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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태일 목사
작성일 2011-07-25 (월) 09:00
분 류 주일설교
ㆍ조회: 1668    
빛의 아들들이 되었으니(요 12:27-36)
이 세상에서 가장 신비로우면서도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 바로 빛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빛은 소리도 없고 무게도 없이 이 세상을 비추어 어두움을 물리치고 환하게 해주며, 모든 생물이 살 수 있도록 합니다. 아마 이 빛이 없어진다면 모든 활동이 중단되고, 모든 생명체가 죽고 말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눈으로 보는 빛 말고 또 다른 빛이 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바로 예수님이 빛입니다(요 1:4,9). 오늘 본문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빛으로 말씀하십니다(35-36절). 그리고 46절에서는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는 어두움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고 하셨습니다. 마치 이 세상에 있는 모든 피조물이 태양빛이 있어야 살 수 있듯이 이 세상 모든 사람은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어야 살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사실 사도 요한은 그의 복음서를 통하여 독자들에게 처음 1장부터 어두움에서 빛으로 나와 이 빛되신 예수님을 믿으라고 하였는데,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권고를 하신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빛으로 초청을 하고 있습니다. 만약 이 초청을 받고, 권고를 듣고 믿으면 어두움에서 나와 빛의 아들이 된다고 합니다. 할렐루야!
   여러분 모두는 다 빛의 아들이 되신 줄 믿습니다. 만약 아직도 빛을 만나지 못하고 어두움 가운데 계신 분이 있다면 속히 빛을 영접하고, 빛의 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우리가 이 생명의 빛을 알게 되고, 받게 되어 빛의 아들이 되었습니까? 바로 빛되신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 사함을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고, 성령께서 이 진리를 믿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저를 슬프게 하는 것은 많은 교회의 강단 말씀에서 십자가 설교가 줄어들었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교인들이 매번 듣는 이야기라고 하면서 진부한 십자가 이야기보다는 자신들이 듣기 좋은 축복 설교나 잘 된다고 하는 설교를 좋아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말씀의 강단에서 예수님 십자가를 이야기하지 않는다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무슨 유익이, 무슨 소망이 있겠습니까?
   지난 주일에 살펴본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어야만 열매를 맺는다는 평범한 진리를 가지고 자신의 죽음을 예고하셨던 예수님께서는 그 때가 다가온 줄 아시고, 참 하나님이자 참 사람이셨기에 27절에서 한 인간으로서의 고민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지금 내 마음이 민망하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  여기 ‘민망하다’는 헬라어 원어의 뜻은 ‘흔들리다’ ‘불안하다’ 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이 십자가 죽음을 앞두고 흔들리시는 것입니다. 불안한 것입니다. 비록 머리로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기에 순종해야 하는데, 마음으로는 두렵고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냥 조용히 기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십자가 상에서도 그러하셨듯이, 그 주위의 사람들을 상관하지 않고 하나님 아버지께 부르짖었습니다. “아버지여 나를 구원해 이 때를 면하게 해 주옵소서”라고 말입니다. 빛되신 주님께서도 가지신 인성 때문에 이렇게 고민하며 하나님께 부르짖었는데, 하물며 빛의 아들인 우리들이야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심리적으로 불안하여 견딜 수 없는 상황이면 소리 내어 부르짖어야 합니다. 무엇이 두렵고 답답할 때에도 속으로 기도하지 마시고 입을 열어 큰 소리로 기도하셔야 합니다. 많은 시편에서의 기도처럼 하나님 앞에 토해내듯이 기도해야 합니다. 그냥 속으로만 기도하면 다른 잡 생각이 들면서, 도대체 내가 무슨 기도를 하고 있는지 헷갈리면서 더 불안해 질 수 있습니다.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라는 기도는 쉽게 이야기하면 지금 너무 불안해서 숨이 막힐 지경이니 제발 제 마음을 안정시켜 주셔서 이 위기를 넘길 수 있게 해달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솔직한 심정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주위에 제자들이 있든지 상관없이 그 자리에서 바로 하나님께 부르짖은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의사도 분명히 밝혔습니다.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라고 말입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우리의 기도에도 이 ‘그러나’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연약함, 부족함, 비겁함, 수치를 다 하나님께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기도가 역사하는 순간은 이 ‘그러나’에 있습니다. 우리가 ‘그러나’라고 하는 순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부족함을 다 가져가시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뜻만 이루어지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심령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우고 터질 것 같은 우리의 불안함과 답답함을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면서 부르짖는 것인 얼마나 소중한 일인가 알아야 합니다. 주님은 환난 날에 우리가 주님을 부르기를 원하십니다(시 50:15). 그것이 되면 그 다음 일은 하나님께서 알아서 하실 것입니다.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나의 고통을 다 알고 계시고, 이 고통이 헛되지 않고 반드시 귀한 열매로 나타날 것임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께 도움을 구할 때 더러는 우리의 하는 일이 더디고, 삶이 꼬이는 것 같아도 주님께서 우리의 생활이 그 뜻에서 멀어지기 전에 도와 주십니다.
