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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태일 목사
작성일 2013-05-27 (월) 11:16
분 류 주일설교
ㆍ조회: 1945    
사랑의 속성(1) (고전 13:4)


지난 주일에 살펴본 13장 첫 부분 1-3절에서 사도 바울은 아무리 말을 잘하고, 방언도 하고, 성경의 모든 지식을 알고, 강한 믿음도 있고, 구제도 많이 하고, 몸을 다 내어주는 헌신이 있다 하더라도 아가페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이도 얼마든지 그런 일들이 가능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제 4절부터 7절까지 이 아가페 사랑의 속성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마치 빛이 프리즘을 통과하면서 아름다운 색깔들을 나타내듯이, 사랑의 특성들을 15가지의 스펙트럼으로 설명합니다. 마치 바울이 도화지에 사랑의 그림을 그리는데, 바로 우리 예수님이 그 안에 있습니다. 주님께서 이 사랑을 온전히 실천하고 사셨기 때문에 말입니다.
   아가페 사랑에 대한 본문의 15가지 설명이 우리 말이나 영어에서는 형용사로 표현되는 것들이 많은데, 실제 헬라어 원어에 의하면 다 동사들입니다. 즉 사랑은 어떠하다 라는 표현에 초점을 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은 무엇을 하고, 무엇을 하지 않는 것인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이 아가페 사랑은 수동적이나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능동적이며, 구체적이라는 말입니다. 예를 들면, 사랑은 오래 참는 것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오래 참는 것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혹은 사랑은 온유한 느낌을 갖는 것이 아니라 온유한 일을 하는 것입니다. 단지 진리를 깨닫는 것이 아니라 진리 안에서 기뻐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사랑의 속성 가운데 처음 4절에 나오는 5가지를 살펴보기 원합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4절)라고 하였습니다.
   첫째, 사랑은 오래 참는 것입니다. 여기 4절에 ‘오래 참고’ 라는 동사의 원어는 ‘고통을 참으면서 견딘다, 나를 포기하고 받아들인다’는 의미입니다. 특히 신약 성경에서 이 단어가 쓰일 때에는 어떤 힘든 환경이나 사건에 대하여 참는 것이 아니라, 거의 인간 관계에서 사람들에 대하여 참는 것을 말합니다. 즉 어떤 사람이 내게 대하여 못되게 굴고, 나를 모욕하거나 불편하게 하고, 이용을 당하면서도 견디는 것을 뜻합니다. 원한을 품거나 복수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당시 헬라 문화에서는 자신을 희생하거나, 복수하지 않고 참는 사람을 연약한 사람으로, 별 가치가 없는 사람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유명한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가르침에 의하면 위대한 헬라인의 덕목은 작은 모욕에 대하여도 참지 않고 복수를 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사랑은 정반대입니다. 이유는 상대방의 안위가 주된 관심이기 때문입니다. 복수가 아니라 오히려 얼마든지 당하고 사는 것입니다. 약해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강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죄인들을 향하여 얼마나 오래 참았습니까? 우리를 향하여 그렇게 오래 참으신 것은 우리의 의로운 행위나 조금이라도 거룩함의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저 그렇게 사랑하셔서 참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하나님 사랑으로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롬 12:17)고 하였습니다. 자신의 삶에 대해 정직한 눈으로 볼 수 있으며, 자기를 부인하고 오래 참는 사람은 하나님 사랑의 감격이 충만한 영혼입니다. 그래서 무한정 견디고 무한정 참는 삶이 됩니다.
   여러분! 이 세상은 우리를 견디게 하고 참게 하는 곳이지, 쉬게 하는 곳은 아닙니다. 우리보다 더 악하고, 소망이 없는 사람들이 우리의 사랑을 요구합니다. 여러분 주위의 사람들이 아무리 여러분에게 악을 행해도 그들에 대하여 오래 참으시는 여러분들 되시기 바랍니다.
   둘째, 사랑은 온유하게 대합니다. 여기 ‘온유하다’는 동사의 원어는 ‘은혜스럽다, 친절하다, 부드럽게 섬긴다’는 의미입니다. 능동적인 호의(goodwill)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그냥 오래 참는 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상대방을 관대히, 친절하게 대하는 것입니다. 나에게 잘 대해주는 호감을 가진 사람에게 아니라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들에게 말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너의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 가지게 하며,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가주라고 하셨습니다(마 5:40-41). 그것이 아가페 사랑입니다. 온유함입니다. 친절함(kind) 입니다. 이 사랑이 사람의 마음을 정복합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대하십니다. “우리 구주 하나님의 자비와 사람 사랑하심을 나타내실 때에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성령을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풍성히 부어 주사”(딛 3:4-6)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인간이 얼마나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까? 그래도 여전히 오래 참으실 뿐만 아니라, 온유하게 친절하게 우리에게 성령을 풍성히 부어주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에게 정복당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의 온유함을 가장 잘 테스트 하는 곳이 우리의 가정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믿는 남편이 아내에게, 믿는 아내가 남편에게 얼마나 온유하고 친절하게 하는지, 우리의 자녀들, 형제, 자매들에게, 부모들에게 얼마나 온유하고 친절한지 보고 계십니다. 마음으로만 아니라 실제 말과 행동에 있어서 그런 모습들이 나타나고 있는지요.
