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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태일 목사
작성일 2013-07-22 (월) 09:22
분 류 주일설교
ㆍ조회: 1932    
부활의 명백한 증거들(고전 15:1-11)


어떤 사건이 발생하면 가장 먼저 증거물을 찾습니다. 아니면 목격자를 찾습니다. 사실 어떤 증거물보다 결정적인 증거는 목격자입니다. 사건을 본 사실 그대로 증거하는 목격자가 나타나면 해결은 쉽습니다. 아무리 증거물을 많이 수집해도 DNA 를 찾지 못하는 한, 다 막연한 추측일 뿐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에 들어와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성도의 부활을 길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복음의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사실이 아니라면 신앙이 헛것이요, 실제로 일어났던 부활을 믿지 않는다면 복음을 믿지 않는 것이니 불신앙이기 때문입니다.
   그 동안 고린도교회가 갖고 있던 은사 문제를 가지고 12장부터 14장까지 설명을 한 바울은, 이제 새로운 문제를 대처하기 위하여 언급하는데 바로 예수님의 부활을 인정하지 않는 헬라 철학의 영향입니다. 당시 고린도를 지배하는 사상은 헬라 철학이었습니다. 여기서 나온 것이 영지주의입니다. 육체(물질)는 악이기에 추하게 생각하고, 영혼(정신)은 선이기에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상입니다. 그런데 복음은 우리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께서 육체적으로 부활하셨다는 것입니다. 속히 육체를 벗어나서 영혼으로 있는 것을 사모하는 영지주의자들에게는 받아들일 수가 없는 진리였습니다. 그래서 소위 지성인이라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영적으로만 받아들이려는 것이었습니다. 즉 예수님이 육체적으로 부활한 것이 아니라 영으로 부활하시고, 그의 정신이 우리 안에서 끊임없이 이어져 내려가는 것이 기독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지금까지는 은사 체험, 신비주의 등이 교회를 어렵게 해서 올바로 정리해 주었는데, 이제는 헬라 철학의 영향을 받은 영지주의 사상이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교리인 부활을 추상화시켜서 교인들을 헷갈리게 하였기에 성령의 감동으로 이 부활의 진리를 확실하게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육체적 부활에 대한 명백한 증거들이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이 땅에 계실 때에도,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서 저희에게 가르치시되”(막 8:31)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 사도들의 설교의 초점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었습니다(행 2:14-36; 3:12-26). 즉 신약 시대의 복음의 핵심은 예수님의 부활이었습니다. 유명한 17세기의 영국 철학자인 John Locke 는 ‘우리 구세주의 부활은 기독교에서 가장 중요한 진리이다. 메시아이신 그리스도의 존재는 이 부활의 진리에 달려있다. 부활이 없었다면 그리스도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었고, 부활이 있었다면 그리스도는 정말 계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이 진리가 그렇게 중요하기에 본문 서두에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로 알게 하노니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 너희가 만일 나의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이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으리라”(1-2절)고 하였습니다. 지금 바울은 교인들에게 다시 확인을 받고 싶은 것입니다. 그들이 분명히 부활의 복음을 받았고, 그들의 신앙이 이 복음 위에 서 있으면 구원은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물론 오해하지 마십시오. 부활의 복음을, 진리를 굳게 지키지 못하면 구원을 잃어버린다는 말씀은 아닙니다. 한번 구원 받으면 영원히 구원을 잃어버리지 않습니다(요 10:28-29; 롬 8:29-30).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다는 것은 처음부터 올바로 믿지 않았다는, 헛되이 믿었다는 것입니다. 겉으로 입으로만 ‘주여 주여’ 하면서 믿는다고 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마 7:22-23, 25:11-12). 그러나 부활의 복음을 확실히 믿었던 사람은 끝까지 그 믿음을 굳게 지키게 되어 있습니다.
   사실 요즘 교인들 가운데 예수님의 부활을 문제 삼는 사람들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싫어하는 것이 하나 있는데 죄를 지적하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목사들이 강단에서 죄를 지적하는 설교를 잘 하지 않습니다. 교인들이 싫어하니까요. 대신에 치유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과거의 상처로부터 치유가 필요하다, 회개가 아니라 치유를 받으면 풍성하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고 설교하면 ‘아 멘’ 하면서 좋아합니다. 그런데 죄가 해결되지 않고 어떻게 온전한 치유와 회복이 가능합니까? 그래서 복음의 내용에는 죄 사함이 반드시 포함되는 것입니다(3절).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명백한 증거는 무엇보다도 성경에, 특히 예수님 오시기 천년 전부터 수백 년 전 사이에 예언된 구약 성경의 성취입니다.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3-4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과 부활, 즉 복음을 간단명료하게 잘 나타낸 구절들입니다.
