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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 태일 목사
작성일 2009-08-10 (월) 23:28
분 류 주일설교
ㆍ조회: 2002    
[8/9/09] 전도는 . . .
전도는 . . . (사도행전 26:1-23)
어느 인생이든 다 드라마가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의 과거를 들으면 한편의 소설과도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에게 꼭 있어야 할 드라마가 있습니다. 바로 주님을 만난 이야기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꼭 들려주어 할 이야기입니다. 믿는 사람에게 이 이야기가 없다고 한다면 정말 믿는지 의심스럽습니다.
전도는 다른 것이 아니고 바로 내가 만난 주님에 대하여 이야기해 주는 것입니다. 나의 삶 가운데 역사하신 주님에 대한 간증이라고도 하지요. 어쩌면 그래서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말이 많다고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내가 만난 주님에 대하여, 교회에 대하여, 목사님에 대하여, 성도들에 대하여 이야기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것 때문에 말입니다. 사실 간증이 풍성한 사람은 믿음이 확실한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이 내 자신의 이야기를 듣고 감동을 받고, 도전을 받고, 소망을 갖게 된다면 얼마나 귀한 주님의 일꾼입니까?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살아계신 것과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위하여 돌아가신 것을 믿지만, 이것을 다른 사람에게 눈에 보이는 어떤 것으로도 증명해 보일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일은 우리가 만난 하나님에 대하여, 예수님에 대하여 이야기해 주면 됩니다. 그 사람이 믿고, 안 믿고는 하나님께서, 성령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도한 사람이 금방 예수를 믿지 않는다고 해서 실망하거나, 자신감을 잃을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만난 주님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데 어느 누가 시비를 걸겠습니까? 그 영혼에 대한 사랑으로 안타까워 하며 기도할 뿐입니다.

오늘 본문은 사도 바울이 새 총독으로 부임한 베스도에게 가이사랴에 인사차 찾아온 아그립바 분봉왕과 버니게, 그리고 총독을 비롯한 로마와 유다의 귀족들 앞에서(23:23) 당당하게 자신이 만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이야기를, 간증을 하는 내용입니다. 지난 주일에 살펴보았듯이 2년 넘게 끌어온 바울의 재판은 바울이 가이사 황제에게 호소하였기에 그를 로마 황제에게 보내는 일을 결정한 것 외에는 아무런 결론도 내리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이제 베스도 총독은 바울을 로마 황제 앞으로 보내야 하는데, 그 명분이 뚜렷하지 못하여 고민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 와중에 며칠 지나 아그립바 왕과 버니게가 총독에게 문안하러 가이사랴를 방문한 것입니다(23:13). 여기 아그립바 왕은 유명한 헤롯 대왕의 증손자인, 헤롯 아그립바 1세의 아들이며, 벨릭스의 아내였던 드루실라의 오빠인 헤롯 아그립바 2세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버니게는 드루실라의 언니, 즉 또 다른 누이동생입니다. 신약성경을 보면 이 헤롯 집안은 대대로 유다를 다스리면서 하나님 나라를 대적하였음을 알게 됩니다. 할아버지 헤롯 대왕은 예수님께서 태어나실 때에 온 유대 땅에 2살 이하의 남자는 다 죽이라고 명했던 사람이며(마 2:1-16), 그의 아들 헤롯 안디바는 갈릴리 분봉왕으로 있으면서 세례 요한의 목을 베었습니다(마 14:6-11). 그리고 어떻게 해서든지 예수님을 만나보려고 했는데,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체포되었을 때 잠시 만났으나(마 23:7-12), 다시 빌라도에게로 보내어 십자가에 처형당하게 하였습니다. 그의 아들 헤롯 아그립바 1세는 야고보 사도를 죽였으며(행 12:1-2), 사도 베드로를 죽이려고 했었다가 백성들이 그의 설교가 하나님의 소리라고 외치자 그것을 듣고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아 벌레가 창자를 뜯어 먹어 죽고 말았던 사람입니다(행 12:20-23). 이 아버지가 죽을 때 아들 아그립바가 17살 밖에 되지 않아 로마 황제는 유다를 맡기지 못했습니다. 대신 북쪽의 작은 지역을 맡기는 분봉왕으로 임명하고 유다는 총독이 다스리게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로마 황제는 그에게 성전을 관리하는 일과 대제사장을 임명하는 일을 맡겼기 때문에 유대 사회에는 상당한 영향력이 있었습니다.