   온유는 하나님과 정말 화목한 관계에 있어나 나타나는 덕목입니다. 우리가 열심을 낸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또 어렵게 이 덕목을 얻었다 하더라도 마음의 평정이 흔들리면 얼마든지 사라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위에 신앙의 연륜도 깊고, 성경도 많이 알고, 신령한 경험도 많이 했고, 기도도 많이 하는 분인 것 같은데 온유하지 못한 사람을 봅니다.
   온유함이란 단순히 화를 내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도 화를 낸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상황에서도 마음의 평정을 잃어버리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자신이 태만해져서, 나태함에서 오는 속 편함을 말하는 것 아닙니다. 우유부단함을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자신의 좁은 생각을, 이기적인 욕망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못된 기질을 죽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없이 받은 은사로 주님의 일을 한다면 여기 저기 부딪히며 사람들의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온유함이 넘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온유한 사랑의 사람을 찾으십니다.
   셋째, 사랑은 투기하지 않습니다. 질투하지 않습니다. 이 질투는 두 가지 모양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는 자신은 다른 사람이 가진 것을 자신도 원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다른 사람이 좋은 차를 가지고 있으면 나도 갖기 원합니다. 다른 사람이 칭찬을 받으면 자기도 칭찬을 받거나 더 우월해야 합니다. 또 다른 모양의 질투는 다른 사람들이 갖고 있는 것이 없었으면 하는 것입니다. 우리 말 속담에 ‘사촌이 땅을 사면 배 아프다’는 것과 같습니다.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을 좋게 평가하지 않으려는 우리 내면의 성향까지 질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죄성을 가진 인간에게 나타나는 속성입니다. 즉 다른 사람이 잘못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축복의 통로가 아니라 저주의 통로입니다.
   문제는 믿음을 갖고 나서도, 그런 모습을 보이는 것입니다. 늘 자신보다 더 나은 사람이 눈에 띄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무슨 일을 자신보다 더 잘하는 것이 보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도저히 그것을 못 보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랑은 그렇지 않습니다. 사랑으로 다른 사람을 볼 때에는 그 사람이 자신보다 더 낫고, 잘 하면 기뻐합니다. 그 사람을 축복합니다. 격려합니다. 시기, 질투하지 않습니다.
   이 질투하는 죄는 결코 작은 죄가 아닙니다. 가인은 질투로 인하여 살인까지 했습니다. 요셉의 형제들은 질투로 요셉을 애굽의 노예로 팔아 넘겼습니다. 질투 때문에 돌아온 탕자를 반갑게 맞이하는 아버지에게 큰 아들이 대들었습니다. 사랑해야 할 대상을 경쟁의 대상으로 인식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분은 잔인하고 노는 창수 같거니와 투기 앞에야 누가 서리요”(잠 27:4)라고 하였으며, “너희 마음 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스려 거짓하지 말라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세상적이요 정욕적이요 마귀적이니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요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니라”(약 3:14-16)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마음에 시기, 질투심이 일어나면 정말 경계하고 통곡하며 회개해야 합니다. 즉각 제거해야 합니다. 우리가 경험한 사랑은 상대적인 사랑이 아니라 절대적인 사랑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만나주실 때, 이 세상에서 마치 나 한 사람 밖에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다가오셨습니다. 이 사랑이 우리가 하나님께 배운 사랑입니다. 한 가족 안의 지체를 경쟁 관계로 인식하는 것은 하나님 사랑이 절대적이라는 것을 잊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도 절대적이어야 함을 잊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지체를, 형제 자매를 자신과 비교하면서 경쟁 상대로 여긴다면 회개해야 합니다. 절대적인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무지하면 열등감에 사로잡힙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어떤 존재인지, 나를 어떻게 사랑하셨는지 정말 안다면 결코 열등감이나 피해의식에 사로잡히지 않고, 건전한 자존감이, 자아상이 생기게 되어 있습니다. 질투하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에게 그런 은혜가 넘치기를 축원합니다.