   사실 예수님은 얼마든지 그 고통의 때를 면할 수 있었습니다. 충분한 능력이 있으신 분입니다. 사탄이 그렇게 해 보라고 유혹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은 자신의 고통을 아버지께 호소하고 있습니까? 아들은 아버지에게 얼마든지 아픈 것을 아프다고 말할 수 있고, 슬픈 것은 슬프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자기가 끝까지 감당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를 드렸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도 마찬가지이고요. 이유는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기 위하여 말입니다.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28절상)!
   아들이 원하는 것은 아버지의 이름이 영광스럽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해야 아버지의 이름이 영광스럽게 되나요? 죄인들이 십자가의 은혜를 묵상하며 하나님께 찬양과 감사를 돌려 드리는 순간입니다. 오늘도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신 예수님께서는 우리 죄인들이 구원을 받고 하나님께 경배와 찬양을 드리며 감사하는 것을 보게 해달라고 중보기도를 하시는 줄 믿습니다. 아 멘!

   예수님의 간절한 부르짖음에 하나님께서 응답하셨습니다.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 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28절하)! 복음서를 보면 하늘에서 예수님을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음성이 세 번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번은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실 때(마 3:17)와 변화산에서 변화를 받으실 때(마 17:5),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입니다. 모두 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아들 예수님을 향한 기쁨을 나타내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지금 그 아들이 고민하고 불안해 하며 부르짖는 것을 그냥 두시는 분이 아니셨습니다. 모든 것을 알고 듣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응답하셨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이미 하나님께 영광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동안의 예수님의 사역과 삶을 통하여 말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로 다시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할 것이라는 음성입니다.
   하지만 주위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것은 아닙니다(29절). 그러니까 혹자는 우뢰가 울었다고 하든지, 천사가 예수님께 말했다고 추측할 뿐입니다. 마음이 강퍅한 사람들에게는 아무리 하나님의 음성을 들려주어도 못 알아듣는 것과 일반입니다. 귀가 있어도 없는 것과 일반이기에 성경은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마 11:15, 눅 14:35, 계 2:29, 계 3:6,13,22)라고 반복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하늘에서 들린 하나님의 음성은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주위 사람들을 위함이라고 하시면서, 세상 심판이 임할 것이라고 하십니다(30-31절). 사탄이 역사하는 이 세상, 아니 사탄의 머리가 깨어지는(창 3:15) 날이 곧 다가온다는 뜻입니다. 한편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32절)고 하십니다. 드디어 십자가 구속의 역사가 일어나면(33절) 세상 모든 사람들, 유대인뿐 아니라 헬라인들까지도 십자가를 믿는 믿음으로 인도하셔서 구원하신다는 말씀입니다. 물론 세상 모든 사람들 다 구원하신다는 말씀은 아닙니다. 온갖 부류의 사람들을 차별 없이 다 구원에로 초청하겠다는 말씀이며, 그 중에 택한 사람들은 믿고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땅에서 들린다’는 이야기를 하니까 모였던 무리들은 이해를 못하고 되묻기를, “우리는 율법에서 그리스도가 영원히 계신다 함을 들었거늘 너는 어찌하여 인자가 들려야 하리라 하느냐 이 인자는 누구냐”?(34절) 라고 합니다. 성경에서 예수님에 대한 칭호는 여러 가지가 나옵니다. 복음서에서는 ‘랍비’라고 하나님의 말씀, 율법을 가르치는 선생님이라는 뜻으로 부르기도 했고,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다윗의 자손’ 등 메시아를 뜻하는 칭호를 사용하셨는데 어느 칭호도 예수님께서 틀렸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다 맞으니까요. 그런데 정작 예수님 자기 자신은 자신을 가리켜 반드시 ‘인자’라고 부르셨습니다. 아마도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메시아를 뜻하는 칭호가 대단히 혁명적인 투사, 정치적인 왕의 의미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불필요하게 오해를 일으키지 않기 위하여 자신을 부를 때 ‘인자’라고 부르셨다고 생각합니다. 구약에서는 오직 에스겔 선지자를 향하여 여호와 하나님께서 ‘인자’라는 칭호를 사용하셨는데, 이 때에는 단지 연약한 인간이라는 뜻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인자의 의미는 이사야서의 고난의 종과 다니엘서에 나오는 구름을 타고 나타나는 종말의 종과 결부된 개념인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가장 고민했던 문제가 바로 이 고난의 종으로서의 인자의 정체였습니다. 메시아가 오는데 고난의 종으로 와서 고난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인자가 누구냐’(What kind of Son of Man are you talking about?)이라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 생각에는 그리스도가 오시면 바로 로마 제국을 뒤엎고 왕으로 영원히 다스리시는 분으로만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그들의 생각과 하나님의 뜻과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까?
