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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 태일 목사
작성일 2010-05-25 (화) 03:57
분 류 주일설교
ㆍ조회: 1876    
[5/23/10]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요한복음 3:16)
하나님은 인간들을 사랑으로 만드셨고 많은 자유를 주셨지만 우리 인간들은 거짓말장이요 살인자요 범죄자인 마귀에게 속아서 마귀의 자식으로 입양이 되어 버렸습니다. 즉 아담과 하와가 그랬던 것처럼 우리 인간들은 멸망의 자식이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잃어버린 자녀를 찾기 시작한 것입니다. 얼마든지 우리 인간을 포기하실 수도 있었으나 엄청난 계획을 세우시고 우리 인간들을 구원하여 다시금 자신의 아들들로 만들려고 하셨습니다.
이 구원계획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신 분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자신이 직접 인간이 되셔서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을 전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죄 값을 대신 치르기 위하여 마귀에게 자신을 내어주셔서 마귀가 마음대로 자기를 고통스럽게 하고 조롱하며 때리고, 나중에는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도록 하였습니다.
우리들이 구원 받은 것은 오직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셨기에 스스로 독생자를 희생시키기로 결정하신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을 믿지 않았고 인정하지도 않았으며 그 동안에 지은 죄 값이 너무나 컷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를 대신하여 죽음으로 말미암아 다 해결하셨습니다.

복음, 좋은 소식은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입니다. 하나 밖에 없는 하나님의 아들을 우리들을 위하여 내어주신, 십자가에 못 박혀 죽도록 하신 사랑입니다. 그 생명, 목숨을 허락하신 사랑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얼마나 가치가 있는 사람인지 하나님의 아들이 나를 위하여 죽어주신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우리는 참으로 엄청난 사랑을 받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여기 ‘이처럼’ 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수준의 엄청난 사랑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엄청난 사랑의 내용은 그의 외아들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을 기록한 사도 요한은 요한 서신에서도 이 사랑을 설명할 때에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요일 4:9-10)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또 다른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가장 아끼시고 사랑하시며 온 우주보다 더 존귀한 아들이신데 우리를 대신해서 희생시키기로 결정하신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도 없는 것이고, 도저히 상상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정말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셨습니다. 어느 정도로 사랑하셨는가 하면 하나님 자신의 생명만큼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물론 사람이 자기가 만든 작품을 자기 생명처럼 사랑하고 아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비유적인 표현이지 정말 자기 작품을 대신해서 죽을 수 있다는 뜻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정말 그렇게 자기 생명만큼 사랑하셨습니다.
본문에 ‘세상을 사랑하사’ 하신 것은 모든 인간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구원하시는데 아무 차별을 하지 않기로 하였습니다. 부자나 가난한 자나, 배운 자나 못 배운 자나, 남자나 여자나, 백인이나 흑인이나 동양인이나 아무도 차별하지 않으신다는 말입니다. 즉 모든 인간이 구원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다만 한 가지 조건을 요구하셨습니다. 그것은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며 내 죄를 위하여 대신 죽으셨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삼일 만에 살아나셔서 승천하셨는데 그 분을 주인으로 마음에 모시는 것입니다. 나는 스스로 구원할 수 없는 죄인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이 복음을 믿고, 나 자신은 오직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고칠 것은 고치시고 바로 잡을 것은 바로 잡으셔서 새 사람이 되게 하실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요구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그대로 받는 겸손과 믿음입니다. 아 멘!

본문의 멸망이라는 뜻을 사라져 없어지는 것으로 해석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살다가 죽으면 그만이지 하고 별 것 아닌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멸망은 그렇게 죽으면 없어지는 단순한 현상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영원한 형벌을 받는 지옥의 고통을 의미하는 소름 끼치는 현실(reality)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저희는 영벌(eternal punishment)에, 의인들은 영생(eternal life)에 들어가리라”(마 25:46)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믿는 자들에게는 훗날 우리를 영원한 천국에서 살도록 하실 뿐 아니라, 이 세상에서도 믿기 전 어둠 속에 살아가는 우리를 먼저 찾아오셔서 빛으로 인도하셨을 뿐 아니라, 자녀로 삼으시고 끝까지 사랑한다고 하십니다.