이 아그립바 왕에게 베스도 총독이 바울에 대한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자 아그립바가 직접 바울의 말을 들어보겠다고 청하여 다음 날 청문회 형식으로 바울을 심문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유는 황제에게 상소할 재료를 얻기 위함이었습니다(25:26). 여태까지 심문해 보았지만 그에게서 어떤 죽일 죄를 발견하지 못했기에, 아무런 죄목이 없이 황제에게 보낼 수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분봉왕 아그립바의 심문이 시작되자, 바울은 그곳에 모인 고관들 앞에서 예의 있게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2-3절). 예의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 수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벧전 3:15) 하였는데, 여기 두려움이라는 헬라어 원어의 정확한 뜻은 ‘존중하면서, 예의를 갖추고’ 입니다. 일단 예의가 있는 사람은 상대방에게 호감을 받게 되고 인정을 받습니다. 그러나 예의가 없는 사람은 무례한 사람이요, 인간적으로 덜 성숙한 사람으로,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사람으로 낙인찍히고 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도 중요하지만, 적어도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예의를 지키고 그 사람의 인격을 존중하는 법부터 배워야 합니다. 이것이 전도의 첫 시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예의 바르고 공손하게 다가와서 전하는 사람의 말을 듣고자 할 것입니다. 반면에 예의 없고 오만불손한 사람의 말은 모두 들으려고 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 사람과 마주치는 것조차 피하려고 할 것입니다.
바울은 이미 9장, 22장에서 간증한 이야기를 지금 유대교와 그 풍속을 잘 알고있던 아그립바 왕 앞에서 또 합니다. 우선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자신이 어떤 사람이었는가를 말합니다(4-12절). 자신도 여기 앉아 있는 유대인들과 다를 바 없는 평범한 사람이었지만, 다른 사람들의 인정을 받기 위하여 열심히 노력하던 유대인이었다는 말입니다. 최고의 엘리트 길을 가기 위하여 가장 엄한 파인 바리새파 중에서도 가말리엘의 문하생이었다는 것입니다. 정말 열성적으로 유대교를 신봉했다고 합니다(9-12절).
그런데 자신이 유대교의 엘리트로서 배운 바에 의하면 우리 유대인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과 소망이 있다는 것입니다(6-7절). 아마 로마 총독 앞에 함께 있는 유대인들이 긴장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생각하고 있는 유대인들의 소망은 로마 제국으로부터 독립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하나님이 유대인들에게 주신 약속과 소망은 독립이 아니라 죽은 후에 부활이라는 것입니다(8절). 부활 후의 진정한 기쁨과 축복의 삶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자신이 예수님을 만난 체험을 이야기합니다. 사도 바울을 완전히 극적으로 바꾸어 놓은 일생 일대의 큰 사건입니다(13-14절).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하는 일에 앞장서는 열심으로 대제사장들에게 권세와 위임을 받고 다메섹으로 가던 도중의 일입니다. 정오의 태양빛이 얼마나 강합니까? 그런데 그것보다도 더 강한 빛을 보았습니다. 그 빛은 한 사람으로부터 나오는 빛이었습니다. 그는 히브리 방언으로 바울의 옛 이름인 사울을 부르면서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고 묻습니다. 아니 하나님께서 나타나신다면 자기를 칭찬해줄 줄 알았는데, 왜 나를 핍박하느냐고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시냐고 물었더니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고 대답하십니다. 이 순간 자신이 철저히 옳다고 믿어왔고 지켜왔던 모든 것들이 한 순간에 다 거꾸러지고 맙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만났을 때에 놀라는 것은 모든 것이 내가 생각해 오던 것과 틀리더라는, 다르더라는 말입니다. 전에는 옳은 줄 알았던 것들이 이제는 틀렸고, 전에는 성공인 줄 알았던 것이 실패라는 말입니다. 전에 믿고 있었던 것들이 다 진리가 아니더라는 말입니다. 주님의 빛 앞에서 내 자아가 죽어지는 것이었습니다. 내 교만과 고집이 꺾어지는 순간이었습니다. 사고방식이 완전히 바뀌는 것이었습니다. 삶의 방향이 바뀌는 것이었습니다. 허무했던 인생의 의미를 찾는 순간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의 바울은 어느 누가 보아도 잘 나가는 엘리트였으며, 성공한 지식인이었습니다. 그런 바울이 지금 예수님 앞에서는 가장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불효자였으며, 가장 고약하고 사나운 하나님의 대적자에 불과했습니다. “가시채를 뒷발질 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14절하)는 말씀은, 농사를 지을 때 소가 앞으로 가야 밭을 갈 수 있는데 일하기 싫어서 자꾸 뒷걸음질하려고 합니다. 그러면 주인이 소가 뒷걸음질 못하도록 가시채를 만들어 놓으면 아무리 뒤로 가려고 해도 가시에 찔려서 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뒷발로 찬다고 해도 가시채는 없어지지 않고 자기 발만 아픈 것입니다.