   하지만 예수님께서 자신을 인자라고 하심은 참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낮아지셔서 고난을 받고 죽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구약 성경을 잘 안다는 유대인들이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죄가 해결되려면 기름부음 받은 자가 인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자와 가장 가까운 개념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죽임 당한 어린 양’입니다. 한 알의 밀알이 되셔서 십자가에 죽으셔야 많은 열매를 맺는 것이었습니다. 그 후에 주님께서 세우실 나라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입니다.

   사랑하는 경향가든 교우 여러분!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아직 잠시 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으니 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 어두움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 어두움에 다니는 자는 그 가는 바를 알지 못하느니라 너희에게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그리하면 빛의 아들이 되리라”(35-36절상)고 하셨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십자가 복음의 진리를 이성적으로, 머리로 이해하려고만 하니 납득하기가 어려워서 믿지를 못합니다. 왜 내가 지은 죄를 하나님의 아들이 감당해야 하느냐고 말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 방법 외에는 우리가 죄에서 구원을 받을 수가 없기에 이성적으로 따지지 말고, 그저 하나님의 은혜로 받아들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믿고 주님을 심령에 모시고 사는 사람들은 모두다 죄 용서를 받고, 성령을 받고, 새로운 삶을 살게 됩니다. 마치 중병에 들어 의사에게서 수술을 받아야 산다고 하면 그냥 의사를 믿고 수술실에 들어가면 살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뭐 수술 과정에 대하여 이러쿵 저러쿵 자세히 캐물으면서 이해가 안 된다고 수술 받지 않으면 그냥 죽는 것과 같습니다. 지금 중요한 것은 구원의 과정을 이해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지금 유대인들 가운데 계시고,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을 그들에게 지금 빛이 있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그들이 해야 할 것은 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서 어두움에 붙잡히지 않는 것입니다. 어두움에 속한 사람들처럼 이것 저것 따지면서 안 믿지 말고, 속히 빛되신 생명의 주님을 믿으라고 합니다. 그러면 빛의 아들이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요 1:12). 할렐루야!
   그리고는 예수님께서 저희를 떠나서 숨으셨다고 합니다(36절하). 이유는 그들이 틀림없이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가지고 따질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왜 당신만 빛이냐’ ‘빛이면 증거를 보이라’ 하는 식으로 따지기 시작하면 정말 피곤한 말장난, 논쟁 밖에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그들을 피하시고 지금 더 기도할 때이기 때문에 숨으셨다고 생각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여러분의 죄 때문인 것을 확실하게 믿습니까? 그러면 빛의 아들입니다. 빛의 아들이라고 해서 어려움이, 답답함이, 두려움과 불안함이 전혀 없는 것 아닙니다. 그럴 때마다 주님처럼 하나님 아버지께 간절히 부르짖으시기 바랍니다. 통곡을 하셔도 괜찮습니다. 소리지르며 토해내셔도 됩니다. 하지만 꼭 ‘그러나’ 를 잊지 마십시오. 십자가의 은혜를 생각하며 감사와 찬송을 드리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빛의 아들이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또한 빛의 아들이면 빛을 나타내어야 합니다. 주위의 어두움을 환하게 비추어야 합니다. 빛을 증거하고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빛의 아들이 가진 사명입니다. 우리 자신에게 일어난 놀라운 일들을 증거하고 살아야 합니다. 빛을 자랑하고 전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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