처음 사람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여 죄를 짓고 에덴 동산을 떠나 하나님을 피하여 숨어 지낼 때, 그들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찾으시고 부르셨던 하나님이셨습니다. 벌거벗어 서로 부끄러운 줄 알 때에 동물을 죽여 가죽옷으로 수치스러운 부분들을 가려주셨던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이 상징하는 것은 구약의 백성들이 절기 때마다 짐승을 제사장들에게 성소에 가져와 제사장이 그 짐승을 죽여 그 피를 제단에 뿌림으로 백성들의 죄를 일시적으로나마 사함을 입도록 하시는 것으로 이어지고, 이 짐승의 피는 신약에 오실 메시아의 죽음, 예수님의 보혈을 예표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비참하게 십자가에 돌아가심으로 희생제물이 되셔서 인간들로 하여금 죄 사함을 입고 영원히 살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이러한 아가페의 사랑과 비슷한 사랑들이 이 세상에 있는데 성경은 세 가지를 더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먼저 여러분들이 잘 아는 남녀간의 사랑인 에로스 사랑입니다. 아가서의 솔로몬 왕과 술람미 여인과의 사랑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물론 세상에서 유행하는 대부분의 노래나 소설이 이 에로스 사랑을 그 주제로 하고 있습니다. 아마 이 세상에 남녀간의 사랑의 감정이 없었더라면 노래도, 소설도, 예술도 없었을 것입니다. 이런 남녀간의 에로스 사랑이 아가페 사랑과 비슷한 점은 자기 껍질을 깨고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는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처음에 푹 빠져있을 때에는 정말 완전히 상대방에게 헌신합니다. 목숨까지 바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아가페 사랑과 다른 것은 시간이 흐를수록 이기적인 모습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가만히 살펴보면 조건적인 사랑입니다. 상대방의 약점, 실패, 부정 등을 잘 용납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나중에 남남이 아니면, 원수가 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두번째는 친구 간의 우정을 가리키는 필레오 사랑입니다. 특히 10대와 20대 초반의 친구들이 나누는 사랑은 아가페 사랑과 비슷한 감정으로 서로의 정을 나눕니다. 정말 다 줄 것 같습니다. 친구를 위해서 라면 목숨까지 바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필레오 사랑도 오래가지 못합니다. 30대, 40대를 지나면서 점점 식어집니다. 더군다나 믿었던 친구가 배신을 하게 되면 용서하지 못합니다. 내가 네게 어떻게 해 주었는데, 네가 이럴 수 있느냐는 식입니다. 즉 필레오도 조건적인 사랑입니다.
세번째는 부모가 자식을 향한 사랑을 가리키는 스톨게 사랑입니다. 아마 그래도 아가페 사랑과 가장 비슷한 사랑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된 성도들을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자녀가 되었음을 강조합니다. 일반적으로 참 부모라면 자식을 위하여 다 내어주는 희생적인 사랑이 있습니다. 부모가 자식을 위한 아름다운 사랑이야기는 우리 주위에도 많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부모의 스톨게 사랑에 빗대어 하물며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일까 보냐’라는 표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이 스톨게의 사랑도 아가페의 사랑과는차이가 있습니다. 우리 부모들의 자식을 향한 사랑과 하나님 아버지의 우리들에 대한 사랑에도 차이가 많다는 말씀입니다. 우리 부모님들 솔직히 말씀해 보십시오. 자식들을 위하여 목숨까지 내 줄 수 있다고 자신 있게 이야기하실 분은 많다고 믿습니다. 그 말이 진실이라고 믿습니다. 그런데 아가페 사랑처럼 우리 부모들이 정말 아무런 바람이 없이, 아무런 조건이 없이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 변함없이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무의식 속에라도 무언가 자녀들에게 바라는 것들이 있지 않습니까? ‘내 자식인데, 내가 어떻게 키운 자식인데 적어도 이래야 하지 않나’라는 기대가 전혀 없으신 부모가 있습니까? 자녀들이 여러분의 기대에 어긋나더라도 지속적으로 온전히 희생하며, 완전한 사랑을 하실 수 있으십니까? 그럴 수 없으니까 종종 실망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들에게는 그런 완전한 사랑을 할 능력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하나님의 은혜로, 성령의 은혜로 아가페 사랑으로 사랑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은 어떠합니까? 변함없이 지속적으로 무조건적인 사랑을 베푸십니다. 이 사랑은 “오래 참고 온유하고 투기하지 않고 자랑하지 않고 교만하지 않고 무례히 행치 않고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않고 성내지 않고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고 불의를 기뻐하지 않고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는 사랑”(고전 13:4-7)입니다. 앞에 열거한 에로스 사랑이나 필레오 사랑, 스톨게 사랑과의 차이를 잘 보여주고 있는 구절이 아닙니까? 그러니 이 얼마나 위대한 하나님의 사랑입니까?

