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등록 비번분실

전체방문 : 5,121,800
오늘방문 : 5199
어제방문 :
전체글등록 : 3,866
오늘글등록 : 0
전체답변글 : 2
댓글및쪽글 : 18

좌측_배너 배너 001

작성자 한 태일 목사
작성일 2010-12-27 (월) 11:04
분 류 주일설교
Link#2 롬 15:7
ㆍ조회: 2009    
구역교회(4) - 서로 받아주고 격려하는 모임

주후 1세기의 로마제국은 무력으로 세계를 거의 정복한 후, 전 세계에 안정적인 정치적 평화를 선포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정치적인 평화가 선포된 것과 상관없이 로마제국 아래 사는 사람들의 마음은 여전히 불안해 하며 방황하고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특별히 이런 로마인들에게 참된 소망은 초대교회들, 각 가정교회에서 역사하시는 예수님이라고 확신하였습니다. 그래서 로마 교회에게 전도에 더욱 힘쓸 것을 권면하면서, 교회가 더 이방인들을 받아들여야 할 필요가 있음을 강조하였습니다.
저는 지난 몇 주일 동안 계속하여 우리 구역교회들이 소그룹 공동체로서 어떤 특성을 지녀야 하는지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참된 교제가 있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사랑의 모임이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사랑의 구체적인 표현으로서 서로 용서하는 모임이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오늘도 또 하나의 사랑의 구체적인 표현, 실천 강령을 함께 읽은 성경 말씀을 중심으로 나누기 원합니다.
로마서 15장 1절부터 6절까지의 오늘 본문 문맥을 살펴보면 사도 바울은 어찌하든지 이웃을, 이방인을 기쁘게 하며 덕을 세우고,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참고 인내하면서, 그리스도를 본받아 서로 뜻을 같게 하여 한 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라고 권면합니다. 그리고는 “이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7절) 하십니다. 여기 ‘서로 받으라’는 원어적 의미는 어떤 사람이나 무엇을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받아들이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자라온 배경이 다르고, 생김새와 성격이 다르고, 사고방식이 다르고, 심지어 신앙의 색깔이 조금 달라도 우리는 서로 받아야 합니다. 마음을 열고 상대방을 수용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같은 연약한 죄인들을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이셔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신 것을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시고, 사랑하시고, 우리 대신 십자가에 죽어 주시기까지 하셨습니다. 우리에게 예수님 마음에 드는 그 무엇이 있어서 받아주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죄를 전혀 모르시는 분이 죄로 가득찬 우리를 받아주셨습니다. 이 은혜를 안다면, 우리도 우리의 이웃을 조건 없이 받아주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내 마음에 드는 모습이 있어서, 예쁜 데가 있어서 받아주는 것은 믿지 않는 불신자들도 합니다. 우리는 우리 공동체에 나오는 사람이라면 일단 수용하는 자세가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베푸신 은혜로 받는 것입니다. 어떤 이는 자기에게 잘못한 사람이 용서를 빌고, 회개하면 받아주겠다고 합니다. 그러지 마십시오. 회개하기 전에 사랑하며 받아주고 나서, 회개하도록 도우십시오. 사실 우리의 회개도 그렇게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까? 나 같은 죄인이 이 모습 이대로 십자가 앞에 나아와 예수를 구세주로, 주님으로 믿고 시인하였더니, 하나님은 나를 자녀로 받아 주시고 용납해 주셨습니다. 그 큰 사랑을 깨닫고 나서, 내 죄가 얼마나 많고 큰지 생각하며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회개하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도 마땅히 우리의 가족을, 이웃을, 우리의 구역원들을, 성도들을 주님처럼 받아주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받아주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에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형제, 자매를, 이웃을 조건 없이 받아들이려면 그들의 연약함이 눈에 보일 때 어떤 마음가짐을 가져야 하는지도 사도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15장 1절에 “우리 강한 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함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하였습니다. 즉 이웃의 약함을 우리가 담당해야 한다고 합니다. 무슨 뜻입니까? 내 이웃의 연약함을 발견하였을 때 ‘저 사람 어떻게 저럴 수가 있냐?’ 하지 말고, ‘그래서 저 사람 곁에 내가 필요하구나’ 하고 마음을 먹으라는 것입니다. 가정에서 부부 사이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 실망이 되는 부분이 보이면 ‘그래서 하나님께서 나와 결혼하게 하셨구나, 나로 그 부분을 도와서 조금 낫게 하려고 나와 만나게 하셨구나’ 라고 생각을 하여야 그 결혼이, 그 가정이 무언가 되는 가정, 축복의 가정이 아닙니까? 그것이 부부 사이의 행복을 가꾸는 본질이 아닙니까?
