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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태일 목사
작성일 2021-08-19 (목) 05:55
분 류 수요설교
ㆍ조회: 792    
말에 실수가 없는 자 (1) (약 3:1-6)


참된 성도라면 자신에게 미성숙한 신앙인격이 있는 것을 인정하고 성숙해지려고 최선을 다하게 되어 있습니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무슨 말을 하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원합니다. 그래서 무척 노력을 합니다. 그런데 그 중 가장 힘든 것이 아마 말에 대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말을 할 때 주의를 하지 않고 부적절한 말을 하여서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건드려 상처를 주거나 불쾌감, 분노를 일으키게 하기 때문입니다.
주일 날, 어느 부부가 교회 가기 전에 심한 말다툼을 했습니다. 그래서 남편은 교회에 갈 기분이 안 난다고 골프채를 들고 나갔습니다. Rounding 을 시작하자마자 너무 세게 치는 바람에 뒷땅을 쳐서 가슴이 아파서 병원에 갔더니 갈비뼈에 금이 간 것이었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아내가 남편에게 대뜸 이렇게 말했습니다. "거 봐요. 주일에 교회 안 가고 골프장에 가니까 벌받은 거예요." 언뜻 들으면 믿음으로 하는 말 같습니다. 하지만 그 말을 듣고 회개하는 남편은 없습니다. 도리어 화를 낼 것입니다. 진짜 지혜로운 아내라면 이렇게 말합니다. "여보! 많이 아팠지요. 내가 당신 마음을 아프게 해서 이렇게 됐어요. 잘못했어요. 미안해요." 그렇게 따뜻하게 위로하면 남편도 좋은 말로 화답합니다. "당신이 무슨 잘못이요. 내가 주일에 교회에 가지 않아서 그렇지."

오늘 본문은 사도 야고보가 성령의 감동으로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말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선 하나님께서 말에 대한 책임을 묻는 심판을 하신다고 합니다. 그래서 가능하면 선생이 되지 말라고 합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 받을 줄을 알고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1절)로 말입니다. 이유는 가르치는 자는 주로 말로 가르치기 때문에 말의 통제가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선생들에게 보다 엄한 기준으로 판단하시기 때문에 더 큰 심판을 받게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가르치기 전에 우리가 가르치기에 적합한지 생각해야 합니다. 물론 아예 선생이 되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 28:19-20)고 명령하셨습니다. 우리에게 주신 지상대사명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예수님의 분부한 모든 것을 잘 가르쳐 지키게 함으로 제자를 삼아야 합니다. 다만 가르치는 일을 너무 쉽게 혹은 소홀히 여기는 사람들에게 가르칠 때 따르는 큰 책임과 의무를 지적해줌으로 그 직분의 품격을 높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가르치는 일에 합당한 영적 자질이 구비되지 못한 사람들이 성급하게 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어서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2절)고 합니다. 사도 야고보는 자신도 말의 실수가 많은 사람 가운데 하나로 포함시키고 있습니다. 그의 겸손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도’인데도 그럴 때가 있으니 더욱 실수하지 말고 조심하자는 뜻입니다. 우리의 부족함이나 죄악된 모습을 드러내지 말자는 것입니다. 여기 실수가 많다는 것은 말로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거나, 가르치는 대로 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을 잘한다고 해서 선생이나 어른이 아니고, 말한 대로 살아가는 사람이 진짜 선생이요 어른인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말을 통제한다는 것은 우리의 인격 전체가 성령의 다스림을 받는, 성령충만 함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바로 온 몸을 굴레 씌우는, 즉 3절에서 언급하고 있는 말(horse)에 재갈을 먹이는 것입니다.  
말에 실수가 없으려면 말을 적게 해야 하겠지요. “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하기 어려우나 그 입술을 제어하는 자는 지혜가 있느니라”(잠 10:19)고 하였습니다. 가만히 보면 말이 많은 사람은 속이 비어 있음을 봅니다. 그것을 덮으려고 말을 많이 하지요. 괴테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반 밖에 배우지 않은 사람은, 즉 덜 배운 사람이 말이 많고 항상 그릇됨이 많다.’ 마치 우리말 속담에 ‘빈 수레가 요란하다’는 말과 비슷합니다.
