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등록 비번분실

전체방문 : 5,128,939
오늘방문 : 1500
어제방문 : 10789
전체글등록 : 3,866
오늘글등록 : 0
전체답변글 : 2
댓글및쪽글 : 18

좌측_배너 배너 001

작성자 한태일 목사
작성일 2011-05-30 (월) 04:38
분 류 주일설교
ㆍ조회: 1643    
부활과 생명(1)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요 11:1-16)-
죽음은 우리 인생에서 피할 수 없는 실재입니다. 종종 경고도 없이 닥칩니다. 속일 수도 없습니다. 차별도 없습니다. 젊은 이들이 먼저 가기도 합니다. 부자건 가난한 자건, 배운 자건 못 배운 자건 상관없습니다. 악한 자건 선한 자건, 병든 자건 건강한 자건 누구나 예외없이 죽음을 맞습니다. 그래서 어쩌면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죽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보통 사람들은 일단 죽고 나면 모든 것이 다 끝나고 만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살을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죽음이 결코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오히려 우리 안에 하나님께서 주신 영원한 생명이 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하지, 이 세상에서 죽고 사는 것은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서의 죽음은 잠시 잠을 자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특별히 사랑하신 한 가정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1-2절). 죽은 나사로가 주인공이 아니고 예수님이 주인공이기에 1절에 “어떤 병든 자가 있으니”라고 요한은 적고 있습니다. 이 가정은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그 발에 향유를 붓고 머리털로 닦았던 마리아의 가정입니다(요 12:3). 이 집은 부모님이 안 계셨던 것 같습니다. 마리아, 마르다, 그리고 오라비 나사로 이렇게 세 남매가 살고 있었습니다. 이 세 사람도 예수님을 무척 사랑했고, 예수님도 그들을 굉장히 사랑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우리 모두를 사랑하지만 그 중에서도 특별히 사랑하시는 자가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 인간들은 나와 비슷하거나 예쁜 사람에게 호감이 가서 더 좋아할 것입니다만, 예수님은 그렇게 외모로 사람을 차별하지 않습니다. 사실 마리아는 동네에서 죄인으로 손가락질 받던 여인이었고, 일곱 귀신이 들려서 고통 받던 여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이 예수님의 사랑을 많이 받았던 것은 그가 예수님을 그렇게 사랑하며 그 말씀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죄 사함 받은 것이 너무 기뻐서 감사하니까 그 비싼 향유를 예수님 발에 붓고 여자가 가장 소중히 생각하는 머리털로 씻겼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히 여기리라”(삼상 2:30)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특별히 많이 받을 수 있는 방법은 하나님을 그 무엇보다 가장 사랑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렇게 사랑하시는 가정의 식구 한 사람이, 그것도 그 집의 가장이라고 할 수 있는 오라비가 죽을 병이 걸렸습니다. 우리는 대개 하나님께서 특별히 사랑하시는 사람이라면 병도 걸리지 않고 어떤 아픔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을 보면 그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아무리 사랑하시는 사람이라도 병도 걸릴 수 있고, 사고도 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세상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여러 가지 어려운 일을 당할 수가 있습니다. 이럴 때 웬만한 성숙한 신앙인이 아니면 하나님 사랑에 대하여 의심을 갖거나, 자신의 믿음에 대하여 회의가 생길 수 있습니다. 나는 주님을 너무나 사랑하고 있고, 또 주님도 나를 무척 사랑하는 줄 알았는데 왜 내가, 혹은 내 사랑하는 가족이 이런 병에 걸렸을까? 나름대로 잘 믿는다고 생각했는데 엉터리였나? 의심이 드는 것입니다. 실망과 좌절감이, 때로는 배신감이 찾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사탄, 마귀들의 수작입니다. 하나님 사랑에 대하여 의심을 하게 하고, 하나님을 불신하게 만듭니다. 믿음 생활에 위기가 찾아오는 것입니다. 그럴 때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 믿는 자들도 이해할 수 없는 불행이 닥쳐서 고통을 당할 때가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질병으로, 사업 실패로, 가정이 깨어짐으로, 모든 희망을 걸었던 자녀가 잘못된 길을 감으로,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당함으로, 혹은 인생의 진로 문제나 결혼 문제가 벽에 부딪쳐 낙심되고 절망감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시험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이럴 때에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4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라”고 하셨습니다. 9장에서 날 때부터 시각장애인으로 태어난 사람을 고쳐주시면서 하신 말씀과 동일한 내용입니다. 즉 우리가 이 세상 살면서 불행한 일을 만나 고통을 당할 때라도 하나님 사랑을 의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고통의 배후에는 사람이 깨닫기 어려운 하나님의 뜻, 선하신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나사로의 누이동생들이 보내온 사람에게 ‘그는 안 죽는다. 걱정하지 말아라. 오히려 그가 병들어 죽게 된 것 때문에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내가 찬송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니 염려하지 말아라’고 하는 것입니다. ‘너의 고난이, 실패가 아주 망해버리는 고난이나 실패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하실 일이 있으시니 흔들리지 말고 계속 나를 신뢰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심지어 죽음이 눈 앞에 와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 사랑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께는 인간이 가장 두려워하는 죽음조차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안 아프고, 안 죽는 것보다 어떤 생각을 가지고 어떤 삶을 살아가느냐 하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것입니다.

