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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 태일 목사
작성일 2009-07-27 (월) 11:06
분 류 주일설교
ㆍ조회: 1903    
[7/19/09] 무엇을 믿습니까?
무엇을 믿습니까? (사도행전 24:10-21)
저를 비롯해서 많은 그리스도인이 성경에서 가장 좋아하는 인물들이 구약에서는 요셉, 여호수아, 다니엘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하나님과 사람 앞에 조금도 흠이 없는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나 이삭, 모세나 다윗과는 달리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신약의 바울도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로는 오늘 본문 16절에서 고백하는 것처럼 하나님과 사람 앞에 조금도 부끄러움이 없는 삶을 살려고 힘썼다고 합니다.
성경 전체에서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에게, 그의 자녀들에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벧전 1:16; 레 11:44)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도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 5:48)고 첫 설교 산상수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즉 하나님 아버지를 닮아 거룩하여지는 것입니다. 온전하여지는 것입니다. 기억해야 합니다. Almost holy or perfect is not holy or perfect!
그러므로 우리의 삶이 추구하는 바가 하나님과 사람 앞에 신앙양심에 조금도 거리낌이 없는 것이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같이 이 땅에서 구별된 거룩한 삶을, 온전한 삶을 사모하며, 힘써야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그런 삶을 살려면 무엇을 믿느냐가 열쇠입니다. 신앙 혹은 신념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말입니다. 어디에 최고의 가치를 두고 사느냐에 달려 있다는 말입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은 자신이 믿는대로 살고, 행동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사도 바울의 증언에서 그가 무엇을 믿고 있었기에 그는 하나님과 사람 앞에 조금도 양심에 거리끼는 일을 하지 않으려고 힘썼다고 하는지 살펴보면서 만약 우리가 믿는 바가 그와 같다면 우리도 그렇게 살 수 있을 것으로 확신합니다.

지난 주일에 살펴본 바와 같이 지금 바울은 벨릭스 총독 앞에서 재판을 받고 있는 피고인입니다. 원고는 아나니아 대제사장을 비롯한 유대인들이며, 더둘로가 그들의 변호사로 바울을 로마 법정에 고소하고 있습니다. 고소의 내용은 세가지였습니다(5-6절). 첫째, 그는 예수라는 병균을 전염하게 하여 천하에 퍼진 유대인들을 다 소동하게 하는 자며, 둘째는 나사렛 이단의 괴수며, 셋째는 성전을 더럽힌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고소에 대하여 누가는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의 증언을 적고 있습니다. 10절에 보면 더둘로의 말이 끝나고 바울의 발언 차례가 되었을 때, 벨릭스 총독은 바울에게 머리를 들어 매우 거만한 태도로 그가 말하게 합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이런 교만한 모습이 바울의 기분을 상하게 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유대 지도자들이 고소하는 내용이 말도 되지 않는 것이라며 펄펄 뛰고 화를 내면서 말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전혀 동요 없이, 겸손한 자세로 자신의 입장을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벨릭스 총독에게 사실을 조사해 보도록 권하는 것입니다.
자신은 예루살렘에 예배하러 간지 열 이틀 밖에 되지 않았으며(11절), 그 기간 대부분은 또한 로마군에 붙잡혀 있었기에 언제 유대인을 소동하게 하는 반란을 일으킨 적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성전에서든 유대인들 사이에서든 싸움을 벌인 적도 없다는 것입니다. 자신은 선교여행을 마치고 여러 해 만에 예루살렘에 돌아와 기근에 고통 받는 자신의 동족들을 구제할 헌금을 전해주고 제물을 가지고 와서 예배를 드리는 중에, 의식에 따라 결례도 행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17-18절). 정치적으로 반란을 꾀하기 위하여 모임을 가진 적도 없고, 어떤 소란도 피운 적이 없이 성전에 있는 것을 본 증인들도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소동을 일으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아시아에서 온 어떤 유대인들이 소동을 일으킨 것이라고 합니다. 만약 그들이 나를 반대할 사건이 있었으면 진작에 당신 앞에 와서 마땅히 고소를 해야 했지 않느냐는 것입니다(19-20절). 이 고소인들이 그들의 고소를 입증하기 위하여 어떤 증거를, 어떤 자료를 제출했느냐는 말입니다. 사실과는 다른 거짓고소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 14-15절에서 바울은 이 모든 일은 로마 총독 앞에서 재판을 받아야 할 정치적인 문제가 아니라 유대 사회의 종교적인 문제임을 증언합니다.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만약 부활을 말하고 믿는 것 때문에 재판을 받고 있다면, 이는 종교적인 문제요 유대 사회 내부의 문제이지, 로마법이 판단할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당신께 고백하리이다 나는 저희가 이단이라 하는 도를 좇아 조상의 하나님을 섬기고 율법과 선지자들의 글에 기록된 것을 다 믿으며 저희의 기다리는 바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나도 가졌으니 곧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 함이니라”(14-15절)!
지금 유대 지도자들이 바울이 믿는 도를 이단이라고 하는데, 실제로는 그 도를 좇아 자신도 그들의 조상의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는 말입니다. 또한 율법과 선지자의 글을 믿는 것은 다 같다라는 것입니다. 자신도 모세의 율법을 믿고, 많은 구약의 선지자들의 글을 믿는다고 합니다. 즉 구약성경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소망이 있듯이 자신도 그 소망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차이는 부활에 있었던 것입니다.
