수님의 시신이 없어진 것을 본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가장 먼저 본 사람이 나사로의 누이였던 막달라 마리아였습니다(1-2절). 이 막달라 마리아는 당시 가장 천한 여자였다가 거룩한 여자로 변화 받은 사람입니다. 원래 창녀로서 일곱 귀신이 들렸던 여자였습니다. 예수님이 그녀를 만나고 난 다음 그녀의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이것만 해도 그녀에게는 엄청난 은혜였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자기의 귀한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고 머리털로 그 발을 씻는 일을 하게 된 것입니다(요 12:1-11). 은혜라는 것이 그래서 참 중요합니다. 주님께서 귀신들렸던 창녀에게 은혜를 부어 주시니 성경에도 기록이 되며, 기독교 역사에 길이 남는 거룩한 여인이 됩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나타난 것처럼 부활의 첫 증인이 됩니다. 주님께서 돌아가신 후 막달라 마리아가 향품을 가지고 안식일 첫날, 즉 주일 아침에 무덤에 찾아왔을 때 주님의 시신이 없어진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와 예수의 사랑하시던 제자, 요한을 찾아가 말했습니다. 그러자 두 제자가 무덤을 찾아와 확인했습니다(3-7절). 요한이 베드로보다 젊기에 더 빨리 달려왔지만 무덤 안에는 들어가지 않고 조심하며 긴가 민가 하며 밖에서 안을 보는데, 베드로는 뒤에 조금 늦게 도착했지만 성격이 급한대로 무덤 안으로 뛰어 들어와 정말 예수님 시신이 없는지 확인했습니다. 그런데 틀림없이 주님의 시신이 없어졌습니다. 특이한 것은 시신을 쌌던 수건이나 세마포가 그대로 있었다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누군가가 시신을 훔쳐 갔다면 시신을 싼 수건이나 세마포를 벗기고 시신만 달랑 들고 갈리는 없었을 것입니다. 만약에 시신만 훔쳐 가져갔다 하더라도 세마포를 잘 개켜놓고 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즉 시신이 누워있는 상태에서 몸만 빠져나간 것 같은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요한도 베드로를 뒤따라 무덤에 들어가 보고서야 예수님의 시신이 없어졌다는 말을 믿었습니다(8절).
부활 기사를 기록한 마태복음을 보면 로마 군인들이 그 동안 들은 소문이 있어서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지 못하도록 무덤 문을 인봉하고 무덤을 24시간 지켰다고 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지진이 일어나면서 무덤의 인봉이 찢어지고 돌 문이 굴려 버렸기 때문에 무덤을 지키던 군인들이 모두 사색이 되어 놀라 도망을 치고 말았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지요. 예수님의 무덤이 더 이상 닫혀 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안을 들어야 볼 수 있었습니다.
본문 9절에서는 막달라 마리아와 두 제자가 아직 성경에서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한 말씀을 아직 알지 못했다고 합니다. 기억하지 못했다는 말씀입니다.

이상한 것은 막달라 마리아와 달리 두 제자가 예수님의 시신이 사라졌음에도 그냥 집으로 돌아간 것입니다(10절). 왜 두 제자는 사람들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그냥 집으로 가버렸을까요? 아마도 대제사장이나 그 종들이 두려웠던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만약 자신들이 예수님의 시신을 찾는다고 돌아다니다가 그들에게 걸리면 붙잡힐 것이 뻔했기에, 그리고 의아하게 생각되었지만 그들의 마음 속에는 우리가 돌아가신 주님의 시신을 다시 찾아서 무엇을 하겠느냐는 절망감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문제는 주님께서 생전에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하신 말씀을 생각하지 못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 은혜의 통로로 각자에게 와닿는 차이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모르면, 혹은 잊고 있으면 예수님의 무덤이 비어 있어도 놀라고, 그 시신을 쌌던 세마포가 개켜 있어도 놀라고, 수건이 따로 놓여 있어도 놀랄 뿐입니다. 무서워서 도망칠 뿐입니다.
그런데 두 제자와 약간 달리 막달라 마리아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비록 그녀도 말씀은 잊고 있었으나 주님의 사랑과 은혜를 기억하면서 너무 사모한 주님이기에 집으로 가지 않고 계속 무덤가에서 울면서 주님을 찾고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주님의 시신이 없어졌는데 그냥 집으로 돌아가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그의 시신을 찾아야 하겠다는 열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리아처럼 이렇게 말씀을 기억하지 못한다면 주님에 대한 열정이라도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녀의 마음을 읽은 주님께서는 두 천사를 보내셔서 부활의 소식을 알리고 그녀를 만나 주십니다(11절 이하). 천사는 그녀에게 왜 우느냐고 물어보았습니다(13절). 마리아는 이 천사가 누군지도 모르고, 그저 시신이 없어졌기에 사람들이 주님의 시신을 어디로 옮겼는지 몰라서 운다고 합니다. 사실은 그녀도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었는데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고, 또한 죽은 것만 해도 너무 불쌍한데 그 시신까지 다른 데로 옮겨 가버린 줄 알고 너무나도 안타깝고 불쌍해서 우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 이미 부활하신 주님은 그녀 뒤에 계셨습니다(14-15절).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그녀가 자기를 만나지 않으면 울음을 그치지 않을 것 같아서 만나 주셨습니다. 처음에는 동산지기인 줄 알고 당신이 시체를 치웠냐고 물어보았습니다. 자기에게 알려주면 그 시신을 가져가겠다는 것입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마리아야’ 하면서 그녀의 이름을 불러 주셨습니다(16절). 이 때에는 마리아가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처음으로 알아보았던 것입니다. 그 음성이 그녀에게 익숙한 음성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마리아가 ‘랍오니여’ 라고 했는데 이는 ‘선생님’을 뜻하는 히브리말이었습니다.