실제로 건강한 가족은, 건강한 공동체는 지지난 주일에도 말씀드렸듯이 서로에게 상처주지 않는 관계가 아니라, 상처까지 끌어 않을 수 있는 관계입니다. 그런 은혜를 가진 모임입니다. 성도들 사이에도 부족한 부분이 보이면, 그의 곁에서 그의 조력자가 되어 섬김으로써 그를 유익하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나 자신을 기쁘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이웃을 기쁘게 하기 위하여 선을 이루고 덕을 세워야 한다고 하십니다(2절). 그런데 이웃을 기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내가 죽어야 합니다. 내 자아(ego)가 죽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자신을 희생하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를 기쁘게 하셨습니다. 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하고, 이 십자가로 말미암아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우리는 공동체 안에서 늘 죄에 대하여는 죽고, 하나님에 대하여는 사는 연습을, 훈련을 해야 합니다(롬 6:10-11). 이것이 이웃의 연약함을 담당하는 연습입니다. 그래야 비로서 우리 공동체는 서로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사랑으로 서로를 용납하는 공동체가 되어갈 수 있습니다. 가족의, 이웃의 연약을 담당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또 한가지 우리의 이웃을 조건 없이 받으려면, 큰 그림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사실 이웃의 연약함을 볼 때에 제일 먼저 우리가 쉽게 보이는 반응은 그 사람을 비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비판하지 않고 그냥 받아들이는 것이 자동적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때에 필요한 것이 지지난 주일에 말씀드린 자유의지를 사용하는 마음의 쿠션입니다. 우리는 서로 다른 것을 인정하고, 상대방의 인격을 존중하며, 큰 그림을 보아야 합니다. 내 생각을 접고 본질적인 것에 눈을 돌려야 합니다. 비본질적인 것에, 사소한 것에, 인간의 교만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에 빠져들어가지 말아야 합니다. 왜 우리가 모이는지 그 목적을 다시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그 이름을 위하여, 그 의와 나라를 위하여 모이는 공동체라면, 어떻게 전도할 것인가, 어떻게 말씀을 더 잘 배우고 순종할 것인가, 어떻게 이웃을 더 사랑할 것인가를 가지고 고민해야 합니다. 그래야 나를 기쁘게 하는, 내 입맛, 내 기호대로 신앙생활하지 않고, 남을 위한, 이웃을 위한 삶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유명한 성 어거스틴은 “본질적인 것에 대하여서는 일치를, 비본질적인 것에 대하여서는 관용을, 그리고 모든 일에 사랑으로” 라고 부르짖었습니다.

그런데 보다 적극적으로 이웃을 받아주는 자세가 바로 위로, 혹은 격려입니다. 그저 소극적으로 마지못해 받아주는 것은 참된 사랑의 모습이 아닙니다. 더더욱 우리 모두는 격려가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크고 작은 문제들로 힘들어 하는 우리들이 아닙니까? 우리의 형제, 자매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구나 고난의 여정을 통과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성령으로 말씀하시기를 힘들고 어려운 인생살이에서 “서로 돌아보다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 10:24-25)고 하였습니다. 물론 이 말씀은 고난과 핍박에 직면해 있는 초대교회 성도들을 격려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고난의 종류는 달라도 1세기 때보다 훨씬 복잡하고 타락한 21세기를 살아가는 성도들에게는 더욱 격려가 필요합니다. 요즘 세상이 얼마나 삭막합니까? 경제가 좀처럼 살아나지 않기에 다들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을 때 지혜로운 격려의 말 한 마디가 필요하지 않습니까? 유명한 헨리 나우엔은 그의 저서 ‘상처입은 치유자’에서 “위로라고 하는 것은 외로운 사람과 함께 함을 의미한다. 위로는 고통을 없애주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함께 있으면서 ‘당신은 혼자가 아닙니다. 내가 당신과 함께 있습니다. 우리는 함께 고통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두려워하지 마세요’라는 의미의 말 한 마디를 하는 것이다. 참으로 우리 모두는 위로를 주고 받아야 할 나약한 존재들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가 서로 받아주고 위로하며 격려하고 살아갈 수 있을까요?