불신자들은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는 것이 가시채를 밟는 것이라는 것을 모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을 핍박하는 것은 바로 예수님을 핍박하는 것이며, 하나님 앞에 무서운 진노의 심판이 쌓이고 있는 행위입니다. 그리고 그런다고 해서 그들의 마음에 결코 평화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만일 지금 바울의 경우처럼 기적적으로 하나님께서 역사하지 않으시면, 계속 마귀가 기뻐하는 일에 도구로 쓰임 받고, 결국 자기 자신은 멸망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바울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이후에 변화를 받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사명을 받습니다(16-18절). 바울이 은혜를 받은 것은 지금까지 예수님을 미워하고 대적하는 일만 하던 그를 예수님께서는 아무 조건 없이 다 용서하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위한 사명을 맡기시는 것이었습니다. 즉 예수님이 살아계신 것과 장차 오실 것과 그 나라의 모든 비밀을 바울에게 다 맡기셔서 증인을 삼겠다고 하십니다. 세상에 이런 믿음이 어디 있으며, 이런 사랑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바울은 그렇게 자신을 믿어주시고 일을 맡겨 주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을 때까지 배반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의 사명은 영적으로 소경된 사람들의 눈을 뜨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없던 어두움에서 빛으로 인도해 내어, 사탄의 권세에 매였던 자리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옮겨오는 것이었습니다. 더불어 거룩한 성도들에게 영원한 축복의 기업을, 상속을 얻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이러한 놀라운 경험은 사울(뜻: 여호와께 간구하다)을 바울(뜻: 작은 자)로 바꾸기에 충분한 것이었습니다.
이 영광스러운 복음을 깨달은 바울은 자신의 이야기를 끝맺으면서 다시 한번 복음의 핵심을 전했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내가 오늘까지 서서 높고 낮은 사람 앞에서 증거 하는 것은 선지자들과 모세가 반드시 되리라고 말한 것 밖에 없으니 곧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으실 것과 죽은 자 가운데서 먼저 다시 살아 나사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 빛을 선전하시리라 함이니이다”(22-23절)라고 말입니다.
이토록 바울의 증거는 확신과 감동이 넘치는 것이었습니다. 아마도 그곳에 모여서 바울의 이야기를 들은 모든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동이, 찔림이 있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경향가든 교우 여러분!
여러분에게 여러분 자신의 이야기가 있습니까? 주님을 만난 드라마가, 간증이 있습니까? 아니 드라마가 계속되고 있습니까? 전도란 여러분 자신이 만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전하는 것입니다.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 그 빛 앞에 자아가 죽어진 간증을, 주관적인 경험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 경험은 객관적인 진리, 계시인 성경 말씀, 복음이 있기 때문에 성령이 역사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객관적인 진리를 떠난 신비한 정신적인 경험이라면 이는 다른 종교적 신앙의 모습과 똑 같은 것입니다. 그저 신비주의자인 것입니다. 생명이 없는 거짓인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복음에 합당한, 객관적인 진리에 부합하는 여러분의 간증은 능력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며, 도전을 주며, 소망을 갖게 합니다. 그들의 닫혀있는 영적인 눈을 열어 줍니다. 그러므로 꼭 나누어야 합니다. 그것이 여러분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입니다. 사람을 살리는 일에 여러분의 삶을 사용하시기 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진실로 주님을 경험한 사람들은 자신의 문제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의 문제에 눈을 돌리게 되어 있습니다.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는 일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만약 여러분이 그 일에 쓰임을 받는다면 얼마나 축복입니까? 그래서 우리 모두 축복의 통로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을, 은혜를 나누시기 바랍니다.
‘나는 주님을 만나기 전에는 이렇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이렇게 혹은 저렇게 나를 만나 주셨습니다. 복음을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그 이후로 나는 변화를 받았습니다. 확실한 소망 가운데 다르게 살고 있습니다.’ 라는 살아있는 감격적인 간증을 나누시기 바랍니다. 아니 계속되는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고 사시기 바랍니다. 오늘도 우리 하나님은 살아계셔서 우리 가운데 성령으로 역사하십니다. 그러므로 신비주의자는 아니지만, 신비적인 삶의 증거가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 간증이 풍성한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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