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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태일 목사
작성일 2010-03-01 (월) 09:16
분 류 주일설교
ㆍ조회: 1816    
[2/28/10] 예수님을 증거하는 자는(1)
예수님을 증거하는 자는(1) (요 1:19-28)
좋은 것을 본 사람은, 좋은 것을 소유한 사람은 그것을 자랑할 수 밖에 없습니다. 더군다나 미래의 소망이, 주님을 만날 그 나라에 대한 소망이 확실한 사람은 그것을 증거할 수 밖에 없습니다. 참 빛이신 예수님을 본 사람, 예수님을 경험한 사람,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그 빛에 대하여 증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증거하는 것이 주님 보시기에 합당할까요? 오늘 본문이 그 답을 주고 있습니다.

구약 성경이 끝난 이후 하나님의 능력의 종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 말라기 이후로 무려 400년 동안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말씀을 선포하는 주님의 사자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어두웠던 시기였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살 수 있는데, 그 말씀을 듣지 못하니까 모두 병들어가고 나라도 망해버렸습니다.
그런데 약 400년이 지난 후 갑자기 세례 요한이 나타나 유다 광야에서 설교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세례 요한 하면 많은 신자들의 머리 속에는 바른 말을 선포하다가 헤롯 왕의 아내 헤로디아가 딸 살로메를 시켜서 인하여 목이 잘려 죽은 비극적인 선지자의 모습으로 떠올리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를 가리켜 “여자가 낳은 자 중에서 가장 큰 자”(마 11:11)라고 극찬하였습니다.
세례 요한이 세상에 등장한 때는 우리 예수님께서 사역을 시작하기 바로 직전이었습니다. 물론 태어나기도 예수님보다 6개월 전에 태어났습니다. 이 세례 요한이 유다 광야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자 유대인들의 반응은 대단하였습니다. 열광적으로 반응하며 수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나아와 세례를 받았습니다.
유대인들은 한걸음 더 나아가 혹시 그가 메시아가 아닐까 하는 기대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그것도 한 두 사람이 아니라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기대를 하게 되자, 유대인들을 대표하는 산헤드린 공의회에서 예루살렘 성전의 제사장들과 성전에서 봉사하며 질서를 유지하는 레위인들을 보내어 공식적으로 세례 요한에게 ‘당신이 그리스도냐?’하는 질문을 하게 되었습니다(19절). 그러자 요한은 떳떳하게 드러내어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답합니다(20절). 그들은 또 묻습니다. “그러면 무엇, 네가 엘리야냐?”(21절상) 이 질문은 성경적 근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구약성경 마지막에“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말 4:5) 하였기 때문입니다. 세례 요한은 이번에도 아니라고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 세례 요한이 엘리야라고 했습니다(마 11:14). 세례 요한은 왜 자신이 엘리야가 아니라고 그랬을까요? 사실 유대인들 사이에서 엘리야는 환상적인 존재였습니다. 구약에서 죽음을 보지 않고 승천한 사람이 둘이 있는데, 하나는 에녹이고 다른 하나는 엘리야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말라기서 예언의 성취로 엘리야가 다시 올 때에는 하늘에서 재림하듯이 찬란하게 임하여서, 메시아를 맞을 백성들을 준비시키고, 메시아가 오면 그에게 기름을 부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세례 요한은 약대 털옷을 입고 메뚜기와 야생꿀을 먹으며 사는 초라한 존재로서(막 1:6) 그들이 그렇게 환상적으로 기다리는 엘리야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자 그들이 또 묻습니다. “네가 그 선지자냐”(21절하) 이 질문 또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중 네 형제 중에서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너를 위하여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를 들을지니라”(신 18:15)고 하신 말씀을 기억하고,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세례 요한이 아닌가 하고 묻는 것입니다. 사실 마지막 선지자라고 할 수 있는 세례 요한이지만, 스스로 아니라고 또 대답합니다.
