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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 태일 목사
작성일 2010-12-10 (금) 00:04
분 류 주일설교
Link#2 요 13:34-35
ㆍ조회: 1895    
구역교회(2) - 서로 사랑하는 모임
어느 시인이 말하기를 “충분한 사랑이 정복할 수 없는 어려움이란 없습니다. 충분한 사랑이 치료할 수 없는 병도 없고, 충분한 사랑이 열 수 없는 문도 없고 충분한 사랑이 무너뜨릴 수 없는 벽도 없고, 충분한 사랑이 뉘우치게 할 수 없는 죄도 없습니다. 근심의 뿌리가 얼마나 깊은지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앞 날이 얼마나 절망적으로 보이는지도, 매듭이 얼마나 단단한지도, 저지를 실수가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충분한 사랑은 이 모든 것을 다 녹여버릴 것입니다. 충분히 사랑할 수만 있다면 당신은 이 세상에서 제일 행복하고 강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라고 말입니다. 정말 충분히 공감이 가는 이야기입니다.
초대교회 신학자요, 지도자였던 터툴리안 교부의 글에 보면 초대교회 교인들은 불신자들을 전도할 때에 ‘당신들은 그리스도인들처럼 사랑하는 사람들을 본 일이 있습니까?’라는 말로 시작했다고 합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불신자들을 향하여 그렇게 전도를 할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을 잘 이해하기 위하여 그 문맥을 살펴보면, 요한복음 13장은 예수님께서 로마 군병들에게 체포되어 심문을 받기 위하여 12제자들과 작별하기 직전, 마지막으로 어느 다락방에서 최초의 성만찬을 베푸시며 말씀하시는 장면입니다. 식사 도중에 예수님께서 가롯 유다에게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27절)고 하자, 가롯 유다는 일어나 나가 버렸습니다(30절). 그가 나가는 모습을 보고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이 곧 눈 앞에 다가왔음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십자가의 참혹한 죽음을 ‘영광’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31절). 왜 영광이라고 하셨을까요?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죄인들을 구원할 수 있는 길은 오직 주님께서 세상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지 않고는 절대로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죽음 후에 하나님 아버지께서 능력으로 부활하게 하시고,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히셔서 영화롭게 하실 영광을 미리 내다보신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생활 강령인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하신 것이 십자가의 죽음을 피부로 느끼게 된 그런 긴장된 순간이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요한복음에 ‘사랑하라’는 말은 56번 나옵니다. 그 중 예수님의 마지막 고별 설교부터 부활하시기까지, 13장부터 21장 사이에 44번이 나온다는 사실은 주님께서 제자들을 떠나시면서 마지막으로 하고 싶었던 말씀의 핵심이 바로 ‘서로 사랑하라’ 였다는 것입니다.
지난 주일에 저는 구역교회 모임의 개론을 설명하면서, 구역교회가 활성화 되어야 할 이유를 말씀드렸습니다. 왜 여러분이 구역모임에 열심히 참석해야 하는지 세 가지 이유를 말씀드렸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다 사역자이기 때문이요, 구역모임이라야 참된 그리스도인의 교제가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이요, 교회에 주신 사명인 전도와 제자양육을 효과적으로 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오늘부터 네 주일에 걸쳐 성경이 말하는 보다 구체적인 구역교회의 특성, 구역모임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바로 그 첫째가 ‘서로 사랑하는 모임’이라는 것입니다. 즉 성경에서 말하는 사랑을 가장 잘 나타낼 수 있는 모임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교회를 다니면서 수없이 들어왔던 말씀입니다. 그런데 왜 제가 또 이 말씀을 선포해야 합니까? 그만큼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명령은 너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이 사랑보다 더 위대하고 아름다운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오늘날 같이 어렵고 힘든 삶의 고통이 우리를 짓누르는 때에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사랑입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34절) 하였습니다. 여기서 새 계명이라는 말씀은 처음 주어졌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미 오래 전에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처럼 하라”(레 19:18; 마 22:39) 하신 계명과 비교해 볼 때에 새 계명의 사랑에는 차이가 있다라는 말입니다. 사실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 하신 이 계명도 우리가 생각해 보면 참 어려운 일입니다. 우리 가운데 몇 사람이나 ‘나는 내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했다’ 말할 수 있을른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이 계명이 예수님께서 오늘 말씀하시는 계명과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구약의 계명은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 표준이 됩니다. ‘내 몸처럼’ 이라는 말씀에는 내가 나를 사랑하는 것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내가 나를 사랑하는 것이 남을 사랑하는 것의 척도가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새 계명은 주님의 사랑이 표준이 됩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시면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즉 훨씬 더 높은 수준의 사랑을 말합니다. 