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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태일 목사
작성일 2022-07-24 (일) 01:55
분 류 주일설교
ㆍ조회: 638    
오직 믿음으로 살리라 (갈 3:1-14)


아기가 태어난다는 것이 산모에게는 엄청난 고통이지만, 아기를 낳고 나서는 자신과 온 가족에게, 친지에게 큰 기쁨을 가져다 줍니다. 그런데 그 후에 아기를 돌보고 키운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노력이 필요합니다. 아기는 자라서 성년이 되어 홀로 스스로 서기까지 많은 일들을 겪으며, 육체적, 정신적으로 교육을 받으며 자랍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 예수님을 믿는 것, 새 생명으로 중생함을 입는 것도 쉽지 않았던 분들도 있지만, 믿고 나서 돌보심을 받고 홀로 서기까지 많은 일들을 겪게 됩니다. 믿음이 성숙하여 지기까지, 영적으로 철이 들기까지 자라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게 되어 구원을 받았으니 되었다고 안심하고 돌보지 않으면, 훈련을 받지 않으면 자랄 수 없습니다. 태어난 아기를 그냥 내버려 두는 부모가 어디 있습니까? 먹이고, 돌보며, 교육하지요. 그렇게 아기가 양육을 받아야 자라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으면, 자라갈 때에도 필요한 것이 그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의지하는, 예수님의 대속의 죽음과 부활을 의지하는, 내주하시는 성령님을 의지하는 믿음입니다.

갈라디아교회 교인들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나서는, 자신의 노력으로 율법을 지키면서 자라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있었기에 사도 바울이 외칩니다. 구원을 받는 것도 믿음으로, 자라는 것도 믿음으로,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고 합니다.
우선 유대 율법주의자들의 꾀임에 넘어가서 신앙생활하려는 자들에게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1절)라고 합니다. 그들이 복음으로 만은 충분하지 않다는 가르침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너희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을 눈으로 똑똑히 보았는데, 복음을 경험했는데 어리석게도 왜 그것을 거부하고 꾀임에 넘어가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여기 “눈앞에 밝히 보인다”는 단어는 ‘생생하게(vividly), 명백하게(clearly)’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은혜를 생생하게 체험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2-5절까지 네 가지 수사학적 질문들을 하면서 반드시 알아야 할 것들은 말합니다. 그렇지 않다는 것을 강조하는 질문들입니다. 은혜와 율법을 대조하고 있습니다. 첫째 질문은,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2절하) 입니다. 당연히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성령을 받은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율법을 지켜서, 내가 노력해서 성령을 받는 것이 아니지 않느냐는 말입니다. 둘째 질문은,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3절) 입니다. 믿음으로 성령을 받고 신앙생활을 시작했는데, 왜 이제 와서 인간의 노력으로 목표에 달성하려고 하느냐는 것입니다. 결코 내 힘으로 성장하는 것이, 성숙해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믿음으로 성장할 수 있는,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성숙해지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셋째 질문은, “너희가 이같이 많은 괴로움을 헛되이 받았느냐 과연 헛되냐”(4절) 입니다. 여기 “괴로움을 받다(pa,scw, suffered)”의 우리말 번역은 헬라어를 직역하였는데, 원어의 의미는 ‘체험하다’ 입니다. 좋은 체험일 수도 있고, 좋지 않은 체험일 수도 있는데, 본문에서는 문맥상 선한 영적 체험을 뜻합니다. 즉 ‘너희가 체험한 많은 성령의 은혜가 과연 헛된 것이냐?’ 아니라는 말입니다. 성령님이 그들의 삶에서 증거했던 구원과 거룩함의 역사는 헛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넷째 질문은,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듣고 믿음에서냐”(5절) 입니다. 사실 첫째 질문과 맥락을 같이 합니다. 성령님이 믿는 자의 심령에 임하여 능력을 행하시는 것이 율법을 지키는 행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라는 말입니다.

이어서 바울은 아브라함의 예를 들고 있습니다. 모세보다 500여년 전 율법이 있기 전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도 자신의 노력, 행위로 의롭다고 칭함을 받은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창세기 말씀을 인용하여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6절; 창 15:6)고 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기 이전에 이미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고 합니다(참고- 창 17:24). 그래서 더 이상 율법주의자들이 믿음 외에율법 혹은 할례가 필요하다는 주장을 못하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은 할례도, 율법도 없이 구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4장에서도 동일한 맥락으로 말하였습니다.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바 되었느니라”(롬 4:2-3)고 하였습니다. 마치 어떤 부자와 결혼한 가난한 여자는 결혼 후에 남편의 모든 재산이 자신의 계좌에 들어가는 것처럼,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을 때 하나님의 모든 의는 아브라함의 영적 계좌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자신의 거룩한 의를 아브라함의 것으로 여기게 됩니다.
그래서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아들인줄 알찌어다”(7절)라고 한 것입니다. 태어날 때 유대인으로 나서 자동적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이 되는 것이 아니라,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있어야 진정한 아브라함의 영적 후손인 것입니다. 이방인이라도 이 믿음이 있는 자들은 아브라함의 후손인 것입니다. 그래서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이 너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하였으니”(8절)라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의 말씀을 인용합니다(참고- 창 12:2-3). 아브라함에게 작정되고 전해진 복음의 주된 내용은 온 천하 만민이 그를 통하여 복을 받는 것입니다(창 18:18; 22:18). 그래서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9절)고 한 것입니다. 본문 마지막 절에서도,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14절)고 한 것입니다. 앞 2절 말씀에서 이미 믿음으로 성령을 받은 경험을 말한 것과 같이 말입니다. 할렐루야!

