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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태일 목사
작성일 2022-02-17 (목) 07:12
분 류 수요설교
ㆍ조회: 611    
부자들에 대한 경고 (약 5:1-6)
해방신학(Liberation Theology)이라는 말 들어 보셨나요? 1968년 가난한 남미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남미 인구의 90% 가까이 천주교 신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남미의 부는 소수의 사람들이 다 갖고 있었습니다. 그들도 대부분 천주교 신자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부자들이 베풀 줄을, 나눌 줄을 모르고 오히려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했던 것입니다. 빈부의 격차가 너무 심한 나라에 사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공의에 대해 불신하기 시작하면서, ‘복음(good news)이라면 가난한 자들의 가난을 해결해주어야 한다, 가난으로부터의 해방이 없는 복음은 복음이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시작한 신학입니다. 맞는 말 같은데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복음이 가난에서 해방되어 잘 살게 하는 것이 그 핵심이 아닙니다. 사실 그런 주장과 비슷한 번영신학(Prosperity Theology)도 남미에서 출발했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잘 살게 된다. 부자가 된다는 신학입니다.
이런 신학들이 성경적이지는 않지만, 우리 개혁주의 신앙으로 사는 사람들에게 무엇인가 교훈하는 바는 있습니다. 바로 오늘 본문에서 깨우쳐 주고 있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4장 13-17절에서 세상적으로 이기적인 마음을 가지고 돈을 벌려고 하는 사람들을 책망하였습니다. 장사를 하더라도, 돈을 버는 목적으로 일을 하더라도 이기적인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을 사랑하거나 하나님 나라를 위한 목적으로 하라고 하였습니다. 세상 것에 대한 욕망을 버리고, 교만히 허탄한 자랑을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악한 부자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믿지 않는 부자들 같습니다. “들으라 부한 자들아 너희에게 임할 고생을 인하여 울고 통곡하라”(1절)고 하였습니다. 문맥상 여기 부한 자들은 정당하지 못한 방법으로 부자가 된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더러운 이익을 취한 자들입니다(딤전 3:8). 그리고 자기 자신들만 위하여 재물을 사용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고생(talaipwri,a, misery)이, 비참함이, 불행이 임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그래서 울고 통곡하게 된다고 합니다. 너무 힘들고 고통스러워서 말입니다. 이 사실을 지금 고통 당하는 가난한 성도들이 알게 되기를 바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부를 부러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심판의 시간이 될 때까지 잘 참고 인내하라는 말씀입니다.
“너희 재물은 썩었고 너희 옷은 좀먹었으며 너희 금과 은은 녹이 슬었으니 이 녹이 너희에게 증거가 되며 불같이 너희 살을 먹으리라 너희가 말세에 재물을 쌓았도다”(2-3절) 라고 합니다. 재물이 썩고, 값비싼 옷이 좀을 먹는다는 말씀은 재물과 옷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가지고 있기만 했지 사용하지 않아서 하나님 앞에 섰을 때 다 썩는다는 말입니다. 썩지 않을 금, 은으로 만든 귀금속은 녹이 슬었다고 합니다. 부식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런 것들은 그들의 탐욕과 이웃에 대한 무관심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 마치 집에 불이 나서 재물을 구하려 하다가 살이 타버리게 되듯이 불행이 임하는 것입니다. 말세 곧 예수님의 재림의 때 혹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죽음을 생각하지 못하고, 쌓아 놓기만 한 것입니다. 예수님도 이 세상에 재물을 쌓아 놓는 것을 경고하였습니다.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녹)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마 6:19)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어떠합니까? 사용하지 않는 재물이나 옷이나 귀금속이 얼마나 많습니까? 죽을 때까지 갖고 있다가, 그것들을 물려 받는 자녀들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자녀들에게는 좋은 신앙을 물려주는 것이, 올바른 사고방식, 기독교 세계관을 심어주는 것이 훨씬 보람되는 것입니다. 자녀들에게 참된 복이 되는 것입니다. 재물과 시간과 건강을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다른 사람을 위하여 사용하십시오. 주님 기뻐하시며, 칭찬하실 것입니다.

이어서 야고보는 악한 부자들의 죄를 고발하고 있습니다. “보라 너희 밭에 추수한 품군에게 주지 아니한 삯이 소리 지르며 추수한 자의 우는 소리가 만군의 주의 귀에 들렸느니라”(4절)고 하였습니다. 부자들이 품꾼들의 삯을 제대로 지불하지 않은 것입니다. 부유한 농부들이 자신들의 밭에서 일하는 일꾼들에게 임금을 지불하지 않은 것입니다. 품꾼들은 하루 벌어 하루를 먹고 살았습니다. 그들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매일 품삯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부자가 품꾼들이 추수가 끝날 때까지 떠나는 것을 막기 위하여 그들의 품삯을 미루어 두었던 것입니다. 아니 추수하고 나서도 제대로 주지를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4절에서 삯이 소리지르며 운다고 표현했습니다. 그들이 판사를 찾아가서 탄원을 하여도 부패한 판사들이 부자들 편이라 들어주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의 우는 소리를 만군의 주님께서 듣고 부자들을 심판하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언어로 말하면 부자 고용주들이 고용인들에게 임금을 제대로 주지 않고 자신들의 이익만 많이 챙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믿는 자가 고용주라면 그렇게 하면 안되겠지요. 오히려 할 수 있는 대로 줄 것을 먼저 주어야 합니다. 그것도 넉넉하게 잘해 주어야 합니다. 우리나라 기업은 어떠합니까? ‘기업은 죽어도 기업가는 산다’ 라는 말 들어 보셨나요? 그렇지 않은 회사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회사가 망해도 사장은 이미 돈을 다 빼돌려서 괜찮지만, 직원들은 망하는 것을 빗대어 말하는 것입니다. 기업가가 직원들과 함께 살고, 함께 죽는다는 정신이 아닌 것입니다. 사회를 위하여, 사람들을 위하여 봉사한다는 정신으로 사업을 하지 않고, 그저 이기적으로 자신들의 욕심을 채우기 위하여서 하기 때문에 그런 말이 나오는 것입니다.