성경이 말하듯이 자주 만나야 합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격려하고자 한다면 그 사람을 만나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들에게는 규칙적인 모임이 필요합니다. 소그룹, 구역교회가 그래서 더욱 중요합니다. 주일 예배를 통하여 이런 개인적인 격려를 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초대교회 교인들이 무서운 핍박 가운데서도 용기를 잃지 않고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었던 비밀은 규칙적인 만남이었습니다. 날마다 모였던 가정교회였습니다. 지하 처소교회였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자꾸 모이지 말자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처럼 하지 말고, 마지막 때가 가까워 올수록 더욱 자주 만남을 가지라고 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모임에서 어떤 내용의 격려들이 있어야 할까요? 무슨 말로 격려해야 할까요? 때로는 격려하기 모인 우리가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일도 있습니다. 사탄 마귀가 하는 일이지요. 어쩌면 그래서 모이지 않으려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경우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큰 자동차 사고가 난 후에 더 이상 운전을 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못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분일수록 다시 핸들을 잡아야 합니다. 정신적인 상처, 심리적인 상처를 극복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 분은 앞으로 다시는 운전을 할 수 없게 되고, 그의 삶은 너무나 불편해질 것이고, 많은 유익을 잃어버릴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모임에서 어느 분의 실수로 마음의 상처를 입었다면 그것을 극복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참된 교제를 더 이상 못하게 되며, 많은 영적인 유익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 사람 자신의 손해입니다. 그래서 모임의 지도자는 기도하면서 지혜롭게 그런 분들이 회복할 수 있도록 힘써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모임을 생산적으로 이끌어 가는 격려의 모임이 되려면 어떤 내용의 대화를 나눌 것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과연 무슨 대화를 주로 나누어야 할까요? 히브리서 10장 22-25절을 잘 살펴보면 믿음, 소망, 사랑 이 세가지 입니다. 이 세가지야 말로 이웃을 격려할 수 있는 요소들입니다. 22절에서는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기에 믿음의 중요성을 말합니다. 23절에서는 소망이 없이는 우리의 미래를 기대할 수 없기에 소망의 중요성을 말합니다. 그리고 24절에서는 사랑이 없는 모임은 전혀 의미가 없기에 사랑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일 때마다 믿음을, 소망을, 사랑을 말하며 격려해야 합니다. 격려를 많이 받고 자라는 아이들과 그렇지 못한 아이들은 훗날 엄청난 차이를 보입니다. 격려를 많이 받고 자란 아이들은 삶의 자신감, 자긍심을 가지고 세상을 헤쳐나가는가 하면, 그렇지 못한 아이들은 모든 일에 자신이 없어 하지요.