   그런데 이 복음의 내용이 다 구약 성경에 예언되어진 대로 이루어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물론 예수님께서도 구약 성경을 인용하시면서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겉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 속에 있으리라”(마 12:40; 욘 1:17)고 하셨고, 사도 베드로도 “그가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대로 내어 준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못 박아 죽였으나 하나님께서 사망의 고통을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게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행 2:23-24)고 하면서, 시편 16편 8-11절 말씀을 인용하여 부활을 증거했습니다(행 2:25-28). 또 바울이 헤롯 아그립바 왕 앞에서 간증할 때에도 “곧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으실 것과 죽은 자 가운데서 먼저 다시 살아나사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 빛을 선전하시리라 함이니이다”(행 26:23)라고, 시편 22편과 이사야서 53장의 메시아의 고난을 인용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오래 전에 예언된 대로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부활하셨으니 얼마나 확실한 증거입니까?

   뿐만 아니라 더 확실한 증거는 부활의 목격자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살아나셔서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 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 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태반이나 살아있고 어떤 이는 잠들었으며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5-7절)라고 하였습니다. 물론 제일 먼저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내 보이셨습니다(요 20:14-16). 또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에게도 보이셨습니다(눅 24:15,31). 그런데 바울은 부활의 목격자들 중 12 사도 가운데 제일 나이가 많고 수석제자였던 게바(베드로의 히브리 이름), 즉 베드로를 제일 먼저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열 두 제자 모두가 있을 때 나타내 보인 것(요 20:19; 눅 24:36)을 말씀하고, 다른 성경에 기록되지 않았지만 500여 형제에게 일시에 나타내 보이셨다고 합니다. 그 중에는 대부분이 바울이 고린도전서를 기록하고 있는 주후 60년대 초에는 살아있다고 합니다. 물론 죽은 사람도 있지만 말입니다. 그리고 야고보에게도 보이셨다고 하는데, 이 야고보는 야고보서를 기록한 예수님의 육신의 동생을 말합니다. 예루살렘 교회 초대 감독을 지내다가 맨 처음 순교한 사도입니다.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 나타내 보이셨다 함으로 우리에게 사도의 정의를 내려주고 있습니다. 즉 신약성경에 사도라 함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40일 동안 이 땅에 계시면서 자신이 죽음을 이기고 육체적으로 부활하였음을 눈으로 똑똑히 목격한 제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부활은 누가 지어낸 이야기도 아니고, 사람들의 상상도 아닙니다. 소문도 아닙니다. 목격자가 너무나 많은 분명한 사실(fact), 사건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 살아계실 때에 말씀하신 대로 부활하셨다면 예수님의 다른 말씀도 진리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죽음에서 다시 살아난 주님이 지금 어디에 있느냐는 것이 중요한데,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우리가 사도신경으로 신앙 고백하는 대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십니까? 그럼 그 하늘나라와 우리는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그 주님과 우리와의 관계는?
