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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태일 목사
작성일 2021-08-08 (일) 05:39
분 류 주일설교
ㆍ조회: 795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눅 18:35-43)

눈이 보이지 않는다고 가정하고 한번 눈을 감고 한 5분이나 10분만 생활해 보십시오. 얼마나 답답하며 아마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을 것입니다.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그런데 육신의 눈이 아니라 영적인 눈이 어두워져 있는 사람들이 자신의 영적 상태를 깨닫지 못하고 괴로워하고 고통받는 것을 보면 정말 답답하게 느껴지는 적이, 너무나 안타깝게 여겨지는 적이 한 두 번이 아닙니다.
지난 주일에 살펴본 대로 지금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구약에서 예언되어진 유월절 어린 양으로서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서 죽으실 날이 얼마 남지 않아서 제자들에게 그 사실을 세 번씩이나 말해주어도 깨닫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그런 제자들을 향하여 실제 육신의 소경을 고쳐 주심으로, 이 사건을 통하여 그들의 영적 어두움을 지적하며 깨달음을 주시려고 베푸신 기적입니다. 또한 자신이 하나님 나라 백성들을 섬기는 자로서 눈 먼 거지들조차 사랑으로 섬기며 긍휼히 여기시는 마음을 나타내 보이시면서 제자들이 좀 깨닫기를 원하셨습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아무리 바쁘시고, 이제 큰 고난을 겪게 되시는 상황이라 하더라도 어떤 소경의 부르짖음을 민망히 여기셨습니다.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무한한 사랑으로 긍휼을 베푸셨습니다. 자신의 아픔보다 다른 사람의 아픔을 더 소중히 생각했습니다. 저는 오늘 본문의 사건에서 인상 깊게 와 닿는 사실을 살펴보며 은혜 받기를 원합니다.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의 구속 계획 안에서 이제 십자가를 지시고 돌아가실 시간이 가까워 예루살렘으로 오르시는 도중 “여리고에 가까이 오실 때에 한 소경이 길 가에 앉아 구걸하다가 무리의 지남을 듣고 이 무슨 일이냐고 물은대 저희가 나사렛 예수께서 지나신다 하니”(35-37절) 하였습니다. 동일한 사건을 기록한 마태복음 20장 29절 이하에서는 두 소경이라고 하였고, 마가복음 10장 46절 이하에서는 소경 둘 중의 한 사람의 이름을 기록하였는데 “디메오의 아들 바디메오” 라고 하였습니다. 아마 두 사람의 대변인으로서 바디메오가 주님과 대면하여 간청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사람들에게 구걸하는 중에 무리가 지나가면서 떠들썩하니까 듣고는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니 나사렛 예수께서 지나가신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소경이 외쳐 가로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앞서 가는 자들이 저를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저가 더욱 심히 소리질러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38-39절) 합니다. 예수님을 향해 메시아의 칭호인 “다윗의 자손”이라고 합니다. 당시 유대인들의 상식은 “성경에 이르기를 그리스도는 다윗의 씨로 또 다윗의 살던 촌 베들레헴에서 나오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요 7:42)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어떻게 예수님을 메시아로 알고 있는지 성경이 말해주지 않고 있어서 모릅니다만, 마태복음에서는 예수님을 “주여, 다윗의 자손이여”(마 20:30, 31)라고 부릅니다.  
그러면서 두 번씩이나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합니다. 이 소경이 얼마나 애가 타고 간절했기에, 이번에 예수님을 놓치면 이제는 가능성이 전혀 없다는 심정으로 부르짖은 것입니다. 함께 가던 무리들은 그들을 꾸짖으며 조용히 하라고 합니다. 제자들도 덩달아 꾸짖었겠지요. 아마도 그저 예수님에게 구걸하려는 줄 알고 그를 꾸짖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관치 않고 또다시 부르짖습니다. 이번에는 더욱 심히 소리를 질렀다고 하였습니다. 주께 은혜를 받는 데에 그 무리들이나 제자들이 장애가 될 수 없었습니다. 비천한 그는 부끄러움을, 체면을, 자존심을, 자아를 버린 지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예수님의 은혜, 자비가 아니면 볼 수가 없음을 인정하면서 전적으로 주님을 의지합니다. 비록 그렇게 간구하여 구원에 이를 자격은 없는 자신이라고 생각했지만, 예수님을 전능하신 메시아로 인정하였습니다. 적어도 영적으로는 눈이 조금 뜨인 자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어느 누구든지 내 자신은 부족하고 연약한 죄인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와 주로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오면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만나주시고 구원의 길로, 치유의 길로 인도해 주십니다. 무엇이 여러분을 주님께서 나아가지 못하게,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지 못하게 막고 있습니까? 체면입니까? 자존심입니까? 자아입니까? 외적인 모습, 환경입니까? 넘어서야 합니다. 아마 간절함이, 애절함이 없어서 아닐까요? 그것을 넘어서야 합니다. 다 내려놓아야 합니다. 사탄은 그런 것을 사용하여 가로막고 있습니다.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며 와서 내게 기도하면 내가 너희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렘 29:12-13)고 하였습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의 간절한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명하여 데려오라 하셨더니 저가 가까이 오매 물어 가라사대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가로되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40-41절) 하였습니다. 물론 처음 그가 부르짖었을 때에 분명히 들으셨음에도 불구하고 아무 반응을 하지 않으신 예수님이었습니다. 아마도 그의 두 번째로 더욱 심히 소리질러 부르짖는 것을 기다리신 것 같기도 합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두번째로 부르짖었을 때에야 머물러 그를 불러 묻습니다. 이미 알고 계시면서도 무엇을 원하느냐고 말입니다.