우리도 내주하시는 성령님을 의지하고 그렇게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를 향한 주님의 명령이요, 기대입니다. 그런 사랑을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사랑해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냥 이 말씀을 주신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죽음 이전 본문 앞에 나오는 실천하는 사랑의 예를 보여줍니다. 그리고는 십자가에 돌아가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일입니다(요 13:3-17). 즉 주님께서 가르쳐준 사랑은 힘들고, 아파하고, 더럽혀진, 곧 자기를 배신할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서 가장 더러운 곳이 발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14-15절) 하였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면 이런 사랑을 실천할 수 있을까요?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것입니다. 경험하는 것입니다. 천체 망원경으로 밤하늘을 관찰해 보면, 그냥 볼 때는 어렴풋한 별도 렌즈를 통해보면 눈 앞에 있는 듯 형체가 선명하게 보이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사랑도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이라는 렌즈를 통하여 볼 때 비로소 선명하게 보입니다. 십자가를 통해, 구원받을 가치가 없는 죄인을 용서하고 품어주신 하나님의 마음을 느끼게 되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우리를 위하여 죽게 하신 동기는 우리를 향한 사랑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매일 묵상하여야 합니다. 십자가보다 하나님의 사랑을 잘 보여주는 곳은 없습니다(롬 5:8). 바로 그 십자가의 죽음을 앞에 놓고 곧 자신을 배신할 제자들의 더러운 발을 손수 씻기시는 예수님을 상상해 보십시오. 이제 그들에게 곧 다가올 육체적 위기, 정신적 위기, 영적 위기의 때에 그들로 하여금 잘 견디게 할 수 있는 것은 돈도 아니고, 명예도 아니고, 권력도 아니고 오직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제자들로 하여금 살아 남게 할 수 있는 것은 사랑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목전에도 이 사랑 만이 우리를 붙들어주고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는 그런 상황이 이미 다가오지 않았습니까? 사랑의 진가는 어려울 때에야 비로서 드러나는 법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사랑을 소유하고, 그 사랑을 삶을 통하여 드러내며 살아가기 원한다면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마음에 품어야 합니다. 피상적으로만 이해할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경험해야만 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한 순간 사랑하다가 끝나 버리는 그런 사랑이 아닙니다. 한 번 마음을 주셨으면 끝까지, 변함없이 사랑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은혜를 힘입고 의지적으로 결단해야 합니다. 그 사랑에 감격하여, 그렇게 사랑하리라 결심해야 합니다. 그래야 감정적으로는 사랑할 수 없는, 아니 미운 대상까지도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여러분이 그처럼 서로 사랑한 결과가 무엇입니까? 35절에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 하였습니다. 한 공동체를 이룬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세상이 우리가 그리스도의 제자임을 알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서두에 언급한 터툴리안 교부의 말과 같이 말입니다. 또한 유명한 신학자였던 프란시스 쉐이퍼 박사는 ‘사랑’이 그리스도의 제자임을 나타내는 ‘제자의 배지’라는 말을 하였습니다.
실제로 세상 사람들은 우리가 기도를 열심히 한다고 하여서 우리를 그리스도의 제자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기도 역시 우리의 배지가 아닙니다. 성경을 통달하여, 성경 지식이 많아도 그것이 우리가 그리스도의 제자임을 대변해 주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지식도 우리의 배지가 아닙니다.
그들은 우리가 ‘서로’ 진실하게 사랑하는 모습을 보기 원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모든 것이 조건적이고, 이기적이기에 무조건적이고, 이타적인 사랑이 존재하는 가에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사랑을 나타내기 쉬운 작은 공동체인 구역교회에서 참으로 사랑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그들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참 제자라고 말할 것이며, 그들도 그런 사랑을 받기 원하여 우리가 전하는 복음에 마음의 문을 열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런 사랑은 전도의 문을 여는 유일한 열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가정에, 우리 이웃들에, 우리 사회에 아직도 전도의 문이 닫혀 있다면 우리가 이 사랑을 실천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초대교회들이 1세기-3세기에 걸쳐 세상을 바꾼 강력한 이유 중 하나는 불신자들이 그리스도인의 공동체 안에서 역동적인 사랑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행 2:47) 하는 역사가 어떻게 일어날 수 있었습니까? 지난 주일에도 말씀드렸듯이 그들이 날마다 집에 모여 떡을 떼고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믿음과 사랑의 교제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행 2:46). 가정 교회, 구역 모임 안에 있었던 진정한 사랑의 교제, 이것이 불신자들을 믿음의 교제 안에 끌어들인 힘이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경향가든 교우 여러분!