   세계 2차 대전을 치른 후 오늘날까지 세상 사람들 사이에는 실존주의가 대세를 이루고 있습니다. 미래에 대한 희망에 부풀었던 세상 사람들은 두 차례의 세계 대전을 치른 후 희망보다는 절망을 가져왔습니다. 그래서 미래에 대한 기대나 역사 같은 것은 중요하지 않고 오직 이 한 순간 내가 행복하고, 내가 존재한다는 것에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 실존주의 사상이 교회에까지 들어와 예배를 드림에도 미래의 소망이나 과거의 역사는 중요하지 않고, 현재 내가 여기서 무엇인가 생각하고 느끼는 것만이 중요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자꾸 감정적인 체험을 하는 쪽으로 흘러갑니다. 그래서 성경도 자유주의자들의 해석처럼 하나님의 말씀과 사람의 말을 구분하며, 기적을 믿지 않습니다. 사람의 지성으로 이해가 되는 것만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복음의 진리는 사람들의 느낌이나 생각과 상관없이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경대로 실제로 부활하셨다는 것입니다. 과거에 많은 사람들이 목격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자꾸 철학적으로, 영지주의나 실존주의 영향을 받으면서 믿으려고 하느냐는 말씀입니다. 내 느낌, 내 사상 보다 오히려 더욱 성경을 믿어야 하고, 성경을 연구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나 중심보다 하나님 중심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어서 바울은 자신의 개인적인 증거를 합니다. 모든 사도에게 보이셨는데, “나는 사도 중 지극히 작은 자라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로라 그러나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8-10절)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바울이 주님을 만나기 전에는 그리스도인들이라고 하면 치를 떨고, 그들이 말하는 것은 다 어리석은 말로 들었습니다. 아니 여호와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로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을 잡아 죽이는 일에 앞장서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주님께서 그를 만나주신 것입니다. 사실 부활, 승천하신 후에 바울에게 다시 나타나신 것이지요. 그가 부활의 주님 앞에서 깨달은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죽어서 무덤에 있어야 할 예수님이 살아 있다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모독했다고 생각한 그가 살아 있는 것입니다. 그 앞에 바울이 죽어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자아를, 자존심을 다 버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유대주의 사상이, 랍비들의 가르침을 믿었던 것이 헛것이었음을 깨달았습니다.
   자신을 만삭이 되지 못하여 난 자라고 표현한 것은 인간이 덜 되어도 한참 덜 되었다는 표현입니다. 그런 인간을 주님께서 만나주시고, 자녀 삼으시고, 사도를 삼으신 것에 대하여 다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정말 자격이 없는데, 삼아주셨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도들보다 엄청나게 수고했어도 다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라는 고백을 한 것입니다. 그 엄청난 은혜를 헛되지 않도록 자신은 최선을 다해 복음의 증인으로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고린도교인들도 자신처럼 부활을 믿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내나 저희나 이같이 전파하매 너희도 이같이 믿었느니라”(11절)! 자신을 비롯한 모든 사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전파하여서 고린도교인들도 믿음을 갖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경향가든 교우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은, 복음의 진리는 바울의 삶을 완전히 바꾸어 버렸습니다. 무엇보다 먼저 자신의 죄에 대하여 깊이 깨닫고 회개하였습니다. 자신의 종교적인 삶과 내적인 경건한 삶이 얼마나 차이가 있는지 깨달았습니다. 자신은 하나님의 대적자였고, 주님의 몸인 교회를 핍박하던 자여서 죄인 중에 괴수라고까지 했습니다(딤전 1:15). 그리고 내적인 변화를 체험했습니다. 사람이 바뀌는 것이었습니다. 핍박자에서 종으로, 가두는 자에서 건지는 자로, 고소하는 자에서 변호하는 자로, 생명을 빼앗는 자에서 생명을 주는 자로 변했습니다. 온갖 열정으로 그렇게 심하게 핍박하고, 가두고, 고소하고, 생명을 빼앗다가 이제는 그렇게 열정적으로 종의 도로 섬기며, 사람을 건지고 변호하며, 생명을 주는 삶으로 인생을 마쳤습니다.
   여러분은 어떠합니까?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신 후로 어떻게 변하셨습니까?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이 얼마나 큰 하나님의 은혜인지 깨달으십니까? 죄를 깨닫고 깊은 참회로 자신의 죄된 길에서 돌이키며, 변화를 받아 열정적으로 주님을 섬기며, 한 피 받아 한 몸이룬 형제, 자매들을 섬기고 사십니까?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 육체의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합니다. 죽음이 끝이라면 왜 신앙생활을 하겠습니까? 죽어서 모든 것이 그만이라면 왜 모든 수고를 하겠습니까? 적당히 즐기고 살다가 가면 그만이라면 말입니다. 하지만 죽음이 끝이 아닙니다. 아니 그 후가 훨씬 더 중요합니다. 영원히 계속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처럼 자신을, 자아와 자존심을 다 버리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의 철학, 사상을 버리시기 바랍니다. 성경 말씀에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어도 그대로 믿어야 합니다.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도 그렇고, 앞으로도 모든 것이 말씀대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미래를 위하여, 죽음 이후의 영원한 삶을 위하여 사는 은혜가 여러분에게 충만하기를 축원합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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