이렇게 아브라함과 진정한 그의 후손들은 믿음의 사람들이었기에 신령한 복을 받아 누리고 있는데, 그와 달리 율법의 행위에 매달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10절)고, 바울은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실행치 아니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찌니라”(신 27:26)는 말씀을 인용하였습니다. 지난 주일에도 말씀드렸듯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다 지켜 행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리고 율법의 한 말씀이라도 어긴 사람에게 저주가 임합니다. 그러니 어떻게 율법의 행위로 구원을 받습니까?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실제로 구약의 가르침도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나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이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니라”(11절)고, 하박국 선지자의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의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니라 그러나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합 2:4)는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주전 625년 당시 하박국 선지자는 하나님에게 두가지 불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에게 항의하였습니다(합 1장). 하나는 예루살렘 안에 율법대로 행하여 지는 것이 하나도 없는데 왜 하나님이 율법대로 그 백성을 처벌하지 않으셨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진작에 즉각 벌을 주셨다면 이렇게까지 타락하여 뻔뻔스럽게 죄를 짓지 않을텐데 하고 말입니다. 또 하나는 바벨론이라는 악의 세력에 대한 불만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잔인무도한 이방나라가 예루살렘을 파괴하도록 내버려 두시겠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악을 도저히 참지 못하는 분인데 왜 버젓이 바벨론이 큰 나라가 되도록 내버려 두고 있느냐는 말입니다. 그러나 하박국은 나중에 깨달았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율법을 그대로 다 적용한다면 살아남을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바벨론을 큰 세력이 되도록 하신 것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 악이 커진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다 심판할 때가 있지만, 메시아이신 예수님이 오셔야 된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메시아가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시고, 성령님을 보내시고 나서 우리에게 소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은 인간이 자기 행위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라 이를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12절)고 한 것은 율법을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게 되는데, 앞서 10절에 말한대로 모든 율법을 다 행할 수 없기에 그 대가로 저주가 임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어떤 인간도 다 지킬 수 없기에 모든 인간에게 저주가 임한 것입니다. 이렇게 율법의 행위와 복음을 믿는 것은 본질적으로 전혀 다른 결과를 초래합니다. 은혜로냐 행위로냐 라는 기초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으로 그 저주를 복으로 바꾸시려고 예수님께서 대신 십자가의 죽음으로 그 저주를 다 받으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13절)고 합니다. 율법의 저주를 해결할 방법이 오직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그 모든 죄값을 대신 치러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여기 “속량하다(evxagora,zw, redeem)”의 뜻은 ‘값을 지불하고 노예를 사들이다’는 의미입니다. 이 단어는 당시 누군가 노예를 사서 자유롭게 풀어줄 때 사용하는 말입니다. 원죄를 가지고 태어난 인간이 율법을 다 지킬 수 없어서 늘 죄의 노예로 살기에 결국 저주를 받고 영원히 멸망할 수밖에 없는데,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그 모든 죄값을 지불하셨기에, 우리 대신 저주를 받으셨기에 이 복음의 진리를 믿는 자들은 죄의 권세로부터, 율법의 굴레로부터 자유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 8:32)고 하신 말씀이 바로 이 뜻입니다. 바로 구원을 받은 후에도 믿음으로 살 수 있게 된 근거입니다.

사랑하는 가든교회 교우 여러분!
바울은 로마서에서도 하박국서 2장 4절 말씀을 인용하며,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1:17)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구원만 믿음으로 받는 것이 아니라, 구원 받은 후에도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예수님을, 성령님을 온전히 신뢰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럴 때 믿음이 자라가게 됩니다. 오직 믿기만 하면 됩니다. 예수님이 나의 모든 죄를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속량하심으로 다 사함을 받으며, 자유하게 된 것을 믿기만 하면 됩니다. 믿을 때 성령님의 역사가 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삶도 변하게 되어 있습니다. 한순간에 완전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습니다. 갓난아기가 하루아침에 어른이 될 수 없듯이 말입니다. 때로는 시련과 시험이 오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때도 복음의 진리를 믿어야 합니다. 성경 66권 말씀을 믿어야 합니다.
믿음이 성장한다는 것은 믿음을 한번 실천해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그렇게 살아보는 것입니다.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우리들의 믿음을 실천해볼 수 있는 좋은 곳입니다. 믿음대로 살아보았더니 망하지 않더라, 오히려 생각했던 것보다 더 결과가 좋았더라는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힘들지만 성령님을 의지하고 순종한 결과 정말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더라 깨닫는 것입니다. 이런 성령체험이 있어야 믿음이 더욱 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경험이 있는 분들이 더 믿음으로 살려고 애를 쓰게 되어 있습니다. 한번 맛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완전한 실천이 아닙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러니 실수를 해도 좋으니, 실패도 할 수 있으나 말씀에서 배운 대로 한번 해보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정말 하나님의 자녀인데, 처음에 참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는데, 그 때 너무 기뻤는데 그 후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나요? 하나님이 고난을 허락하십니다. 부모가 자녀를 양육하듯이, 훈련시키듯이 여러 단계를 거치게 합니다. 스스로 훈련하십시오. 인내하십시오. 욥처럼 정금같이 나오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진정한 후손으로서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해주시면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됩니다. 성령의 인치심을 받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있는 힘을 얻게 됩니다. 믿기 전에는 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저 죄 가운데 사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의 뜻대로, 말씀대로 무엇인가 할 수 있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이 험한 세상에서 믿음으로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직 완전한 의인이 아니지만, 의인처럼 살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능력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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