여러분! 우리가 자녀를 기르다 보면 어린 시절에 몇 가지 중요한 좋은 습관을 길러 주는 것이 얼마나 필요한가 깨닫게 됩니다. 공부하는 습관, 교회에 성경공부하러 가는 습관, QT하는 습관, 절약하는 습관, 이웃을 섬기는 습관 등등 말입니다. 솔직히 이런 것들만 제대로 해줘도 자녀 교육은 끝난 것 아닙니까? 그런데 그것이 왜 힘이 듭니까? 문제는 자녀들이 안 좋은 습관부터 먼저 배운다는 것입니다. 공부 안하고 장난하는 습관, 컴퓨터 게임 하는 습관, 성경공부 가지 않으려는 습관, QT 안 하는 습관, 낭비하고 자기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습관 등을 자연스럽게 너무 쉽게 배우지 않습니까? 이유는 죄성을 가진 죄인으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 할 때에도 우리는 안 좋은 신앙습관을 가진 사람에게 영향을 받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누구와 신앙생활을 함께 하느냐가 너무도 중요합니다. “또한 네가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좇으라”(딤후 2:22)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구역장님들의 역할이 너무 중요하고, 교회 지도자들의 모습이 너무 중요합니다. 본문 25절에서 말하는 것처럼 모이기를 싫어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아야 합니다. 좋은 본을 보이는 분들을 바라보고 따라야 합니다. 아니 누구보다도 예수 그리스도의 본을 따라야 합니다. 그 분이 이 땅에 계시는 동안 어떻게 사셨는지, 무슨 말을 하고 사셨는지 잘 보셔야 합니다. 복음서를 자주 읽어보십시오. 예수님은 실로 위대한 위로자, 격려자였습니다. 특히 고난 받고, 버림 받는 자들의 친구였습니다. 아파하는 자들을 아시고 치유하셨습니다. 사도 바울도 위대한 일들을 감당하게 된 것이 그의 인생에서 바나바라고 하는 격려자를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변화되었을 때에 아무도 그를 믿어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를 믿어준 단 한 사람이 있었는데 바로 바나바였습니다. 청년 바울을 믿어주고 ‘함께 일하자’고 하면서 격려한 사람이 바나바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마침내 세계 선교의 지도력을 그에게 위임하고 조용히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졌습니다. 그야말로 이름처럼 ‘위로의 아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바울보다 바나바가 더 위대한 사람이라고 하시는 분도 있습니다. 사도 바울도 나중에 그를 따르던 디모데와 같은 많은 동역자들을 위로하고 격려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런 격려를 바나바로부터 받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격려를 받아본 사람이 격려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가정이, 구역 모임이, 우리 교회가 서로 믿어주고 격려해 주는 모임이 되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경향가든 교우 여러분!
오늘 저는 우리 공동체가 참된 사랑의 공동체가 되려면 외적인 어떤 모습에도 관계없이 이웃을 받아주는 우리들이 되어야 함을 말씀드렸습니다. 큰 그림을 보며 본질적인 것에, 모인 궁극적인 목적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앞을 내다보시고 우리의 모습에 관계없이 무조건적으로 받아주셨기 때문입니다. 그 일로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셨다고 하였습니다.
또한 그저 소극적으로 마지못해 받아주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위로하고 격려해 주는 모임이어야 함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려면 자주 모여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믿음, 소망, 사랑의 주제로 삶을 나눔으로 서로에게 힘이 되는 생산적인 모임으로 만들고, 좋은 습관을 배우고 기를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하나님의 그 크신 은혜를 생각하고 새해부터는 이러한 자세로 모임을 갖고 서로 받아주고, 격려하는 아름다운 사랑의 모습을 나타내기를 축원합니다. 서로 받아주고, 위로하며 격려하는 가정, 구역, 공동체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아 멘!!
   
번호     글 제 목  작성자 작성일 조회
361 주일설교 나는 세상의 빛이니(요한복음 8:12-20) 한태일 목사 2011-02-08 1903
360 수요설교 고뇌에 가득찬 예수님의 기도 한 태일 목사 2011-02-04 2023
359 주일설교 용서를 받았으면 한 태일 목사 2011-02-01 1745
358 주일설교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한 태일 목사 2011-01-29 1814
357 수요설교 이스라엘의 받을 복 한 태일 목사 2011-01-21 1748
356 주일설교 예수 그리스도의 비밀 한 태일 목사 2011-01-18 1662
355 주일설교 성도의 생활원리 한 태일 목사 2011-01-10 1893
354 수요설교 올바른 기도 한 태일 목사 2011-01-07 1994
353 주일설교 구역교회(5)- 서로 찬양하고 기도하는 모임 한 태일 목사 2011-01-03 1753
352 집회설교 (송구영신예배) 네 입을 넓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 한 태일 목사 2011-01-02 2058
351 주일설교 구역교회(4) - 서로 받아주고 격려하는 모임 한 태일 목사 2010-12-27 2009
350 주일설교 그 이름 예수 한 태일 목사 2010-12-21 1805
349 수요설교 하나님의 축복의 조건 한 태일 목사 2010-12-17 1940
348 주일설교 구역교회(3) - 서로 용서하는 모임 한 태일 목사 2010-12-14 1879
347 수요설교 이스라엘 백성들의 한계 한 태일 목사 2010-12-10 2229
346 주일설교 구역교회(2) - 서로 사랑하는 모임 한 태일 목사 2010-12-10 1894
1,,,61626364656667686970,,,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