물론 요한복음을 기록한 사도 요한은 이미 1장 6-8절에서 독자들을 향하여 세례 요한이 누구인지 설명하였습니다. 그는 참 빛이 아니고, 그 빛에 대하여 증거하러 온 자로서 자신을 통하여 사람들이 빛을 받아들이도록 하기 위하여 보냄을 받은 자라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당시 산헤드린 공의회 바리새인들이나 사두개인들과 같은 유대종교 지도자들로부터 유대 사회에 엄청난 영향을 끼치고 있는 세례 요한이 도대체 누군가 알기 위하여 보냄을 받은 자들은 돌아가서 그들에게 세례 요한이 누구인지 무엇이라고 대답해야 하느냐고 물으니(22절), 그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을 가지고 자신을 소개합니다(23절). “외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하라”(사 40:3)는 말씀을 인용합니다. 이 말씀은 유다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오는 것을 예언하는 말씀으로, 포로로 잡혀 갔다가 그 백성들이 고향으로 돌아올 때 하나님의 사자가 와서 길을 예비하여 ‘이 길로 오라’고 외치면서 백성들을 인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례 요한 자기 자신은 그리스도, 즉 메시아를 안내하는 자로서 그의 길을 준비하는 소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여 사람들의 마음을 준비시켜서 예수님을 맞이할 수 있도록 준비시키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의 사역에서 가장 특이한 것은 회개하는 사람들에게 물세례를 주는 것이었습니다. 구약시대부터 그 때까지 이런 세례를 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이름조차 세례 요한이 되었습니다. 자신이 그리스도도 아니고, 엘리야도 아니고, 그 선지자도 아니라고 하면서 왜 세례를 주느냐고 저들이 묻자(25절), “요한이 대답하되 나는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너희 가운데 너희가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이 섰으니 곧 내 뒤에 오시는 그이라 나는 그의 신들메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26-27절)고 하였습니다.
구약 시대에는 세례라는 의식 대신에 결례식이라는 정결의식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죄를 지었던 사람이 죄를 자복하고 속죄제물을 드린 후 제사장이 우슬초라는 풀에 물을 찍어 뿌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제물이 없이 누구든지 죄를 자복하고 나오는 자를 물 속에 집어 넣어서 잠그는 의식을 행한 것입니다. 이것은 율법에도 없는 것이고 누가 하라고 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유다 백성들에게는 죄에 대한 도전이었습니다. 즉 죄를 해결하려면 짐승을 태우거나 물을 뿌려가지고는 안되고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자신을 물 속에 집어 넣어서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결단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세례 요한은 이것 자체도 완전한 것이 아니고 뒤에 이루어질 성령 세례의 전 단계임을 분명히 했습니다(33절).
그리고는 자기는 뒤에 오시는 그리스도의 신 끈도 풀거나 묶을 수도 없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당시 가장 천한 종이 하는 일, 주인의 신발끈을 풀거나 묶는 일조차도 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사랑하는 경향가든 교우 여러분!
태어날 때부터 성령충만했던 사람이 세례 요한이었습니다(눅 1:15). 앞서 언급하였듯이 예수님도 그를 여인의 뱃 속에서 태어난 자 가운데 가장 뛰어난 자라고 극찬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사실 유대인들의 대표자들이 찾아와서 누구냐고 물을 때에 그리스도는 아니라고 해도, 자신이 엘리야나, 그 선지자라고 충분히 말할 수 있는 세례 요한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철저히 자신을 낮추며 그저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다, ‘주님의 천한 종도 되지 못한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소리라고 하는 것은 잠깐 들리다가 없어지고 마는 바람과 같은 것입니다. 나팔이 울리면서 왕이 나타나면 아무도 나팔을 부는 신하에게 주목하지 않습니다. 모두들 왕만 환영하면서 무릎을 꿇게 됩니다. 이처럼 세례 요한은 하나님되신 예수님 앞에서 자신은 한 번 울리고 사라지는 나팔 소리처럼 여겼던 것입니다. 소리가 있기 전에 말씀이 있었고, 나는 다만 그 말씀을 증거하는 소리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자꾸만 사람들이 자기를 주목하니까 나를 주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1장 6-8절 강해에서도 말씀드렸듯이, 참 빛되신 예수님 앞에서 자신은 될 수 있으면 보이지 않아야 되고, 될 수 있으면 작아져서 나중에는 기억조차 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러한 비슷한 예가 사도행전 3장에서 베드로가 성전 미문에 앉아 있는 앉은뱅이를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고쳐주었을 때 베드로의 모습에서도 나타납니다. 성전 미문 앞 많은 사람들 앞에서 기적을 행한 베드로를 사람들이 칭송합니다. 베드로를 주목합니다. 