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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태일 목사
작성일 2013-07-18 (목) 09:09
분 류 주일설교
ㆍ조회: 1831    
방언의 은사(3) (고전 14:34-40)


지난 주일 살펴본 33절에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오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때나, 교회에서 주신 은사를 가지고 섬길 때에도 꼭 이런 하나님의 성품이 드러나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혼란하거나, 무질서하지 않고, 화평해야 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평강의 하나님이요, 질서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앞서 언급한 방언을 사용할 때에도, 예언을 할 때에도 질서 있게, 화평하게 할 것을 명하신 것입니다.

   오늘은 14장 마지막 단락에서 바울은 다시 한번 강조합니다. 예언을 하던, 방언을 하던 주님의 몸인 교회에서는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40절)고 마지막으로 명령하고 있습니다. 그 동안 길게 방언에 대한 설명한 말씀의 결론입니다. 여기 “적당하게(properly)”라는 단어는 ‘은혜스럽게, 조화있게, 알맞게’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질서대로(orderly)”라는 단어는 33절에서도 언급한 “어지러움(confusion)”의 반대가 되는 말로서 ‘질서를 지켜서 한번에 한 사람씩 돌아가며’라는 뜻입니다. 즉 우리 하나님은 은혜스러운 아름다운 하나님이기에 적당하게 조화를 이루며 질서를 지켜서 모든 일을 감당하며, 은사를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결론을 짓기 전에 교회 안에 여자 성도들에게 권면을 합니다. 어쩌면 확실하지 않은 방언 은사로 고린도교회를 혼란하게 하고 문제를 일으킨 사람들이 여자 성도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아니 앞으로도 교회 안에서 여자들의 말로 인하여 문제가 생길 것을 예견하고 언급합니다. “모든 성도의 교회에서 함과 같이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저희의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 율법에 이른 것 같이 오직 복종할 것이요”(34절)라고 하였습니다. 고린도교회와 달리 모든 성도의 교회가 어떻게 하고 있느냐 하면,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히 조용하다는 것입니다. 특히 예배 시간에 여자는 말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물론 문맥상 방언이나 예언의 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만, 일반적인 말까지도 다 포함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어서 “만일 무엇을 배우려거든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을지니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임이라”(35절)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 여자가 남자에게 복종하며, 잠잠하여야 한다는 원칙은 신약성경의 가르침 이전에 율법에서부터 말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34절하). 아담과 하와가 타락한 후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사탄인 뱀을 저주한 후,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창 3:16)고 하셨습니다. 즉 창조 질서 중 부부 사이에서 아내는 남편을 사모하며, 남편은 아내를 다스리게 되어서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사도 바울이 후에 목회서신에서 이 원리를 더 자세히 설명하기를, “여자는 일절 순종함으로 종용히 배우라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노니 오직 종용할지니라 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하와가 그 후며 아담이 꾀임을 보지 아니하고 여자가 꾀임을 보아 죄에 빠졌음이니라”(딤전 2:11-14)고 하였습니다. 서방 세계의 문화와 달리 동방의 문화가 그래서 여자가 조용히 남자에게 복종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창조의 질서와 태초에 처음 죄를 지은 역사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아담이 먼저 창조되었고, 아담의 갈빗대로 하와가 창조되지 않았느냐는 것입니다. 하와가 먼저 사탄의 꾀임이 넘어가지 않았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디자인은 남자는 사랑으로 여자를 다스리며, 여자는 사랑으로 남자에게 복종하는 것입니다. 물론 주 안에서 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이 하나님의 원리 원칙을 잘 따르고 지키는 교회나 부부를 찾아보기 힘듭니다. 여자가 목사나 장로가 되어 남자를 다스리는 교회가 있지를 않나, 가정에서도 여자가 남자를 주장하며 다스리는 가정이 있습니다. 얼마나 비성경적인 교회이며, 가정입니까? 하나님께서 그런 교회나 가정을 축복하시겠습니까? 결코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아니 망할 교회요, 망할 가정입니다. 하나님의 디자인을, 질서를 무너뜨리는 말과 행동들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여자들 가운데 탁월한 지도력과 가르치는 은사를 받은 분들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에서 남자들을 지도하며 가르치면 안됩니다. 주일학교 학생들이나 자녀들을 가르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남자를 주장하며 가르치려고 하면 안됩니다.
   35절 말씀을 보면 당시 고린도교회 여자들 가운데 교회의 예배나 일어나는 일들에 대하여 불평하며 교회 지도자들에게 질문을 던진 분들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런 여자들은 교회에서 떠들지 말고, 집에 가서 남편에게 묻고 배우라고 합니다. 이 말씀에는 남자들이 말씀을 잘 배워서 얼마든지 여자들을 가르칠 수 있었다는 전제가 있습니다. 때로 똑똑한 여자들이 성경의 가르침을 벗어나는 이유가 자기 남편을 비롯하여 많은 남자들이 못나서, 말씀을 잘 배우지를 않아서, 또는 성경에서 말하는 남자로서의 리더십도 없고, 자기를 잘 다스리지 않기 때문에 그런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성경의 가르침을 벗어나 자기가 나서면 안됩니다. 아니 어떤 이유에서도 하나님의 질서를 무너뜨리면 안됩니다. 만약 남자가 제 구실을 못해서 여자가 나선다면 문제는 더욱 복잡해지고 더 많은 죄를 짓게 됩니다.
   그래서 정말 남자들은 여자보다 더 많이 성경을 알아야 합니다. 배워야 합니다. 기독교 역사상 위대한 남자들 가운데 대학도 제대로 나오지 않은 분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많이 읽고 배웠습니다. 책을 많이 읽었습니다. 올바른 성경 교리 훈련을 받아서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남자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역할을 잘 감당하기 위하여 여자들보다 더 많이 배우고 공부해야 합니다. 그리고, 아내들은 만약 자기 남편이 잘 모른다면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물어서라도 여자들은 올바로 알아야 합니다. 어떻게 여자의 역할을 감당하며, 남자를 잘 보필하고 따를 수 있는지 말입니다.
   때로는 하나님은 남자가 자기가 해야 할 일을 거부할 때에 여자를 사용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결코 남자에게만 제한된 역할을 여자가 하게 해서 감당하도록 인도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드보라 여 사사도 자신이 나서지 않고 바락이라는 군대 장관으로 하여금 나서서 가나안 땅 야빈의 장수 시스라를 물리치게 했습니다. 그저 바락을 격려하였을 뿐입니다. 또한 그녀도 한 남편의 아내였습니다. 성경을 아무리 살펴보아도 드보라가 남편을 무시하고 자기 멋대로 일했다는 구절은 없습니다.
   물론 성경공부를 한다던가, 비공식적인 모임에서 얼마든지 여자들도 의견을 개진하고, 질문에 대한 대답도 하면서 나눌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예배를 드리는 일이나 공식적인 모임에서 리더십의 역할은 반드시 남자가 해야 되고, 여자는 따르는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성경이 무슨 ‘남자는 하늘, 여자는 땅’이라고 가르치는 유교적인 남존여비 사상을 말하고 있는 것 아닙니다. 남자가 여자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 생각을 갖고서 남자들이 여자들 위에 왕처럼 군림하겠다면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비성경적이기도 하구요.
   지금 하나님의 창조 질서, 하나님의 디자인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남자의 역할과 여자의 역할이 분명히 다르다는 말씀입니다. 리더는 남자이며, 따르며 돕는 자가 여자라는 말씀입니다. 권위를 남자에게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 권위 아래 자신을 둘 수 있는 여자가 정말 믿음있는 지혜로운 여자입니다.

