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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태일 목사
작성일 2012-11-05 (월) 13:42
분 류 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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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조회: 1840    
전심으로 주를 섬기기 위하여(고전 7:32-40)



기독교 역사상 정말 귀한 삶을 살다가 간 사람들은 자기가 이 세상에서 누리고 싶은 모든 것을 다 누리고 소유하고 싶은 것을 다 소유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후, 즉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후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하여, 주위의 영혼들이 너무 소중하여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옥합을 과감하게 깨뜨린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다른 영혼들을 위하여 세상 사람들이 그렇게 귀하게 생각하는 명예나 안정된 삶이나 직책을 과감하게 버리고, 아니 자신이 그렇게 좋아하던 취미 생활도 버리고 다른 사람들 발 아래 꿇어 앉아 그들의 발을 씻긴 사람들입니다. 이 세상에서 인정받는 사람들이야 자기에게 주어진 모든 것을 다 써야 만족합니다. 자기를 위하여 시간과 돈과 정력을 다 쓰고, 자기의 권리를 다 주장하고 써야 똑똑한 사람이라는 소리를 듣습니다. 조금이라도 자기에게 주어진 권리나 기회를 사용하지 않으면, 양보하면 바보 취급을 받습니다. 이런 세상에서는 오늘 말씀을 전혀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에서 바울은 7장 서두에서 이미 언급한 독신의 은사에 대하여, 독신의 삶의 유익에 대하여 다시금 말하고 있습니다. 독신으로 있으면 전심을 다하여 주님을 섬길 수 있지만, 결혼을 하게 되면 전심으로 주님을 섬기지 못하고 마음이 나뉘어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남자나 여자나 혼자 지낼 수 있으면 혼자 지내라고 합니다. 물론 이미 살펴보았듯이 누구나 독신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본문의 초점은 정말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사람이라면, 인격적으로 우리 주님을 만난 사람이라면 결코 자신만을 위해서는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귀한 옥합을 깨뜨려 하나님 나라를 위한, 다른 사람의 영혼을 위한 삶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어찌하든지 현재 주어진 자리에서 전심으로 주님을 섬기기 원한다는 것입니다.
분명히 결혼해서 얻는 기쁨이, 행복이 있습니다.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런 것도 소중한 것이며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할 수 있으면 결혼을 포기해서라도 주님을 섬기라고 합니다. 만약 결혼해서 주님을 전심으로 섬길 수 없다면 말입니다. “너희가 염려 없기를 원하노라 장가가지 않은 자는 주의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주를 기쁘시게 할꼬 하되 장가간 자는 세상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아내를 기쁘게 할꼬 하여 마음이 나누이며 시집가지 않은 자와 처녀는 주의 일을 염려하여 몸과 영을 다 거룩하게 하려 하되 시집간 자는 세상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남편을 기쁘게 할꼬 하느니라”(32-34절)고 하였습니다.
결혼 생활의 유익을 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저히 결혼 생활을 하면서는 다른 영혼들을 도울 수 없을 때 결혼을 포기하고 자유롭게 혼자서 하나님 나라의 일을 하라는 것입니다. 자신을 원하는 사람들의 영혼을 위하여 내 자신의 행복을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결혼을 해서 보다 더 효과적으로 하나님의 일을, 다른 영혼을 위하여 더 열심히 할 수도 있습니다. 가정이라고 하는 것이 사람을 얼마나 안정시키는지 모릅니다. 내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안정감을 느끼게 합니다. 어설픈 독신주의는 문제를 불러 일으킬 수 있습니다. 오해를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일단 남편이나 아내가 없으면 모든 시간과 정력을 다른 사람을 위하여 헌신할 수 있습니다. 사실 혼자 살면 재산을 모을 필요가 없습니다. 부양할 가족이 없으니 말입니다. 가족이 있으면 집도 있어야 하고 돈도 있어야 합니다. 가족을 위하여 시간도 내야 합니다. 가족이 아프면 다른 사람을 돌볼 수가 없습니다. 잠시라도 염려를 해야 합니다. 또한 혼자 있으면 언제든지 마음만 먹으면 어디로든 떠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족이 있으면 쉽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한번 들어가면 도저히 살아 나올 수 없는 곳에서 복음을 전하려 할 때에는 그 영혼들을 위하여 결혼을 포기할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마치 전쟁을 하러 가는 군인이 가서 죽을 지도 모르는데, 가족이 있다면 쉽게 용기를 내어 싸우겠습니까?