실제로 말 실수를 하여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며, 죄를 짓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아무도 이에 대하여 자유로울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말(horses)과 배(ships)를 예를 들면서 우리의 입에 굴레를 씌울 것을, 통제를 할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말을 순종케 하려고 그 입에 재갈 먹여 온 몸을 어거하며 또 배를 보라 그렇게 크고 광풍에 밀려가는 것들을 지극히 작은 키로 사공의 뜻대로 운전하나니”(3-4절)라고 하였습니다. 말(horse)은 정말 입에 굴레를 씌워야 통제가 됩니다. 그래야 말이 유순해집니다. 말을 타는 사람이 원하는 대로 말을 끌고 갈 수 있습니다. 또 아무리 큰 배라 하더라도 항해사가 쥐고 있는 키로 배는 통제가 되어야 원하는 곳으로 갈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푹풍과 사나운 바람 때문에 풍랑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며 표류할 수밖에 없습니다. 또 이어서 말은 불과 같아서 작은 불이 많은 나무를 태우듯이 우리 온 몸을 더럽히며 마치 지옥 불처럼 불사를 수 있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혀도 작은 지체로되 큰 것을 자랑하도다 보라 어떻게 작은 불이 어떻게 많은 나무를 태우는가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생의 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불에서 나느니라”(5-6절)고 하였습니다. 혀는 신체 중에서 아주 작은 한 부분이지만 엄청난 결과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그만큼 말의 능력이 대단하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 결과는 좋은 것일 수도 있고, 나쁜 것일 수도 있습니다. 낙심한 사람을 위로해줄 수도 있고, 영혼을 짓누를 수도 있습니다. 화가 나서 함부로 내어 뱉은 한마디 부정적인 말이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삶의 바퀴를 불사르듯이, 교회에나 성도들에게 엄청난 파괴력이 있음을 경고하는 것입니다. 큰 산불을 일으킬 수 있는 작은 불씨처럼 혀를 조금만 잘못 사용해도 많은 사람들에게 막대한 피해를 줄 수 있습니다. 사람의 말은 그 인격에서 나오기 때문에 결코 완전할 수는 없지만 전혀 통제되지 않는 막말은 사람들을 죽일 수 있습니다. 실제로 역사상 전쟁 중에 죽은 사람보다 말의 비수에 찔려 죽은 사람이 더 많다고 합니다. 그러한 혀는 마치 지옥불에는 나오는 것과 같다고 합니다(6절). 혀에 미치는 사탄 마귀의 영향을 묘사한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말이 통제된 말일까요? 대구동부교회 김서택 목사님은 1) 생각을 하면서 대화를 하되 대화의 목적에 맞는 정확한 표현과 2) 상대방의 마음, 정신을 읽으면서 하는 말이라고 합니다. 공감을 할 수 있지요. 그냥 아무렇게나 되는대로 말하지 않고, 한 마디 한 마디 생각 좀 하면서 말을 하면 실수가 적을텐데 말입니다. 오늘날 문제는 사람들이 생각을 하지 않고 산다는 것입니다. 책 읽는 시간은 거의 없고 TV, 인터넷 등의 영상 문화 속에 파묻혀 살기 때문에 생각하는 훈련이 되지를 않습니다. 그냥 보고 즐기는 것으로 끝나버리지요. 자기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자기 스스로도 모르고, 그래서 생각을 정리할 수도 없습니다. 다른 사람의 논리를 따라가지 못합니다. 어떤 말 뒤에 감추어져 있는 사고와 정신을 알아야 하는데 말입니다. 또 바둑이나 장기를 둘 때처럼 내가 이 말을 했을 때에 상대방이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일까 생각하며 그 표현의 방법까지 신중하게 한다면 정말 실수가 적을텐데 말입니다. 문제는 한번 내뱉은 말은 엎지른 물을 주어 담을 수 없듯이 주어 담을 수가 없다 라는 것이지요. 그릇에 담긴 물이 엎질러질까 조심하듯이 주의하여 말하면 통제된 말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늘 사람들의 비위를 맞춰주며 아첨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이웃에게 아첨하는 것은 그의 발 앞에 그물을 치는 것이니라”(잠 29:5)고 하였습니다. 즉 아첨하는 말이 그 사람을 그물에 빠뜨리게 하는 것과 같이 좋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듣기 좋아하는 말만 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사랑으로 진리의 말, 지혜의 말을 하는 것입니다.
