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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태일 목사
작성일 2012-12-03 (월) 07:14
분 류 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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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조회: 1747    
우리가 이 권리를 쓰지 아니하고(고전 9:1-14)


지난 주일에 살펴본 8장에서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 그 고기를 먹는 것을 금하는 것을 예로 바울은 우리 성도들이 누리는 자유에 대하여 제한이 있음을 말씀하였습니다. 성경에 뚜렷하게 금하고 있지 않는 것들(아디아포라 문제)에 대하여 언제나 다른 사람을 위하여 내 권리, 내 자유를 포기하고 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의 마음으로 가지고 내가 아무리 하고 싶어도, 해도 전혀 죄가 안 된다 하더라도 다른 사람을 배려하여 말하고 행동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런즉 너희 자유함이 약한 자들에게 거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8:9)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거침돌이 되지 말고, 디딤돌이 되자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바울은 자신이 8장에서 한 말씀에 대하여 자신 스스로 본을 보임으로 증거하고 있습니다. 자신과 동역자 바나바도 고린도교회에서 사례를 받을 권리가 있지만, 복음을 위하여 스스로 포기하고 사역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구체적으로 다섯 가지로 설명을 하면서 자신의 권리를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자신은 사도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1-6절). 자신도 진리로 자유함을 입은 자유자이며,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사도라는 것입니다(행 9:3-8, 22:6-12). “내가 자유자가 아니냐 사도가 아니냐 예수 우리 주를 보지 못하였느냐 주 안에서 행한 나의 일이 너희가 아니냐”(1절)라고 합니다. 당시에 바울의 사도성을 의심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메시아로서의 사역을 시작하면서 부르셨던 12사도만을 사도로 인정하는 자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고린도교회를 개척한 자신의 사도됨을 적어도 고린도교인들 만큼은 주 안에서 인을 친 자들이 아니냐는 것입니다(2절). 연약한 교인들을 위하여 우상에게 제사드린 음식을 먹을 권리를 포기하라는 말씀에 대하여 자신의 사도성을 의심하여 묻는 자들에게 변론할 것이 있는데, “우리가 먹고 마시는 권리가 없겠느냐 우리가 다른 사도들과 주의 형제들과 게바와 같이 자매 된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리가 없겠느냐”(4-5절)고 주장합니다. 자신도 참 지식이 있어 얼마든지 우상에게 드린 제사 음식을 먹고 마실 권리가 있지만 연약한 자들을 위하여 포기했다는 것입니다. 또 사도들 가운데 게바, 즉 베드로처럼 믿음의 자매들과 결혼하여 살면서 사역하는 자들이 있는데, 자신은 결혼할 권리도 포기했다는 것입니다. 또한 다른 사도들은 세상 일을 하지 않고 사역에 전념하는데, 자신과 바나바도 얼마든지 일하지 않을 권리가 있다는 것입니다(6절). 그런데 그 권리를 포기하고 자비량 선교를 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장막을 짜고 만들며 아무 대가를 받지 않고 사역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일반적으로 이 세상 사람들도 일을 하고 나면 합당한 사례를 받는 것이 당연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7절). “누가 자비량하고 병정을 다니겠느냐 누가 포도를 심고 그 실과를 먹지 않겠느냐 누가 양떼를 기르고 그 양떼의 젖을 먹지 않겠느냐”라고 합니다. 즉 누가 자신이 돈을 내어 가면서 군인으로 복무하느냐, 돈을 받으면서 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또 자기 땅에 포도 농사를 자기 자신이 해 놓고 그 포도 열매는 먹는 것이 당연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자신의 양 떼를 기르고 그 양 떼의 젖을 먹거나 양털로 수입을 거두는 것이 당연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자신이 복음의 씨앗을 뿌리고, 물을 주며, 비료를 주어서 자란 고린도교회로부터 합당한 사례를 받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율법에서도 동물조차 일을 하고 대가를 받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는 것입니다(8-12절). 세상 사람의 경우를 7절에 이야기했다면, 하나님의 말씀에서도 동일한 진리를 가르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모세 율법에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 기록하였으니 하나님께서 어찌 소들을 위하여 염려하심이냐”(9절)! 이는 “곡식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지니라”(신 25:4)는 말씀을 인용한 것으로, 당시 이방 나라에서는 소가 곡식을 먹지 못하도록 그 입에 망을 씌웠지만, 하나님께서는 일하는 소가 일할 동안에서 먹을 수 있도록 배려해 주신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소가 무엇을 먹을 것인지 염려하지 않으신다는 말씀입니다. 바울은 이런 율법의 말씀이 “전혀 우리를 위하여 말씀하심이 아니냐 과연 우리를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밭 가는 자는 소망을 가지고 갈며 곡식 떠는 자는 함께 얻을 소망을 가지고 갈며 곡식 떠는 자는 함께 얻을 소망을 가지고 떠는 것이라”(10절)고 합니다. 지극히 당연한 말씀이지요. 농부가 봄에 씨를 뿌리고, 모를 내고, 물을 주고 지속적으로 노력하는 이유는 가을에 추수할 소망을 가지고 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우리가 너희에게 신령한 것을 뿌렸은즉 너희 육신의 것을 거두기로 과하다 하겠느냐”(11절)라고 반문합니다. 영적인 것과 비교할 때에 지극히 미미한 세상에 속한 것을 요구한다는 것이 지나친 것이 아니지 않느냐는 말씀입니다. 특별히 다른 사역자들도 이런 권리를 가졌다면, 하물며 그렇게 희생하는 자신과 바나바는 마땅히 그 권리를 누려야 하지 않느냐고 합니다(12절상).