그가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하니, 마태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그를 “민망히 여기셨다”고 하였습니다(마 20:34절상). ‘민망히 여긴다’(splagcni,zomai, have compassion)라는 원어의 뜻은 ‘내장이 뒤틀리다’라는 의미로 우리 나라 사람들이 흔히 사용하는 ‘간’에 해당하는 말입니다. 정말 온 열정으로 인한 안타까운 마음을 표현한 것입니다. 온 세상 우주만물의 창조주이신 주님께서 무한하신 사랑과 긍휼로 그를 민망히 여기시고 그의 눈을 고쳐 주십니다.
마태복음에 의하면 그 사랑으로 저의 눈을 만지시니(마 20:34) 하나님이신 그 분의 초자연적인 능력이 그에게 임하여 육신의 눈이 보이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저에게 이르시되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42절)고 하십니다. 그는 한번도 육신의 눈으로 보지도 못한 예수님을 믿고 신뢰하였습니다. 주님을 만났을 때에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결국 놀라운 복을 받았습니다. 평생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 아름다운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보지 못하고 살았는데 이제 보게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사랑하는 여러분!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태어날 때부터 영적 소경으로 태어납니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요 1:9-11) 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성육신 하여 사역할 당시에도 많은 백성들이 영적 소경이었으며, 지금도 많은 사람들은 영적 소경으로 삽니다. 이유는 하나님의 진리를 보기 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그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요 3:19-20) 말씀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자신들의 죄악된 삶이 낱낱이 드러나게 됨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마치 바이러스를, 병균을 갖고 있으면서도 없는 것인 양 숨기고 사는 것입니다. 알게 되면 더 고통스럽다는 말입니다.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병을 발견하고 의사를 만나 수술하고 고침을 받아야 마땅한데 말입니다.
산상수훈 설교에서 예수님은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하겠느뇨”(마 6:22-23) 하셨습니다. 사탄은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고후 4:4)고 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어두움 가운데 살고 있는 것입니다. 마음이 강팍해질대로 강팍해져서 육신의 눈이 있어 보는 것 같은데 실제로는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하고 살며, 귀가 있어 듣는 것 같은데 실제로 듣지 못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사도 바울은 유대인들에게 아무리 예수님이 구약에서 예언되어진 메시아임을 설명하고 가르쳐도 믿지 않음을, “그러나 저희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 라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오히려 벗어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고후 3:14)고 표현하였습니다. 여기 수건은 영적으로 가린 그 무엇을 뜻합니다. 사실 오늘 본문 배경 속의 영적 소경의 극치는 예수님께서 소경된 인도자라고 꾸짖으신 위선적이고, 믿지 못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마 23:16).

사랑하는 가든교회 교우 여러분!
오늘 본문의 소경이 영적으로도 그 눈이 확실히 밝아져서 구원에 이르렀음을 증명하는 것이 마지막 구절 “곧 보게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를 좇으니 백성이 다 이를 보고 하나님을 찬양하니라”(43절)는 말씀입니다. 많은 무리가 예수를 쫓았어도 모두가 다 제자들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바디메오가 눈을 뜬 후에 영적인 눈도 더욱 완전히 밝아진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님을 따라갑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주님에게 큰 은혜를, 복을 받았으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주님을 따라가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그런 은혜를 받고도, 신령한 복을 받고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고 주님을 따라가지 않는 자들도 있습니다. 받은 은혜와 복이 진짜인지 의심스러운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 중에 아직도 영적인 눈이 어두우신 분이 계십니까? 영적 소경이 아니십니까? 육신의 눈은 보여도, 실제로 볼 것을 보지 못하는 소경이 아닙니까? 아무 목적도 없이 표류하는 인생을 살지는 않습니까? 인생의 많은 문제들로 마음이 괴롭고 불안하고 고통스럽지 않습니까? 전혀 해결책이 보이지 않아서 힘들지 않습니까? 살아가면서 약간의 재미나 풍요로운 물질로 조금 편안한 생활을 하고 있는지 모르지만 참 기쁨과 평안이 있습니까? 여러 가지 잘못된 생각이나 말, 행동 때문에 죄책감 속에 양심이 찔리지는 않습니까? 그냥 그렇게 대충 살다가 인생을 마치고, 죽음을 맞이하시겠습니까? 영안이 떠지기를 축원합니다. 부르짖으셔야 합니다.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주께 소리쳐야 합니다. 사랑의 주님께서 민망히 여기시고 고쳐 주실 줄 믿습니다.