    넷째, 사랑은 자랑하지 않습니다. 사랑의 사람은 자신이 뭐 좀 잘 되어도 자랑하지 않습니다. ‘자랑한다’는 동사의 원어는 ‘속여서 말한다. 뽐내기 위하여 부풀린다’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즉 사람들에게 뻐기고, 자기를 과시하기 위하여, 자기를 자꾸 드러내는 자기중심적인 자랑입니다. 그러나 아가페 사랑은 자신의 성취한 그 무엇도 과장하면서 퍼레이드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좋은 것은 다 하나님으로부터 왔고, 나쁜 것은 다 자기가 원래 갖고 있던 것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사실 자랑은 질투의 다른 면입니다. 질투는 다른 사람이 갖고 있는 것을 원하는 것이라면, 자랑은 다른 사람에게서 질투가 일어나도록 부추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질투는 다른 사람들을 내려 깔보려는 것이라면, 자랑은 자신을 올려 높이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자랑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러면서도 자기는 자랑합니다. 얼마나 아이러니 합니까?
   고린도교인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영적 은사들을 자랑했습니다. 공적인 자리에서 사람들이 자기 자신에게 눈을 돌리도록 하면서 인정 받기 원했습니다. 교회 안에서 하나됨, 화목, 덕을 세움, 나눔 등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오직 자기 자신들에게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유명한 C. S. Lewis 는 이 자랑을 가장 큰 죄악으로 말했습니다. 모든 죄의 뿌리가 되는 교만의 극치가 자랑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모든 것을 다 가지신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랑을 해 본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로 사람들을 섬겼습니다(빌 2:6-8).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이 사람들 앞에서 자랑한다면 여러분은 높아지고 그 사람들은 낮아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상대방을 낮추지 않고는 자신이 높아질 수 없습니다. 상대적인 것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들은 결코 자기 자신을, 자기 자식을 자랑하지 않으시기 바랍니다. 사실 우리는 사랑하는 것을 자랑하게 되어 있습니다. 사랑거리가 자랑거리입니다. 사람은 자기가 사랑하는 것을 어떤 식으로든 자랑하게 됩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 사랑으로만 우리의 마음이 가득차 있다면 하나님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을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아무 것도 부러워할 것이 없을 것입니다. 주님 외에 그 어떤 것도 더 사랑하는 것이 없다면 주님만 자랑할 것입니다. 아니 정말 우리가 자랑해야 할, 그리스도인들의 영원한 자랑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입니다.
   다섯째, 사랑은 교만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참 허황된 존재입니다. 조금만 칭찬을 받아도 교만에 빠지기 쉽기 때문입니다. 이 교만을 버리는 비결이 아가페 사랑에 있습니다. 이 사랑을 경험하면, 이 온전한 사랑에 붙잡히기만 하면 교만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사랑은 교만하지 않는다는 말씀은 하나님 사랑에 사로잡히면 교만해질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이 사랑을 깊이 체험할수록 겸손해진다는 말씀입니다.
   고린도교인들은 너무 교만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종종 야단을 쳤습니다(고전 4:6-8,10,18; 5:1-2). 반대로 세례 요한은 정말 겸손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등장하자, 자신은 그의 신 끈을 풀기조차 감당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요 1:27). 나중에 그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인기가 훨씬 더 높아져서 질투를 하니까, “그는 흥하여야 하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 3:30)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교만을 얼마나 싫어하시는지 잠언에서는 자주 언급하고 있습니다(잠 8:13; 11:2; 13:10; 16:18; 29:23). 사탄, 마귀의 속성을 한 마디로 말하자면 바로 교만입니다. 태초부터 하나님처럼 되고 싶어서 타락했습니다. 그리고 첫 사람 아담과 하와를 하나님처럼 된다고 유혹하면서 교만하게 한 장본인입니다. 그러므로 교만을 극도로 경계하십시오.
   오히려 하나님 사랑에 붙들리십시오. 이 사랑이 가진 놀라운 능력은 자기 자신을 주목하지 않게 하고, 사랑의 대상을 주목하게 합니다. 그러니까 교만할 수가 없습니다. 어떤 상처가 있어도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든지 덮어버리고 맙니다. 사실 상처 받았다는 말 자체가 자기 자신을 주목하였기에 난 것이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주목하는 사람은 상처 받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그 이름이 더럽혀지기 전에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사람은 세상이 아무리 상처를 내어도 상처 받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이 아무리 할퀴고 지나가도 자신이 그것을 주목하지 않는 한 상처가 남지 않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사랑하는 경향가든 교우 여러분!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이, 십자가 구속의 은혜가 여러분을 사로잡음으로 말미암아 사랑을 실천하고 사시기를 바랍니다. 사람에 대해 오래 참으십시오.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에 대해 온유하십시오. 친철하십시오. 시기, 질투하지 마십시오. 다른 지체들과 비교하지 마십시오. 경쟁하지 마십시오. 자랑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주님 외에 자랑할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무엇보다 결코 교만하지 마십시오. 자신에게 주목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눈을 주님에게만, 그 사랑에만 고정하십시오. 주님을 이 세상 그 무엇보다 사랑하십시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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