특히 오늘 본문에도 나타난 이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은 인격적인 사랑입니다. 무례하지 않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라고 하였습니다. 억지로, 강제적으로 사랑하시는 분은 아닙니다. 사랑을 나타내 보여주시고, 그 사랑을 받아들이도록 권하실 뿐입니다. 우리 인간의 인격을 존중하시기에 내가 받지 않겠다, 싫다 하면 그것을 존중하여 그냥 두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계 3:20)고 하셨습니다. 전능하신 주님께서 얼마든지 강제적으로 사람의 마음 문을 열고 들어가실 수 있는 능력이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이 놀라운 사랑, 무조건적인 완전한 사랑에 대하여 믿고 마음을 열어 받아들이는 사람들에 한하여 자녀를 삼으시고, 영원토록 함께 하시며 지속적으로 사랑하십니다. 독생자를 주신 사랑이기에 그의 자녀된 우리를 위하여 모든 것, 가장 귀한 것을 필요에 따라, 주님의 뜻에 따라 허락하시는 분이십니다. 바울은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롬 8:32)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본문 말씀처럼 누구든지 겸손히 믿기만 하면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누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해당이 되지 않기에 개혁주의 신학자들이 예수님의 대속의 죽음을 제한적인 속죄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그 속죄의 효과가 결과적으로 믿는 자들에게 제한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경향가든 교우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 아직도 우리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하신 분들이 있습니까? 이 시간이라도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영으로 오늘도 이 자리에서 여러분의 마음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여러분의 마음에 들어가셔서 영원토록 교제하시며 지속적으로 아가페 사랑으로 사랑하시기 원하십니다. 그리고 성령을 부어주십니다. 이 놀라운 사랑을 체험하도록 말입니다.
아니, 이미 이 사랑을 경험하신 여러분!
여러분은 그 사랑을 얼마나 깨달아 알고, 체험하며 그 사랑을 누리고 사십니까? 성경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롬 5:5)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부은 바 되었다는 말은 소낙비처럼 퍼부었다는 뜻입니다. 호우가 쏟아지면 온 세상이 물바다가 되듯이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사랑을 부어주셔서 우리 마음이 사랑 바다가 되게 하셨습니다. 세상 사람들도 누군가에게 사랑 받고 있다고 느낄 때에 힘을 낸다고 하는데, 하물며 하나님으로부터 이 놀라운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을 느낄 때 얼마나 큰 힘이 날까요? 이 세상 그 어떤 것보다도 넓고, 길고, 높고, 깊은 사랑의 체험을 오늘도 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요즘처럼 세상 살기가 너무도 힘들 때에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눈을 뜨면 새로운 걱정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고, 모든 게 잘 된다 싶어도 여전히 마음 한 구석에 불안감이 있고, 점점 나이 들어가면서 육체가 쇠약함을 느끼며 서러움에 사무칠 때도 있고, 그렇게 사랑을 쏟아 키운 자식들이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을 볼 때 허무감을 느끼지 않습니까? 이 인생의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갈 때에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이, 인생의 무거운 십자가를 가볍게 질 수 있는 비결은 이 무조건적이며 완전한 하나님의 사랑을, 십자가를 체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을 깊이 들여 마십시오. 바위처럼 무거운 인생의 짐도 작은 조약돌을 든 것처럼 가볍게 느껴질 수 있을 것입니다. 추하고 못난, 연약한 나를 창조주이시며 전능하신 하나님이 이처럼 사랑하셨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마다 세상이 작게 보이고, 삶의 어려운 문제들도 작아 보일 줄로 믿습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을 결코 잊어보신 적도 없고, 한번도 떠나보신 적도 없습니다. 여러분이 아파할 때에 사실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서 더 마음 아파하시는 분이십니다. 이 아가페의 사랑을 느끼고 살 때 우리 입에서는 찬송이 나오고 감사가 절로 나올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게 되고, 그의 말씀을 순종하며 주님의 몸된 교회도 사랑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그 사랑에 감격하여, 조금이라도 보답하고자 나의 모든 것 다 바쳐 주님을 섬기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 모든 것 다 드려도 하나도 아깝게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여러분의 사랑의 반응을 기뻐하셔서 축복하실 것은 물론이구요.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을 지속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은혜가 여러분의 삶에 풍성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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