물론 혼자 지낼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합니다. 7장 1-16절에서 살펴본 대로 성욕을 자제할 수 있는 절제의 힘이 있어야 합니다. 아니면 자신에게 그것은 그렇게 큰 의미가 없어서 유혹을 전혀 받지 않을 수 있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혼자 있음으로 해서 다른 사람을 넘어지게 하거나 자신이 성적인 죄에 빠지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그래서 감당할 수 있기에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신자가 다른 영혼을 위하여 자신의 삶을 온통 다 드리는 사역으로 부르심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여러분들이 다른 영혼을 돌보는 일에 쓰임을 받고자 한다면 일단 대인관계가 복잡해서는 안됩니다. “내가 이것을 말함은 너희의 유익을 위함이요 너희에게 올무를 놓으려 함이 아니니 오직 너희로 하여금 이치에 합하게 분요함이 없이 주를 섬기게 하려 함이라”(35절)고 하였습니다. 바로 오늘 본문의 핵심입니다. 결혼을 했던 하지 않았던 간에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전심으로 주님을 섬기고자 하느냐는 것입니다. 반드시 혼자가 되야 한다고 올무를 놓고자 함이 아니라고 바울은 역설하고 있습니다. 다만 올바른 이치에 합당하게 분요함, 즉 마음이 나뉘지 않고 주님을 섬기기 위하여 가족 관계를 비롯하여 모든 대인관계를 단순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사실 결혼이라고 하는 것이 남편이나 아내하고만 결혼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새로운 관계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남편이나 아내를 있게 한 가족들과 관계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이 관계를 잘 맺어야 결혼 생활을 무난하게 잘 할 수 있지 않습니까? 특히 여자들 가운데 이 관계를 잘 맺지 못하여 시집살이를 힘들어 하는 것을 봅니다.
바울은 주로 여자들에게 혼자 살 것을 권면했습니다. 정말 마음에 감동을 받은 여자로 독신의 은사를 받았다면 결혼을 아예 포기하고 다른 영혼들을 위하여 평생을 헌신하라고 합니다. 이 세상에는 때로 공부를 위해서 결혼을 포기하는 여자들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결혼하여 남편을 내조하고 아이를 키워가면서 학적으로 뛰어난 업적을 남기기는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헌데 바울은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다른 영혼들을 섬기기 위하여 결혼을 포기하고 한평생 삶을 드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 여자들이 할 수 있는 사역이 고아를 돌보거나 병자들을 돌보는 일일 것입니다. 우리나라 선교 역사에도 처녀의 몸으로 와서 한평생을 병원이나 요양원, 고아원에서 살다가 간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좋은 예이지요.

바울은 이어서 자녀들을 위한 헌신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누가 자기의 처녀 딸에 대한 일이 이치에 합당치 못한 줄로 생각할 때에 혼기도 지나고 그같이 할 필요가 있거든 마음대로 하라 이것은 죄 짓는 것이 아니니 혼인하게 하라 그러나 그 마음을 굳게 하고 또 부득이한 일도 없고 자기 뜻대로 할 권리가 있어서 그 처녀 딸을 머물러 두기로 마음에 작정하여도 잘하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처녀 딸을 시집 보내는 자도 잘하거니와 시집 보내지 아니하는 자가 더 잘하는 것이니라”(36-38절)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부모는 신앙이 독실하여 주님께 온전히 헌신이 되어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 당시에는 부모가 자녀들의 짝을 지어 주었습니다. 정혼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부모가 자기 딸이 처녀로 그냥 남아서 온전히 주님께 헌신하기를 바랬습니다. 그래서 짝을 정해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부모가 그렇다고 해서 자녀도 그렇게 헌신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오히려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부모의 서원을 따라 주의 일을 해야 하는 경우에는 자녀들이 많은 불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잘못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자녀가 결혼하기를 바란다면 그렇게 하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녀들이 부모들의 주님께 대한 아름다운 헌신을 보고 자신들도 그 길을 가고자 할 때에는 막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실 사람들이 어떤 특별한 하나님의 일에 부르심을 경험할 때에는 어떤 사건을 통하여 자기 안에 강한 충동이 생겨서 입니다. 하지만 어떤 때는 믿음의 영웅들의 삶을 보거나, 부모님의 헌신된 삶을 보고 자기도 그런 길을 가고 싶은 생각을 가질 때가 많습니다. 그럴 때 굳이 그들로 하여금 그 길을 포기하게 할 필요가 없다는 뜻입니다. 아니 적극적으로 격려해서 주님을 위하여 쓰임 받도록 해야 하지요.