넷째는, 이 진리는 옛날 제사장 시절부터 내려오는 통상적인 예라는 것입니다(13절). “성전의 일을 하는 이들은 성전에서 나는 것을 먹으며 제단을 모시는 이들은 제단과 함께 나누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라고 합니다. 과거에 예루살렘 성전에서 일하던 제사장들이 제사를 드리던 하나님의 백성들이 바치던 십일조와 헌물을 가지고 생활하지 않았느냐는 뜻입니다. 모세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세워주신 규례가 아니었느냐는 말씀입니다(민 18:8-24; 레 7장). 아니 그 이전에도 아브라함이 멜기세덱 제사장에게 십일조를 드리지 않았느냐는 것입니다(창 14:18-20).

뿐만 아니라 마지막 다섯째로, 우리 예수님께서도 주님의 양들이 사역자를 돕고 생활을 책임지도록 했다는 것입니다(14절). “이와 같이 주께서도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명하셨느니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여기 “살리라”는 의미는 생활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택하시고 세상에 복음을 전하도록 보내시면서 하신 말씀, “이는 일꾼이 저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니라”(마 10:10; 눅 10:7)고 하신 것을 염두에 두고 말하는 것입니다. 즉 사역자들이 교인들의 헌금으로 생활을 하게 함을 명하신 것입니다.

이런 이유들로 바울과 바나바는 마땅히 고린도교인들에게 사례를 받아 생활할 수 있는 권리가 있으나, “우리가 이 권리를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니라”(12절하)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개척을 하고 최선을 다해 사역을 해왔던 그로서 다른 어떤 사역자보다 더욱 마땅한 사례를 요구할 수 있으나, 이 모든 일에 참는다고 합니다. 이유는 복음을 전하는데,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하여 조금이라도 어려움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아무리 곤궁하여도 인내하였습니다. 혹시라도 불신자들이나 연약한 교인들이 사역자가 돈을 위하여 일한다는 생각을 하거나, 물질에 얽매어 산다는 모습 때문에 실족함이 없도록 하기 위하여 스스로 권리를 포기하였습니다. 오로지 복음 때문에, 연약한 형제, 자매들 때문에, 아니 하나님 사랑 때문에 그는 자신의 자유를, 권리를 기꺼이 포기하면서 주어진 책임을 다하였습니다.