즉 바울이 믿는 이 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도였습니다. 인간이 죽고 난 후에 부활이 있음을 믿는 도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21절에 “오직 내가 저희 가운데 서서 외치기를 내가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하여 오늘 너희 앞에 심문을 받는다고 한 이 한 소리가 있을 따름입니다”라고 마지막으로 벨릭스 총독에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즉, 지금 열리고 있는 재판의 핵심은 나사렛 예수가 정말 부활했느냐 아니면 이것은 바울이 믿는 도, 기독교가 퍼뜨리는 거짓말이냐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죽은 후에 영혼이 부활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의인은 영생의 부활이 있고, 믿지 않고 죽는 악인은 영벌의 부활이 참으로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부활이 사실이냐 아니냐를 재판하려면 부활하신 예수님을 소환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 법정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소환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이미 부활하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가셨기 때문입니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사실이라면 바울에 대한 재판은 아니, 기독교에 대한 재판은 이 세상 법정에서는 할 수 없게 됩니다. 왜냐하면 이 재판은 예수님을 재판하는 것이 되고, 인간이 하나님을 재판하려고 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헌데 만약 부활이 사실이라면 이 세상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율법, 구약성경을 믿지만 하나님 말씀이 가르치는 메시아가 예수 그리스도임을 믿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믿는 메시아는 그저 자신들의 유대 나라를 회복시키는 인간적인 왕으로 잘못 믿었던 것입니다. 이사야 53장을 비롯하여 구약성경 곳곳에서 나타난 고난의 종, 인간들의 죄를 사하시기 위하여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로는 믿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구약성경의 메시아의 예언을 바로 믿었기에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만주의 주로, 만왕의 왕으로 믿으며, 그 주님께서 온 나라 백성을 다스리시는 주권적인 통치를 믿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여러분들은 무엇을 믿고 있습니까? 바울처럼 우리 죄를 위하여 약속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을 믿고 섬기고 있습니까? 기록된 성경의 모든 말씀을 그대로, 조금도 의심없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있습니까?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딤후 3:16-17)고 하신 말씀을 100% 믿고 있습니까? 그래서 이 성경 말씀을 여러분의 삶에 최고의 권위를 두고 살고 있습니까?
그래서 바울처럼 하나님께 향한 소망이 확실합니까?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벧전 1:3-4)고 하신 말씀을 믿습니까? 이 땅의 삶이 전부가 아니라 죽은 후에 반드시 부활할 것을 확실히 믿습니까? 하늘에 썩지도 않고, 더럽혀지지도 않고 쇠하지도 않는 기업, 상이 반드시 있을 것을 믿습니까? 아니 “저희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마 25:46)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확실히 믿습니까?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후 5:10)고 하신 말씀을 확실히 믿습니까?
오늘도 그 주님께서 이 세상을, 특별히 택한 저와 여러분들의 삶을 주권적으로 다스리고 계심을 확실히 믿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도 바울처럼 하나님과 사람을 대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이 힘쓰고 사실 수 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다 보고 계시고, 훗날 계산할 날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땅의 삶이 전부가 아닌 것을 믿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이 땅의 일시적인 것들에 가치를 두고 살지 않고, 눈에 보이지 않는 영원한 나라를 위하여 영원한 것에 가치를 두고 살 수 밖에 없습니다. 거룩하게 살려고, 온전하게 살려고 힘쓸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 때에 오는 여러 고난과 고통을, 핍박을 잘 참아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신앙의 선배들이 그렇게 참고, 인내하고 살았습니다. 부활의 소망 때문에, 곧 만나볼 주님 때문에 말입니다. “또 어떤 이들은 희롱과 채찍질 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족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 저희가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이 사람들이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니라”(히 11:36-40)고 하였습니다.
즉 이런 내세에 대한 믿음이, 하늘나라 소망이 확실하였기에 이런 성도들은 세상의 풍류를 좇지 않고, 오히려 역류하기에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들은 무엇을 믿고 삽니까? 바울처럼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을 믿고 섬기십니까? 신구약 성경 말씀을 100% 믿고, 나중에 부활하게 됨을 믿고, 하늘나라에 대한 소망이, 주님 다시 만날 것을 진실로 믿습니까?
아니 입으로는 믿는다 하면서 실제 삶에서는 그런 믿음에 따르는 모습이 없습니까? 그렇다면 거짓말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렇게 믿고 산다면 삶에서 열매가 나타나야 하는데, 열매가 없다면 거짓말하는 것이지요. 예수님 이 땅에 계실 때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어서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은 속일 수 있어도 우리 하나님은 속일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말씀드리는 이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거룩한 삶, 온전한 삶입니다. 양심에 거리낌이 없는 삶입니다.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늘 떳떳한 삶입니다. 조금도 부끄럽지 않은 삶입니다. 바울은 주님을 만난 후에 그렇게 살았기에 로마 총독 앞에서도 떳떳이 증언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성령의 감동으로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요일 3:2-3)고 하였습니다.
우리 주위에도 수많은 교회가 있고, 교인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이런 내세신앙을 가지고, 세상과 타협하지 않는 믿음으로, 이 땅에서 그렇게 거룩하고, 온전하게, 양심에 거리낌이 없이 살아가는 교인들, 그런 교인들이 모이는 교회는 얼마나 될까요?
저는 우리 교회 만큼은 우리 신앙의 선배들처럼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참된 교인들이 모이는 교회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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