마리아와 마르다가 애타는 것은 왜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자가 죽을 병이 걸렸는데 속히 살리시러 오시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5-6절을 보시면 죽을 병이 걸렸다는 소식을 듣고도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셨다고 합니다. 계시던 곳에서 예루살렘 가까운 유대 지방 베다니까지는 하룻길은 되었는데 왜 이틀을 더 지체하셨을까요? 나사로의 누이동생들에게는 그 어느 때보다 가장 주님이 필요한 때였습니다. 그런데 오시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죽은 지 나흘이 되어야 오셨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급해서 속이 타 부르짖는데도 응답에 지체되면 더 주님 사랑을 의심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또 한 가지 교훈을 얻습니다. 아무리 응답이 늦어도 주님 사랑을 의심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 주님의 사랑을 의심하고 불신하는 것이 잘못된 것임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우리 편에는 더딘 것 같지만 다 하나님의 계획이, 섭리가 있었던 것입니다. 비록 더디지만 나흘 후에 찾아오셨고 나사로를 살리셨습니다. 이유는 사람들 생각에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시신에서 썩은 냄새가 날 정도니 살아나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하는 그 때에 살리심으로, 살아난 나사로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셨고, 많은 사람이 믿게 되었기 때문입니다(15절). 그리고 그 두 자매들뿐 아니라 제자들에게도 더욱 확실한 믿음을 심어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여러분! 믿음은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부르짖어도 응답이 없을수록 더욱 하나님을 믿는 것이 참 믿음입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다는 것을 증명하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 이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사 30:18) 하였고, “무릇 기다리는 자에게나 구하는 영혼에게 여호와께서 선을 베푸시는도다 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애 3:25-26)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간절히 기도를 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속이 타도록 응답을 안 하실 때도 있다는 것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래서 참고 기다릴 수 있어야 합니다.

7-8절을 보시면 사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베다니로 가지 않으실 줄 알았습니다. 10장 끝부분에서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자신이 하나라고 했더니 돌을 들어 치려고 했던 유대인들을 피하여 요단강 건너편 갈릴리 주변 베레아 지역에 와 계셨기 때문에, 유대로 가시는 것은 불가능했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16절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그리로 가자 하시니 도마가 거기서 돌에 맞아 죽더라도 예수님과 함께 가자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낮이 열두 시간이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하느니라”(9-10절)고 하십니다. 유대인들에게 낮은 오전 6시부터 오후 6시까지라서 12시간이 주어졌음을 빗대어, 아무리 그 곳에 있는 유대인의 분위기가 살벌하다 하더라도 예수님 자신이 빛이기 때문에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그러나 빛되신 주님이 없는 밤에는 당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 주님의 빛이 환하면 얼마든지 사탄, 마귀들을 대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빛이 약해지면, 어두워지면 중요한 결정을 즉흥적으로 내리면 안 됩니다. 회복이 될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그리하여 심령에 강한 말씀의 역사가 있고, 성령 충만한 감동과 능력이 부어질 때에는 단지 위험이 있다고 마귀들을 겁내지 말라는 것입니다. 다 피해갈 수 있기 때문에, 이길 수 있기 때문에 말입니다.