그런데 오늘날 믿는 부모들이 어떠합니까? 자기 자신은 주님을 위해 헌신할 수 있지만, 자녀들이 그런 식으로 헌신한다고 하면 두 손들고 막지는 않습니까? 다른 청년들이 선교사로 나가겠다고 하면 옆에서 좋아하며 박수치고 칭찬하다가도 막상 자기 아들이 직장을 그만두고 선교사로 나가겠다고 하면 싫어하고 야단치는 분들이 있지 않습니까? 내 아들은 세상적으로 성공하여 인정받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경우가 많습니다. 무언가 잘못되었지요. 오늘 본문의 말씀과는 맞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바울은 과부된 자들에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아내가 그 남편이 살 동안에 매여 있다가 남편이 죽으면 자유 하여 자기 뜻대로 시집갈 것이나 주 안에서만 할 것이니라 그러나 내 뜻에는 그냥 지내는 것이 더욱 복이 있으리로다 나도 또한 하나님의 영을 받을 줄로 생각하노라”(39-40절)고 하였습니다. 요즘에야 그렇지 않지만 40-50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여자들은 남편이 죽은 후 재혼하는 것을 사회적으로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남편이 죽은 후에도 계속 정절을 지키면 열녀문을 세워서 칭송하곤 했습니다. 재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로마 제국 당시에는 남편과 사별한 후에 재혼하는 것에 대하여 사회적으로 전혀 제한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재혼할 경우에 반드시 믿는 자와 하라고, 주 안에서 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할 수 있으면 혼자 살라고 권면합니다. 이유는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은 맥락에서 남은 삶을 온전히 전심으로 주님을 위하여 섬기기 위해서입니다. 그것이 더욱 복이 있는 삶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경향가든 교우 여러분!
성경에는 곳곳에서 우리 하나님 나라 백성들이 하나님을 전심으로 찾고, 전심으로 경외하고, 전심으로 섬겨야 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민 14:24; 32:11-12, 신 1:36, 수 14:8-9,14, 대하 15:15; 19:9; 31:21, 롬 6:17, 엡 6:7). 하나님께서는 나뉘어진 마음을 싫어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현재 주어진 상황 가운데 최선을 다하여 온전히 주님을 섬기고, 다른 영혼들을 섬겨야 합니다.
오늘 본문이 말씀하는 것은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에도 자신의 삶을 주님께 전심으로 온전히 헌신한 사람들은 모두 다 예외 없이 무엇인가 주님을 위하여 버린, 포기한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결혼의 행복을 포기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돈 버는 일을 포기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자신의 안락을 포기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자기 자녀들의 이 땅에서의 성공을 포기하기도 합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자신의 생명조차 포기합니다.
물론 우리 모두가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다른 영혼들을 위하여 그렇게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그냥 그 수준이 금방 되기는 어렵습니다. 그렇다고 한 번 감동을 받았다고 즉흥적인 헌신이 바람직스럽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작은 희생입니다. 작은 헌신입니다.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은혜를 입은 자라면 마땅히 작은 헌신은 드려야 합니다. 아니 우리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분이 그런 작은 헌신도 못한다고 한다면 진실로 주님을 만났다고 볼 수 없습니다.
그 십자가의 은혜를 생각하고 하나님 앞에서 나의 작은 시간을 버리고, 작은 명예도 버리고, 작은 수입도 포기하고, 정욕을 포기할 때 더 큰 것을 포기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처럼 하나님 앞에 가장 소중했던 아들을 포기했던 것처럼, 자신의 귀중한 것들을 포기할 때에 하나님께서 크게 영광을 받으십니다. 더 주님께 온전히 삶을 드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 옥합을 깨뜨린 여인처럼 귀중한 것을 하나님 나라 위하여 포기하는 것입니다. 지금 당장 순교하겠다고 큰 소리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여러분의 마음입니다. 나뉘어지지 않은, 갈리어지지 않은 마음입니다. 기꺼이 주님을 더 잘 섬기기 위하여 작은 포기를 마다하지 마십시오. 예를 들면 전혀 도움이 안 되는 비데오나 인터넷을 보는 것이나 잠을 더 자는 것이나 하나님께서 좋아하시지 않는 만남을 포기하십시오. 오히려 성경을 보며 기도를 더 하시든지, 열심히 예배나 성경공부를 참석하시든지, 아니면 주일학교나 한글학교를 섬기시든지, 찬양대로 섬기시든지, 아픈 성도들을 돌보든지, 전도를 하기 위해 잃어버린 영혼을 위해 수고를 하십시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며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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