그리하여 영적으로 눈이 뜨이면, 무슨 일이 일어납니까? 1) 하나님을 봅니다. 영적인 눈으로 주님을 바라보게 됩니다. 성경 66권의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이 누구인지, 어떤 분인지를 알아가게 됩니다. 나를 창조하신 분, 전능하시고, 전지하신 분, 어디나 계시며, 영원하신 하나님! 사랑과 자비와 긍휼이 풍성하신 분임을 알게 됩니다. 2) 자신을 봅니다. 내가 죄인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주여 내가 죄인이로소이다’ 라는 고백을 하게 됩니다. 마음을 찢는 회개가 일어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정말 죄인임을 깨닫고 십자가 앞에 모든 죄를 내려 놓습니다. 그 보혈의 공로를 의지하고 구원에 이르게 됩니다. 3) 다른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그들도 다 같은 죄인임을 깨닫고, 그렇게 바라보게 됩니다. 자신의 모든 죄가 사하여 졌음을 감사하며, 그들의 죄도 용서하게 됩니다. 큰 사랑과 자비와 긍휼을 맛보았기에 그 사랑과 자비와 긍휼을 베풀게 됩니다. 섬기며 살게 됩니다. 그리고 4) 주님을 따라가게 됩니다. 바디메오처럼 주님을 따릅니다. 주님 만을 의지하며 살아갑니다. 인생을 새롭게 봅니다. 일시적이고 무가치한 것에 매달리지 않고 영원하고 가치 있는 것에 목적을 두고 살아갑니다. 즉 사명을 받습니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마 4:19)고 하셨습니다. 나 자신을 부인하며 어찌하든지 잃어버린 영혼들을 주께 인도하려고 합니다. 이웃을 섬기며 영혼을 사랑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 합니다.

이미 영안이 열려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가시는 여러분!
혹시 눈에 무엇이 가리워져 이전 같이 잘 보이지 않지는 않습니까? 당시 유대인들처럼 눈에 수건을 덮어쓰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아니면 지금은 안 보이지만 옛날에 눈이 좋았던 시절을 먹고 삽니까? 그래서 지금 침침하고 가물거려서 잘 보지 못하고 살면서도 답답함을 느끼지 못하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안경을 쓰던가 수술을 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고쳐 주셔야 합니다. 영안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말씀과 기도 생활을 돌이켜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의 영안이 더욱 밝아지도록, 그들의 영혼이 하늘을 향하여 날아오를 수 있는 두 날개를 주셨는데, 그것이 바로 말씀과 기도입니다. 육신의 눈을 좋게 유지하려면 비타민 A를 많이 섭취하라고 하는데, 이 두 가지야 말로 우리의 영적인 눈을, 우리의 삶을 경건하게 하는 원동력, 영적 비타민 A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한 깊은 깨달음과 그 말씀을 붙들고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 간절한 부르짖음이 이 세상의 어두움을 물리치며 우리 안에 계신 빛을 더욱 빛나게 합니다. 주께서 허락해 주셔야 하는 은혜, 베푸셔야 하는 긍휼이기 때문입니다. 이미 18장 1-8절에서 억울한 과부의 원한을 풀어주는 불의한 재판관 비유에서 낙심하지 않고 끈기있게 부르짖으면 응답을 받는다는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그 본분인 하나님의 말씀을 상고하고 기도하는 일을 게을리하다 보면 하나님의 은혜가 마르는, 영적으로 침체된 상태로 전락하고 맙니다. 어느 바이올리니스트는 이런 고백을 하였습니다. ‘하루를 연습하지 않으면 바이올린이 알고, 이틀을 연습하지 않으면 내가 알고, 사흘을 연습하지 않으면 청중이 안다.’ 그렇게 평생을 바이올린만 연주하며 사는 사람도 연습의 공백이 표시 나기 마련인데, 하물며 숙련되지 않은 우리의 경건 생활의 공백이 우리 영혼에 미치는 영향은 얼마나 크겠습니까? 말씀과 기도로 다져지지 않은 모든 신앙생활, 활동과 섬김은 모래 위에 쌓은 집과 같이 한번 비바람을 만나면 쓰러지는 쓸모없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중요성을 알고, 내 영이 깨어 있어야 하며, 영안이 계속 밝은 상태에서 있어야 함을 늘 인식하고 내 자신을 쳐서 복종시켜야 합니다. 연습입니다.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딤전 4:7)고 하였습니다. 훈련입니다. 날마다 꾸준히 계속함으로써 우리의 몸에 배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가 매일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계속 영의 눈이 밝아져 있음으로 하나님을 보며, 하나님을 더욱 알아가며, 내 자신을 보며, 죄가 있나 살피고, 다른 사람들을 보고, 사랑하고 섬기며, 내 삶의 목적을 잊지 말고 우리 주님을 따라가기를 축원합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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