헌데 평소에 말이 많은 사람을 제외하고는 평온하고 아무 일이 없을 때 말에 실수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문제는 화가 날 때, 마음 속에 분노가 있을 때에 말을 통제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내 마음 속에 상처가 있고, 분노가 들끓을 때, 흥분될 때에 올바른 말을 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 때 대부분 말에 실수를 하게 되어 죄를 짓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럴 때에 내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 우선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산상수훈에서 경고하시기를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에 대하여 라가라(욕)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마 5:22)고 하셨습니다.
분노가 치미는 상황에서 절제된 말, 통제된 말, 유순한 말을 한다면 정말 은혜스럽습니다. 주위 사람들에게 덕을 끼칩니다. 솔로몬은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느니라”(잠 15:1)고 하였고, 사도 바울은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고르게 함같이 하라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골 4:6)고 하였으며,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엡 4:29)고 하였습니다. 분노를 다스릴 줄 알아야 성숙한 사람입니다 내 마음에 상처가 있고, 분노가 있으면 절대로 정상적인 올바른 대화가 될 수 없습니다. 그 때는 침묵해야 합니다. 우리의 상처가 먼저 치유가 되어야 합니다. 분노가 풀어져야 합니다. 그래서 마음가짐이, 태도가 바뀌어야 합니다. 우리의 영혼을 깨끗하게 하고 하나님과의 교제를 회복하고 난 후에 말을 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가든교회 교우 여러분!
말에 실수를 하지 않는 방법 중의 하나가 침묵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것은 침묵이 아니라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혀를 사용하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내주하는 성도들은 얼마든지 은혜의 도구, 축복의 도구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나라나, 사회나, 교회나, 가정이 위기를 만난 이유는 말이 능력을 잃어버린 데 있습니다. 그래서 서로 신뢰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더 이상 말이 소용이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먼저 신뢰가 회복되어야 합니다.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려면 성령의 다스림을, 하나님의 말씀의 다스림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의 능력에 사로잡히기를 원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헌신이 되어야 혀에 재갈을 물릴 수 있습니다. 입술의 말이 험한 인생의 항로를 조정할 수 있는 키로 사용되어야 합니다. 아니 누가 뭐라고 해도 흔들리지 않고 자기 할 일을 찾아서 하는 성도가 모인 교회가 건강한, 튼튼한 교회입니다.
제발 생각 좀 하고 말하십시오. 자꾸 훈련을 해보십시오. ‘이 말이 이 사람에게, 교회에 유익이 되겠는가’ 생각을 하고 말하십시오. 상대방의 반응까지 고려해서 말하십시오. 사람들은 옳은 사람보다 좋은 사람, 선한 사람의 말을 듣습니다. 주님의 인격을 닮은 좋은 사람, 선한 사람이 되십시오. 덕이 되고, 위로와 격려가 되고, 진심이 닿는 사랑의 말을 하십시오. 때로는 상대방이 잘못 오해할 수도 있지만 결국에는 그 진심을 깨닫게 됩니다. 성령께서 주시는 말은 늘 사람들에게, 가정과 교회에 유익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벧전 4:11절상) 하였습니다.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의 자녀답게, 주님과 늘 함께 하는 성도답게 아름다운 향기나는 진리의 말, 사랑의 말을 하고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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