   36절 이하의 말씀을 보면 사도 바울의 이 같은 가르침에 대하여 불만을 가진 여자들이 있을 것으로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비꼬는 듯한 표현으로 강하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난 것이냐 또는 너희에게만 임한 것이냐 만일 누구든지 자기를 선지자나 혹 신령한 자로 생각하거든 내가 너희에게 편지한 것이 주의 명령인줄 알라 만일 누구든지 알지 못하면 그는 알지 못한 자니라”(36-38절)고 못 박고 있습니다. 자기가 신령한 자로서 무슨 예언의 은사를 받았다고, 방언의 은사를 받았다고 떠들면서 교회를 어지럽힌다면 결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들이 성경 말씀을 기록하지 않았다면, 모든 성도들과 마찬가지로 성경 말씀에 복종하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사도의 권위로 성경을 기록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어떤 성도도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거나, 바꾸거나, 불순종할 권리는 없다는 뜻입니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그 사람은 자신을 하나님 말씀 위에 두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정말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사를 가진 분이라면 하나님의 말씀이 가르쳐주는 원리 원칙에 따를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말씀의 권위를 인정하고 진지하게 하나님의 뜻에 따른다는 것입니다. 사도의 가르침을 거부하고 거역한다면 곧 하나님을 거부하고 거역한다는 것입니다(38절). 아니 그 사람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바울은 14장 1-38절까지의 말씀을 요약하여, “그런즉 내 형제들아 예언하기를 사모하며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39-40절) 하였습니다. 절대로 바울이 예언하는 것을, 방언 말하는 것을 못하게 하기 위하여 여태까지 설명한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우리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어떤 은사든 올바른 방법으로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당시 정말 예언의 은사는 교회의 덕을 세우는 것으로 꼭 필요했었습니다. 너무 중요한 은사였습니다. 그러니까 개인적으로 사모하여서 교회에 유익을 끼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다음으로 방언의 은사도 초신자와 같은 어린아이 신앙을 가진 자들에게 개인적인 유익을 주는 것이기에 사모하라고 합니다. 또 믿지 않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표적이 되니 그들 앞에서 하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교회에서 사용할 때에는 반드시 통역하는 자가 있어서 무슨 말인지 다른 성도들이 알아듣고 덕이 되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중요한 것은 적당하게, 은혜스럽게, 조화를 이루며, 질서를 지키면서 알맞게 사용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모든 성도들이 그렇게 예배를 드리고, 교회의 일들을 감당한다면 얼마나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겠습니까?

   사랑하는 경향가든 교우 여러분!
   우리의 기질이라고 하는 것은 참 쉽게 변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구약의 사울 왕은 성령이 임했을 때에는 착하게 그에게 맡겨진 역할을 감당했으나 성령이 떠나면 악한 본성이 드러나 주체를 하지 못했습니다. 그의 마음의 갈등을 가라앉히기 위하여 다윗의 찬양 연주를 들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구약과 달리 신약시대에는 성령이 한 번 여러분의 심령에 임하시면 결코 떠나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성령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질조차 바꾸실 수 있습니다.
   성령님의 역사로 우리의 기질조차 변합니다. 조금씩 성령님의 깨우침으로 바뀌어져, 주님의 인격을 닮아갑니다. 물론 우리가 다 똑 같은 모양으로 변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아직 주님을 닮지 않은 부분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늘 내가 가진 은사가 전부가 아니며, 다른 사람보다 나은 것이 전혀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내 안에 통제되기 싫은 기질이나 자존심을 경계하고, 성령의 은혜로 버리기를 힘쓰며,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하여, 교회의 덕을 위하여 절제해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의 권위에 절대적으로 복종해야 합니다. 모든 것을 적당하게 질서대로 하며, 화평을 이루어야 합니다. 성령의 하나되게 하심을 지켜야 합니다. 그런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넘치기를 축원합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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