사랑하는 경향가든 교우 여러분!
자매들의 부르짖음에 대한 응답의 때가 되니 예수님께서는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11절)고 하십니다. 나사로가 죽은 것을 아셨음에도 잠들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유는 예수님에게는 죽음이 잠 자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잠을 자는 사람은 얼마든지 깨울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죽음에 대하여 중요한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궁극적인 목적은 우리 믿는 자들이 아프지 않고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도록 하기 위하여 오신 것이 아닙니다. 죽음을 정복하기 위하여 오셨고, 정복하셨습니다. 그래서 죽음은 그냥 자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그렇게 표현했습니다(고전 15:51, 데살전 4:13-14). 우리 인간들에게는 죽음이 너무나 엄청난 비극이고 심각한 문제이지만 예수님 앞에서는 잠시 잠을 자는 것이기에 다시 깨우셔서 영원히 주님과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사흘 만에 사망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주님이시기에 죽음 이후에 있는 부활의 삶을 연결하는 과도기(transition period)처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물론 제자들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나사로가 죽지 않고 정말 자고 있는 것으로 알았습니다(13절). 엄청난 지각의 차이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나 자신을 비롯하여 주위의 사랑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해서든지 고생하지 않고, 고통 당하지 않고 평안하게 살기를 원합니다. 매일 아프지 않고 편하게 살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어려움을 당해도 고통을 잘 참으며, 심지어 죽음조차도 두려워하지 않기를 원하십니다. 아니 우리를 질병과 고난의 용광로에 넣으셔서 그 안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기적들을 발견하기 원하십니다. 그 고통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지 말고 더욱 신뢰하기를 원하십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 .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니라”(롬 8: 35, 37-39)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약속을 붙들고 참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결국 응답하셔서 영광을 하나님께 돌릴 날이 옵니다. 아니 그 과정을 통해서도 주님의 이름이 영화롭게 드러나기를 원하십니다.
교회사를 살펴보시면 하나님께 크게 쓰임 받은 사람이나 교회를 보면 대부분 엄청난 시험들을 겪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래야만 하나님의 능력이 가장 크게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어려움을 주시는 것은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하심이 아닙니다. 더 큰 영적인 승리를 주시기 위한, 큰 영광을 받으시기 위한 하나님의 뜻이 숨겨져 있습니다. 아 멘!
그러므로 어떤 고난의 시간을 통과하시는지 모르겠으나 고난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감사하십시오. 우리는 죽음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이번 고난을 통하여 도대체 어떤 은혜를 주시고자 하시는가 기대하며 부르짖기를 바랍니다. 고난은 우리에게 아픔과 고통을 주지만 우리가 그것을 통해서 믿음이 자라고 더욱 성숙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 은혜가 여러분에게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 멘!!  
   
번호     글 제 목  작성자 작성일 조회
409 주일설교 주님을 사랑한다면(요 14:15-24) 한태일 목사 2011-09-26 1586
408 수요설교 믿음의 시험(신 13:1-11) 한태일 목사 2011-09-23 1592
407 주일설교 더 큰 일도 하리라(요 14:12-14) 한태일 목사 2011-09-20 1696
406 주일설교 너희는 근심하지 말라(요 14:1-11) 한태일 목사 2011-09-12 1984
405 수요설교 세상에서 주의하여야 할 것들(신 12:8-19) 한태일 목사 2011-09-09 1542
404 주일설교 주님을 따라가고 있습니까?(요 13:36-38) 한태일 목사 2011-09-05 1583
403 주일설교 정말 사랑해야 합니다(요 13:31-35) 한태일 목사 2011-08-29 2000
402 주일설교 가롯 유다(요 13:18-30) 한태일 목사 2011-08-22 1723
401 주일설교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요 13:1-17) 한태일 목사 2011-08-08 1701
400 수요설교 하나님의 무궁한 자비와 긍휼(애 3:19-26) 한태일 목사 2011-08-04 1848
399 주일설교 믿어지는 것이 기적입니다(요 12:37-50) 한태일 목사 2011-08-02 1589
398 주일설교 빛의 아들들이 되었으니(요 12:27-36) 한태일 목사 2011-07-25 1667
397 주일설교 주님을 섬기려면(요12:17-26) 관리자 2011-07-23 1704
396 주일설교 잘못된 믿음(요한복음 12:12-16) 관리자 2011-07-23 1577
395 수요설교 마귀의 능력을 초월하시는 예수님(마 8:28-34) 한태일 목사 2011-07-07 1660
394 주일설교 은혜를 받았다면(요 12:1-11) 한태일 목사 2011-07-07 1591
1,,,61626364656667686970,,,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