여러분! 우리 주님은 결코 우리로부터 멀리 떨어져 계신 분이 아니십니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 가장 가까운 곳에서 우리를 보고 계시며 우리를 지키고 계신 분이십니다. 확실히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까운 곳에서 우리를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물론 그 음성에 익숙하지 않으면 주님을 알아볼 수가 없습니다. 자주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사실 마리아는 두 제자와 달리 끝까지 주님을 찾았기에 결국 살아계신 주님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렘 29:13)! 우리 예수님께서는 누가 자신을 사랑하는지, 그렇게 사모하고 찾는지를 아십니다. 그리고 자신을 사랑하는 자를 하나님도 사랑하시고, 자신을 미워하는 자는 하나님도 멸시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4:21). 마리아처럼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찾으면 만나 주십니다. 할렐루야!

막달라 마리아를 만나 주신 부활의 주님은 그녀에게 몇 가지 말씀을 하셨습니다(17절). 우선 자신을 만지지 말라고 하십니다. 아마도 그녀가 예수님을 도망가지 못하게 꽉 붙잡으려고 하기에 만지지 말라고 하신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는 자신이 있을 곳이 이 세상이 아니고 이제 곧 승천하여 하나님 보좌 우편이며 거기서 온 세상을 다스려야 한다는 뜻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아니면 마리아에게 ‘너는 나를 독차지하고 빼앗기지 않으려고 꽉 잡으려고 하는데 나를 놓친다는 걱정은 이제 하지 않아도 된다. 나는 언제나 너와 함께 있을 것이다’라는 뜻으로 생각됩니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은 완전히 새로운 몸으로 더 이상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지 않게 되었으며, 이 세상에 계시는 시간도 제한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앞으로는 성령이 임하시고 성령께서 우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인도하시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막달라 마리아도 예수님을 생각하는 관점이 달라져야 합니다. 주님을 놓아드리고 보내주실 성령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제자들에게 가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다고 전하라 하십니다.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17절)라고 전하라 하십니다. 곧 하나님 아버지는 예수님의 아버지이시면서도 우리들의 하나님 아버지이시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가든교회 교우 여러분!
사실 오늘 우리가 드리는 예배도 부활하신 예수님의 임재 가운데 드리는 것입니다. 예배는 2000여 년 전의 예수님을 추억하는 모임이 아니라, 바로 이 자리에 예수님이 계시다는 것을 경험하고, 그 부활의 능력이 우리 안에서 역사한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 믿음이며, 참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부활하심은 성령의 능력이었습니다. 바울은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롬 1:4)고 한 것처럼, 성결의 영, 즉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죽음은 이미 정복되었습니다. 이제 더 이상 죽지 않으려고 몸부림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의 삶은 죽음을 통해 영원히 이어지게 됩니다. 비록 지금은 흙으로 돌아갈 육체를 입고 있지만, 죽음이 찾아오지만 이것은 다만 육신을 벗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눈과 눈을 맞대고 보게 될 것이며 더 찬란한 영광 가운데서 하나님을 예배할 것입니다. 훗날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처럼 부활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완성되면, 우리 주님께서 재림하시면 그 때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과 똑 같은 새로운 몸으로 부활하게 될 것입니다. 그 때에는 늙지 않습니다. 아프거나 병들지 않습니다. 다시 죽지도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루 하루를 죽는 순간만 기다리면서 사는 것은 너무 소극적인, 은혜스럽지 못한 인생입니다. 오히려 우리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을 믿는다면 보다 적극적으로 인생을 살 필요가 있습니다. 늘 부활의 주님을 찾으며, 만나며 그 능력을 체험하기를 원합니다. 부활의 소망과 능력으로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고통의 시간을 지난다 해도 좌절하지 않고 소망 가운데 살기 바랍니다. 그렇지 않고 부활의 능력을 믿지 못하면 주위 환경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입으로 믿는다고 하면서도 날마다 낙심하고, 후회하고, 두려워 합니다. 그렇다면 불신앙의 삶과 다를 바가 무엇입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영육간에 괴로움이 있습니까? 세상에서 억울한 일을 당하고 계십니까? 살기가 너무 힘들어 죽고 싶습니까? 어깨에 있는 짐이 너무 무겁습니까? 죽음을 이기시고 살아나신 예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심령 가운데 부활의 능력이 임하기를 바랍니다. 살아계신 주님께서 함께 하십니다. 언젠가는 모든 문제가 나에게서 떠날 것입니다. 영광의 그 날을 사모하십시오. 심지어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는 슬픈 일을 만나도 너무 오래 슬퍼하지 마십시오. 부활을 믿는 자는 잠시만 슬퍼하고 다시 주님을 찾으며, 바라보며 주님께서 주시는 평강과 기쁨을 누리는 것입니다.
더욱이 주의 일을 감당하는 성도님들은 세상이 주는 어떤 어려움 때문에 넘어져서는 마십시오. 오히려 그 어려움 때문에 주님의 일을 더욱 크게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더욱더 확실하게 승리할 수 있습니다. 부활의 능력을 믿는 믿음이 역사하면 말입니다. 바로 이 믿음을 가리키며 성경은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히 10:38)고 하셨습니다. 부활의 능력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성도의 자세가 이런 것입니다. 이런 믿음으로 사망 권세를 이긴 주님과 함께 항상 앞을 향해 전진함으로써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능력의 사람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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