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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태일 목사
작성일 2023-12-21 (목) 09:04
분 류 수요설교
ㆍ조회: 160    
예언된 평화의 왕이 오심 (사 11:1-9)
메시아이신 예수님이 탄생하기 700여년 전에 선지자 이사야가 여러 번 메시아 오심을 예언하였습니다. 예를 들면,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7:14) 고 하였으며, 53장에서는 메시아가 고난의 종으로 올 것을 예언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메시아가 오실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배경은 주전 733년경 유다 왕국이 앗수르의 공격을 받아 거의 멸망 직전까지 이르렀을 때입니다. 유다는 큰 나무 밑동이 잘라진 고목나무와 같았습니다. 그 백성들이 낙심과 절망에 빠져 있을 때 이사야 선지자는 소망의 예언을 합니다. 훗날 이중적으로 예언이 성취됩니다. 실제로 히스기야 왕 때에 유다가 앗수르를 물리친 것과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성취됩니다.
예언의 내용은 잘라진 고목나무 밑동에서 한 싹이 나오고 가지가 나서 열매를 맺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때에는 참된 평화가 이루어지는데 어린 양과 이리가 함께 거하며, 표범과 염소가, 송아지와 사자가, 암소와 곰이 함께 누우며, 어린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어도 물리지 않는 평화의 나라가 임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1절) 라고 하였는데, 무슨 뜻입니까? 메시아인 예수 그리스도를 이새의 줄기에서 나는 한 싹이라고 하였습니다. 다윗의 아버지가 이새입니다. 왜 다윗의 후손가운데 난다고 하지 않고 이새라고 했을까요? 그동안 다윗의 후손 왕들 가운데 믿음이 없는 왕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나라를 어렵게 했습니다. 그래서 실망스러운 또 다른 다윗의 후손의 왕이라고 하지 않고, 새로운 지도자를 의미하려고 이새의 줄기에서 난다고 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아시다시피 예수 그리스도의 성탄은 화려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인간적인 외모는 연한 싹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사 53:2)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신성을 우리 인간들에게 보여주었습니다. 그 크신 사랑을 나타내려고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습니다.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실 때 마치 유다 나라가 밑동이 잘린 채 절망적인 상태였던 것처럼, 인간들은 죄로 인하여 죽을 수밖에 없는 절망의 상태였기에 때가 되어 오신 것입니다. 열매를 맺기 위하여,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이루기 위하여 오셔서 결국 감당하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눈으로 볼 때 예수님은 전혀 그 일을 감당할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빌립의 인도를 받아 주님의 제자가 되기 전에 나다나엘이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요 1:46)고 한 것입니다. 즉, 예수님의 자란 배경조차 메시아로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성령으로 충만한 분으로, 무한하신 능력으로 모든 사역을 감당하며 이 세상을 바꾸었습니다. “여호와의 신 곧 지혜와 총명의 신이요 모략과 재능의 신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이 그 위에 강림하시리니”(2절) 하였듯이 성신, 성령의 능력으로 말입니다. 여기 성령에 대하여 7가지로 그 특징을 설명합니다. 여호와의 신, 지혜의 신, 총명의 신, 모략의 신, 재능의 신, 지식의 신,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입니다. 지혜, 총명, 모략, 지식의 신이라고 표현한 것들이 각각 어떻게 다른 지 구별하여 해석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분명한 것은 인간의 머리, 상상을 초월하는 신입니다. 전지전능한 여호와 하나님의 신입니다. 이러한 성신이 임하면 하나님을 경외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성령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면, 우리 심령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경배와 찬양을 드리고 싶은 열망이 생기며, 죄를 멀리하고 싶은 열망이 생기게 됩니다. 분별력을 가지고 성령의 역사와 악령의 역사를 구별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3년간 공생애 사역은 성령의 능력으로 하였습니다. 철저하게 성령의 인도를 받았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우리 자아를 내려놓고 철저하게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 죄악을 이기게 됩니다. 하나님이 강제로 우리를 조정하지 않으십니다. 우리 각 사람이 내주하시는 성령님의 뜻에 순종하면 우리 안에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받게 되어 사탄 마귀를 물리치게 됩니다.

[Slide 3-1] 무엇보다 예수님은 이런 성령의 능력으로 공의를 행하십니다. “그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며 그 눈에 보이는 대로 심판치 아니하며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치 아니하며 공의로 빈핍한 자를 심판하며 정직으로 세상의 겸손한 자를 판단할 것이며 그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이며 공의로 그 허리띠를 삼으며 성실로 몸의 띠를 삼으리라”(3-5절)고 하였습니다. 당시 유다 백성들이 경험한 것은 지도자들이 온전한 공의로 나라를 이끌지 못하더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지혜와 재능을 의지하기에 교만해져서 나라를 망치더라는 것입니다. 정말 진실한 지도자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기에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공의로 다스리더라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대로,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하지 않더라는 말입니다. 외모로 판단하지 않고, 뇌물에 넘어가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공의와 정직으로 어려운 사람들을, 약한 사람들을 판단해서 억울한 자들의 신원을 들어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판단의 기준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7절의 “그 입의 막대기”는 말씀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 입술의 기운으로, 말씀의 능력으로 악인을 심판하며, 그 권세를 다 빼앗을 것입니다. 진리의 말씀으로 세상을 이길 것입니다. 공의(righteousness)와 성실(faithfulness)로, 진리의 빛이 어두움을 물리칠 것입니다.