그랬더니 베드로가 백성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기이히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행 3:12)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증거하면서 모든 이목을 주님에게로 돌립니다. 그리고는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으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행 3:16)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고치셨다는 것입니다. 내가 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이름의 능력이 나타나서 고쳤다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초대교회에 하나님의 능력이 강하게 역사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아무리 사도들이 유명해도, 그들은 겸손히 자신들이 죽고 예수의 이름의 능력만 나타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 자신을 부인해야 할 이유가 또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이름을 드러내면 능력이 사라져 버립니다. 우리는 죽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만 내세우면 그 이름의 능력이 사람을 고치고, 살리기도 하며, 마귀를 멸하는 줄로 믿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참 빛이신 예수님을 증거하는 자는 철저히 낮아져야 합니다. 자신이 죽어져야 합니다. 나를 잊어버려야 합니다. 우리가 좋아하는 것이든, 좋아하지 않는 것이든, 우리가 필요한 것이든,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이든, 우리의 자유시간이든 일하는 시간이든, 우리의 야망까지도 내려놓아야 합니다. 다만 우리를 통하여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볼 수 있도록 할 뿐입니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께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믿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세례 요한이 어떻게 그토록 낮아질 수 있었을까요? 지난 주일에 앞선 14-18절을 살펴보면서 말씀드렸듯이 독생자의 영광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감히 인간이 하나님과 자신을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세례 요한은 인간이었습니다. 그야말로 한 줌의 흙에 지나지 않는 죄인이었습니다. 비록 자기와 나이가 비슷한 청년 예수를 아무것도 모르고 바라보았다면 막연히 같은 입장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에게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자 자기는 무릎을 꿇고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돌아간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도 마찬가지였구요.
우리 자신들을 돌아봅시다. 우리 교회에는 그런 사람들이 별로 많이 있는 것 같지 않습니다만, 이상하게 오래 예수를 믿은 사람들 가운데, 내로라 하고 주님의 일을 한다고 하는 사람들 가운데 교만한 자들이 많습니다. 자기를 너무 추켜세워 사람들이 독생하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를 볼 수 없도록 앞을 가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유는 그들이 예수님한테서 하나님의 영광을 희미하게 보고 있든지, 아니면 전혀 보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주로 고백하는 자라면 그럴 수가 없지요.
그러므로 내가 어떤 존재였던가, 그런데 그 크신 하나님의 은혜로 지금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그 독생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본다면 우리도 세례 요한처럼, 베드로처럼 철저히 낮아져서 예수님만 나타내며 증거할 수 있습니다. 세례 요한처럼, 베드로처럼 주님 부르시는 그 날까지 충성할 수 있습니다. 비록 목이 잘린다 하더라도,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는다 하더라도 말입니다. 아니 이 세상에서 그 어떤 모욕과 수치를 당할지라도 조금도 부끄러워하거나 주저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만 드러낸다면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얼마나 좋은지 안다면, 주님과 함께 하는 삶이 얼마나 좋은지 안다면, 저 하늘나라가 얼마나 좋은지 안다면 그 무엇도 부끄러워하거나 두려워하지 않고 증거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어떤 교회가 능력이 있는 교회입니까? 예수 이름을 높이는 교회가 능력있는 교회입니다. 예수 이름을 높이는 교회만이 그 능력이 나타나서 역사하는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교회의 모든 사역 가운데 항상 예수님의 이름만 나타나고, 우리 인간의 이름은 사라지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도구에 불과합니다. 누가 그것을 연주하고 있느냐? 누가 그것을 주관하고 있느냐? 만약 우리 주님께서 연주하고 계시고, 주관하고 계시다면 교회는 반드시 권능이 나타나게 되어있습니다. 그 주님에게 초점을 맞추고, 항상 예수님에게 주목하고, 예수의 이름으로 나아가서, 예수의 이름으로 마귀를 물리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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