“너희가 땅에서 사치하고 연락하여 도살의 날에 너희 마음을 살지게 하였도다”(5절) 라고 합니다. 이 표현은 악한 부자들을 소나 돼지 같은 짐승에 빗대어 말씀하는 것입니다. 소나 돼지는 평소에 실컷 먹고 놀게 합니다. 살찌게 합니다. 그래야 도살할 때에 값을 많이 받지 않습니까? 짐승들은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도 모르는 채 이것 저것 먹고 즐기기만 합니다. 그런 것처럼 부자들이 재물을 가지고 땅에서 사치하고 연락하며 지내다가 죽음의 날, 심판의 날을 맞이하기 되는 것입니다. 그 날이 다가옴을 모르고 자신들의 욕심만 채우고 있는 것입니다. 죄를 지으며 희희낙락하는 것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그렇게 살지 못합니다. 우리에게도 그 날이 다가오기 때문에, 주님 앞에서 서게 될 날이 오고 있음을 알기에 욕심대로 사치하며 연락하지 못합니다. 그저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다른 사람을 위하여 재물을 사용하는 신실한 청지기로서 삽니다. 우리가 기업가라면, 직장 상사라면 늘 고용인들나 부하직원들의 well being 을 위하여 힘써야 합니다. 늘 섬긴다는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너희가 옳은 자를 정죄하였도다 또 죽였도다 그는 너희에게 대항하지 아니하였느니라”(6절)고 하였습니다. 악한 부자들의 마지막 고발은 옳은 자를 정죄하고 죽인 잘못을 비난합니다. 부자들은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인정사정이 없습니다. 잔인하지요. 그런 모습이 가난한 자들의 고통을 더 심하게 했습니다.  
유대인들의 전통에서 살인은 이웃의 생계수단을 빼앗는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이웃의 생계수단을 빼앗는 것은 그를 죽이는 것이며, 고용한 사람의 노동력을 착취하는 것은 그의 피를 흘리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율법의 정신을 말하는 것입니다. 십계명의 이웃사랑의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당시 가난한 사람은 자신이 당하는 불법에 대항하지 않았습니다. 대항할 수도 없었습니다. 대항하면 부자들에게 요주의 인물로 찍히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두려웠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가든교회 교우 여러분!
지금 야고보 사도가 부, 재물 자체가 문제라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얼마든지 재물이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귀하게 사용될 수 있기에 신앙이 있는 부자들에게 경고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만약에 믿는다고 하는 부자가 자기 이익만 챙기며 월급도 제대로 주지 않고 일꾼들을 부린다면 오늘 말씀을 듣고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재물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자신 앞에 기다리고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야 할 것을 생각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돌이켜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재물을 다 섬길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24)고 하였습니다. 재물도 섬기는 것을 우상숭배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유명한 영국의 Charles Dickens의 1848년의 소설 ‘크리스마스 캐롤’을 아시나요? 아마 주인공 Scrooge 라는 이름은 들어 보셨지요. 부자이지만 아주 지독한 구두쇠로 나옵니다. 자신이 죽어서 지옥의 사자가 여기 저기 데리고 다니면서 보여줍니다. 그가 죽었는데 아무도 슬퍼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주위에 그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자기 재물이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자기가 재물을 모으느라고 많은 것을 잃어버린 것이었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여 주고서는 가버립니다. 실제로 죽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새 사람으로 살아가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신앙은 머리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닙니다. 삶의 방식입니다. 태도입니다. 신앙으로 어떻게 살아가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성경을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느냐 하는 것보다 알고 있는 성경 말씀을 가지고 어떻게 사느냐에 관심이 많습니다. 우리가 사는 모습을 보고 계십니다. 가난하고 어려운 자들의 탄식과 감사의 소리를 듣고 계십니다. 가난한 자들의 애통과 억울함의 호소를 다 기억하십니다. 물론 믿음의 사람들의 도움으로 가난을 조금이라도 모면하여 먹고 입고 누울 곳이 있어서 하나님께 감사하는 기도도 들으십니다.
이 세상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재물과 시간과 건강은 잠시 잠깐 있다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사용하지 않고 썩게 둔다면 야단맞을 일입니다. 나누십시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은 우리 자신만을 위하여 사용하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나누시면 계속 부어 주십니다. 당연하지요.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데 복을 주실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뿌린대로, 심은대로 거두게 되어 있습니다(갈 6:7).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헌금하는 데에도 인색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후 9:7)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에게 사랑받기 원하십니까? 절대로 하나님 사랑이 다 똑같지 않습니다. 특별히 더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니 하나님 사랑하십니까? 예수님께서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요 14:21)고 하셨습니다.
또한, 다른 사람을 대접하는 것도 좋은 일입니다. 남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서라도 그렇게 하십시오. 우리가 돕는 의인이 바로 예수님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작은 자’ 한 사람에게 하는 것을, 예수님이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마 25:35-36)고 하였습니다. 사랑하고 섬기며 사는 삶이 복된 삶입니다. 아니 참된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모습입니다. 바로 선교적 삶입니다. 우리 모두가 그렇게 사랑하고 섬기는 은혜가 넘치기를 바랍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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