사랑하는 경향가든 교우 여러분!
구원은 돈을 주고 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헌금을 많이 낸다고 해서 더 구원하시거나 혹은 헌금을 적게 낸다고 해서 덜 구원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누구나 똑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보시고 구원하십니다. 그런데 참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사람들은 더 이상 자기 욕심을 위하여 살지 못합니다. 내주하시는 성령님이 그렇게 살도록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그는 복음을 전하는 자들을, 사역자들을 돕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복음의 은혜에 대한 믿음의 반응이지, 무슨 거래나 조건이 아닙니다.
복음을 전하며, 사역을 하면서 교인들에게 그 대가를 얼마나 요구해야 하는지의 문제는 결코 쉬운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복음은 거저 주는 것이라고 해서 끊임없이 그 부분만 강조하면, 사람들은 결국 복음을 가치가 없는 값싼 것으로 생각할 가능성이 많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비싼 대가를 지불하고 얻은 것을 소중하게 생각하지 누군가가 공짜로 준 것은 귀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늘날 많은 신자들이 거저 받은 복음을 그렇게 가치 없는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삶의 우선순위에서 제일 먼저 밀리는 것이 믿음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밥 먹는 것은 당연하게 생각하면서 자기가 교회를 위하여 무슨 수고와 희생을 하면 무엇인가 큰 손해를 본다고 생각합니다. 사역자에게는 사례를 주고 있으니까 그가 어떤 일을 하고, 희생을 해도 당연히 여깁니다. 마치 무슨 회사에서 사장에게 월급을 주고 고용하여 일을 시키는 것처럼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값없이 구원을 주신 것은 아무도 그 값을 치를 수 없는 너무나 귀한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도저히 값으로 계산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분들은 이 구원이, 복음이 별로 가치가 없어서 공짜로 주었다고 생각하면서, 언제까지나 얻어 먹으려고만 하지 자신 스스로 주님을 위하여, 복음을 위하여 무엇인가를 하려고, 희생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구역 모임에 자원하여 음식을 준비하여 대접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교회의 필요에 대하여 무관심합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 다 하나님으로부터 왔기에 하나님 것이지만, 십일조와 헌물은 성경에서 분명히 명하는 것으로(말 3:8-10; 마 23:23) 당연히 구별하여 감사함으로 드려야 함에도 불구하고 드리지 못하는 분들은 정말 구원이, 복음이, 하나님의 은혜의 진수를 모르는 분들입니다. 그런 분들은 절대로 교회에서 무슨 발언을 하면 안 됩니다. 무슨 주장을 하면 안 됩니다. 갓난아기처럼 그저 아무 말하지 마시고 받아 먹기만 하십시오. 자랄 때까지 말입니다.
지금 방금 예수를 믿은 아주 어린 영적 유아기에 있는 사람이라, 그 깊은 진리를 몰라서 그런가 보다 여기겠습니다. 아니면 믿은 지는 오래 되었지만 아직도 갓난아기 수준으로 알겠습니다. 하지만 영적 유아기를 지난 사람이라면 무조건 얻어먹는 자리에서 점점 동역자의 관계가 되어 서로 책임을 지는 존재로 바뀌어야 합니다. 영적으로 자라야 합니다. 교인들은 목사나 사모가 늘 남에게 다 주는 것을 보면, 교회를 위하여 전적으로 희생하면, 그들은 먹지 않아도 사는 분들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저 다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신다고 하면서 자기는 아무 책임도 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깨달으셔야 합니다. 목사도 먹어야 살 수 있으며, 복음을 전하고 말씀을 선포하는 일은 그냥 되어 지는 것이 아니라 대가를 치러야 하고, 누군가는 현실적인 문제를 책임져야 한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즉 목사의 섬김을 받고 사는 양들이 도와야 합니다. 반면 목사가 어떤 대가를 바라지 않고 순전하게 말씀만 전하며, 양들을 사랑한다면 정말 아름다운 주님의 종입니다. 그렇지 않고 삯을 위하여 일한다면 그건 삯꾼인 것입니다. “너희 중에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부득이 함으로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를 위하여 하지 말고 오직 즐거운 뜻으로 하며”(벧전 5:2)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더러운 이”란 돈의 욕심을 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도들은 지위나 명분이 아니라 섬김으로 말하는 사람들입니다. 교회 안의 직분을 마치 세상에서 승진하고 출세한 것처럼 여기고 누리려고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직분이 있다 하더라도 그 권리는 포기하고 책임을 감당하는 분들이야말로 바울과 같은 참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한 섬김이 삶의 우선순위에서 밀려나면 믿는 자들은 목적을 잃은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자신을 불러주신 주인의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요지는 지난 주일에 말씀 드린 것처럼 복음의 능력으로 구원을 받은 사람이라면 정말 자신의 권리를, 자유를 포기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복음을 위하여, 형제 자매들을 위하여 얼마든지 권리를 포기하고, 서로 책임을 질 수 있어야, 섬기고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렇게 살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입으로만 사랑을 외치는 자들이 아니라, 실제로 사랑을 베푸는 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복음을 위하여,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희생할 수 있는 밀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본을 보이면서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 12:24)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인자의 온 것을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5)고 하신 대로, 얼마든지 자신의 권세로 십자가를 거절할 수 있었으나 우리 모두를 섬기려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기억하시고 주님의 본을 따라 사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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