그리하여 온 세상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의 뜻에 순종하게 될 것입니다.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9절하)고 한 이유입니다. 이러한 놀라운 하나님의 뜻을 아는 지식에 물이 바다를 덮은 같이 온 세상에 충만하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권세가 온 세상을 다 덮어 밀어낼 것입니다. 악한 자들이 도망하지 못하도록 온 세상에 가득 채우는 것입니다.

[Slide 3-2] 또한 예수님은 온 세상에 참된 평화를 허락하실 것입니다. 짐승들조차도 말입니다.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찐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6-7절) 라고 하였습니다. 그 나라에서는 맹수의 본능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연약한 짐승과 함께 어울립니다. 도저히 인간이 이해하지 못하는 일들이 벌어집니다. 짐승의 세상에도 분쟁이 없어집니다. 약육강식의 세상이 평화의 세상으로 변합니다. 사실 인간의 타락의 영향을 짐승들도 받아서 그렇게 된 것인데, 성령이 짐승들도 온순하게 만듭니다. 예를 들면, 노아의 방주 안에도 분명히 맹수들이 있어서 약한 짐승들을 헤칠 수 있었을 텐데 평화롭게 지냈습니다. 성령이 하신 일이지요. 또 다니엘이 사자 굴에 들어갔을 때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어 사자들의 입을 봉했다고 했습니다(단 6:22). 그래서 다니엘을 해치지 못했습니다. 성령이 역사하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젖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8절)고 하였습니다. 독사가 물지를 않습니다. 물론 비유적인 표현입니다. 성령이 역사하면 독사조차 변화를 받아 어린아이가 장난을 쳐도 가만히 있습니다. 아니 함께 장난합니다.
사실 사람의 말에도 독이 있을 때가 있지요. 그래서 독설이라고 합니다. 정말 독이 있는 말 한마디만 들어도 사람은 며칠동안 잠을 자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사람을 헤치는 죄의 성향으로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이 임하셔서 역사하시면 그런 말을 하지 않습니다. 아니 오히려 칭찬과 격려의 말을 하게 됩니다. 사랑하게 됩니다. 이렇게 성령님은 누구라도 변하게 할 수 있습니다. 즉, 우리가 성령의 인도를 받아 살면 누구와도 평화를 누리게 됩니다. 사납고 거친 맹수 같은 사람들도 순한 어린아이처럼 변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9절상) 라고 한 것입니다.
또한, 우리 예수님 탄생하실 때에 “홀연히 허다한 천군이 그 천사와 함께 있어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 2:13-14)고 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가든교회 교우 여러분!
스가랴 선지자는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 내가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끊겠고 전쟁하는 활도 끊으리니 그가 이방 사람에게 화평을 전할 것이요”(슥 9:9절하-10절상)고 예언하였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종려주일에 십자가를 지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오르시는 모습에 대한 예언입니다만, 오늘 본문의 이사야 선지자의 메시아에 대한 예언의 말씀과 동일한 내용입니다.
이 세상 역사는 전쟁의 역사입니다. 갈등과 분쟁이 어디서든지 끊어지지 않습니다. 불공정, 불의가 난무합니다. 정말 공의와 평화의 왕이 필요합니다. 이미 이사야 선지자는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사 9:6)고 예언하였습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 아버지와 동일하게 세상을 주장하실 텐데, 평강의 왕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예언된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2000여년 전에 이 세상에 평화를 주실 왕으로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미 이루어진 하나님의 나라에는 평화가 임했습니다. 믿는 우리 안에 성령이 계셔서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습니다. 물론 아직 완전한 가시적인 하나님의 나라는 도래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교회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의 모형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아셔야 할 것은 이 세상 나라와 하나님 나라는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세상 나라는 한번 몰락하면 다시 일어서기 힘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아무리 밑둥이 잘린다 하더라도 다시 재기한다는 사실입니다. 성령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혹시 인생 밑바닥까지 떨어진 가정이 있습니까? 언제든지 회복이 가능합니다. 성령의 인도만 받으면 됩니다. 말씀을 붙들면 됩니다. 공의로 다스리시는 주님이 우리의 억울함을 해결해주시고, 평강을 허락하실 줄 믿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고 하였습니다. 말씀이 곧 예수님입니다. 주님을 사랑한다면 말씀을 사랑하는 것이고, 주님에게 순종한다는 것은 말씀을 순종하는 것이며, 주님을 기뻐한다는 것은 곧 말씀을 기뻐하는 것이며, 주님과 교제한다는 것은 곧 말씀으로 교제하는 것입니다. 주님 안에 거하는 것이 곧 말씀 안에 거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 곧 말씀을 통해 그의 목소리를 듣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자와 진리로 네게서 떠나지 않게 하고 그것을 네 목에 매며 네 마음판에 새기라 그리하면 네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은총과 귀중히 여김을 받으리라”(잠 3:3-4)고 하였습니다. 공의와 평강의 주님을 붙들면, 말씀을 붙들면 하나님에게도, 사람들에게도 은총과 귀중히 여김을 받게 될 것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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