흔히 우리는 사랑을 간직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랑은 삶을 통하여, 생활 속에 나타나는 덕목입니다. 물론 사랑의 가장 본질적인 부분은 마음 속에 들어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일반적으로 사랑을 이야기 할 때에 무인도나 깊은 산속에서 홀로 수양하는 사람을 떠올리지 않듯, 사랑은 마음에 있어야 하는 것이지만 마음 안에서만 머물러서는 안되고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나타내 보여져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사랑이 진정으로 사랑이기 위하여서는 밖으로 표현되어야만 합니다. 대인관계 속에서 말입니다. 그런데 슬프게도 적지 않은 신자들이 그저 ‘하나님만 사랑하겠노라. 내 마음에 가득 하나님 사랑을 채우리라’는 미명 아래 자신 속으로만 침잠하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사랑은 언제나 삶을 통하여 확증됩니다. 삶을 보면 그 사람의 사랑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은 그 사랑의 대상,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에게만 한정되어 있을 수 없습니다. 마치 한 사람을 깊이 사랑하면, 그 사람이 사랑하는 모든 것들도 사랑하게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요일 4:20) 하였습니다. 이처럼 우리도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면 주님께서 피 흘리기까지 사랑하신 교회를, 성도를, 이웃을, 구역 식구들을 사랑할 수 밖에 없습니다. 서로 사랑하는 모임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 13:1-3)!
무슨 말씀입니까? 우리가 가진 평범한 생각은 사랑에 대해서 많은 말을 하고,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고, 산을 옮길만한 놀라운 믿음이 있으며, 다른 사람들을 많이 구제하고, 심지어 자신을 불사르게 내어 주기까지 하는 사람이라면, 그의 안에 사랑이라는 것이 기본적으로 내재되어 있을 것이라고 가정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 없이도 그렇게 할 수 있다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랑에 대하여 말하는 것과 사랑 자체는 엄청난 차이가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이유는 사랑에 대하여 말하는 데에는 희생이 들지 않지만, 사랑을 실천하는 데에는 희생이 필요합니다. 사랑을 제대로 모르는 사람은 사랑을 달짝지근한 연애 감정이라고 생각하지만, 진정한 사랑을 아는 사람은 살을 에고 뼈를 깎는 것 같은 희생임을 압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도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요일 3:18) 라고 촉구하였던 것입니다. 즉 추상명사인 사랑을 역동적인 동사로 표현하자면 ‘감당하다, 내어주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육체는 물론 마음까지 잡혀주는 것, 상처 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미움, 다툼, 지겨움, 원망 등 모든 것을 치러내고 감당하는 것이 사랑이 아니겠습니까?
또한 성령의 은사인 방언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을 뿐 아니라 그저 소리만 크게 나는 꽹과리라고 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은사인데도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될 수 있다라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다면 말입니다. 그리고 성령으로부터 받은 예언하는 능이 있고, 하나님의 비밀스러운 경륜과 놀라운 지식을 소유하게 되었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합니다. 사랑이 없으면 그것이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아무 영향을 미치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있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그것도 아무것도 아니라고 합니다. 어떤 은사보다도 사랑이 더 큰 것은 참 신앙은 그저 말씀에 대한 맹목적, 기계적 복종이 아니라 인격적 반응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랑이 회복되면 부흥이 찾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가정에서, 구역에서, 교회에서 사랑이 회복이 되면 가정에 부흥이 오고, 구역에도 부흥이, 교회 전체에도 부흥이 임하게 되어 있습니다(참고- 사 58:12).
사실 사랑과 믿음은 따로 역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함께 역사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되었고, 그 분을 믿게 되었다’ 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주님의 사랑에 눈을 떴다는 것입니다. 올해도 성탄절이 다가옵니다. 성탄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으로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이 아닙니까? 왜? 우리를 그토록 사랑하셔서 말입니다. 만약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진정한 감화, 감동이 없이 예수 그리스도가 구세주이신 것을 믿을 수 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왜냐하면 그 분은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께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경험하셨다면, 아니 매일 예수님의 십자가를 묵상할 수 있다면 여러분은 그 사랑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내주하시는 성령님께서 도우셔서 사랑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비록 200여명이 되는 교인 전체를 그렇게 더러운 발을 씻기고, 품에 감싸는 사랑을 하지 못해도, 적어도 구역 가족들, 여러분의 식구들은 그렇게 사랑할 수 있습니다. 첫 단계는 관심입니다. 관심을 보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더 구체적인 적용 부분은 다음 주일에 말씀드리겠습니다.
“서로 사랑하라 이로써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늘 깊이 마음에 새기시면서, 사랑함으로 각 가정과 구역이 참된 사랑의 모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교회가 참된 사랑의 모임이 되기를 바랍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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