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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 태일 목사
작성일 2009-07-10 (금) 02:20
분 류 주일설교
ㆍ조회: 1941    
[7/8/09] 수요예배
지붕을 뚫는 믿음(마가복음 2:1-12)
이 세상에는 여러 종류의 믿음이 있습니다. 창조주이신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있는가 하면, 죽은 우상을 믿는 믿음이 있습니다. 또, 기독교 안에도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하는 믿음이 있는가 하면 인간의 의지를 중요시 하는 믿음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강조하는 믿음이 있는가 하면, 인간의 지성이나 감정을 중요시 하는 믿음이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 안에서도 무엇을 더 강조하느냐에 따라 믿음의 색깔이 다릅니다. 그래서 여러 교파가 있고, 보수주의 신앙, 개혁주의 신앙, 복음주의 신앙, 자유주의 신앙, 성령파 신비주의 신앙 등이 있습니다. 물론 우리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와 말씀을 강조하는, 우리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보수 개혁주의 신앙을 추구합니다.
그런데 그 어떤 믿음이라도 주님의 권세를 인정하면서 그 초자연적인 능력을 체험하지 못하는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나타난 예수님의 주권적인 능력을 체험하는 네 사람의 믿음을 보면서 우리도 그와 같은 믿음을 소유하기 원합니다. 오늘 말씀은 마태복음 9장에도, 누가복음 5장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 중풍병자를 메고 예수님께로 나오는 네 사람의 지붕을 뚫는 믿음을 살펴보며 은혜받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 초기에, 기적을 베푸신다는 소문을 들은 많은 군중들이 주님께서 갈릴리 지방에서 떠나 가버나움의 어느 집에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거기에 발 디딜 곳이 없을 정도로 몰려 들었습니다. 아마도 사도 베드로의 집이 아닌가 싶습니다(막 1:29).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받기 위하여, 그 육적인 필요를 채우기 위하여 주님 앞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제부터 그의 사역의 참 뜻을 사람들에게 나타내기 시작합니다. 저들의 죄를 용서하기 위하여 오신 메시아, 그리스도 임을 보이십니다.
어느 네 사람이 한 중풍병자를 상(mat)에 누이고 메워 가지고 예수께로 옵니다. 와 보니 문 앞으로는 도저히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그리하여 저들은 지붕 위로 올라가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가 누운 상을 달아 내립니다. 그 당시 유대지방 집들의 지붕은 나뭇가지와 풀과 갈대와 진흙 등으로 만들어 졌기에 지붕을 뜯는 일은 그렇게 어렵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감히 그런 생각을 하기는 쉽지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지붕을 뜯어내는 일은 집 안에 있는 사람들의 신경을 거슬려야 했습니다. 천장을 뜯어내며 생기게 되는 부스러기 등이 예수님의 말씀을 경청하고 있는 사람들 위로 떨어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남의 집 재산에 피해를 입히고 있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중풍병자 형제를 생각하고 지붕을 뚫었습니다. 그러자 5절에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십니다.
저희들의 믿음이 어떤 믿음입니까?

첫째로, 형제를, 이웃을 참으로 사랑하는 믿음이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상상해 보십시오. 얼마나 그 형제를 사랑하였으면, 얼마나 염려하고, 불쌍히 여겼으면 그렇게까지 해서라도 예수님을 만나 문제를 해결하기를 원하였던 것입니다. 집 주인에게 야단을 맞을 것도 각오하였던 것입니다. 모여 있는 군중들에게도 욕을 들을 지경입니다. 그러나 그 형제를 사랑하기에 그런 것들을 개의치 않았던 것입니다. 마땅히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그 집 지붕을 수리해 주어야 하고 그 값도 지불하여야 합니다. 그 형제를 데리고 가는 시간도 희생하여야 합니다. 모두 다 사랑에 기초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형제의 문제를 해결해 주신 이유가 그 네 사람의 진실된 뜨거운 사랑을 보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그와 같은 사랑을 보고 기뻐하시면서 역사를 나타내십니다.
우리는 어떠합니까? 지난 주일에도 말씀드렸듯이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서로 사랑하라"(요 13:34)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너무도 잘 알면서, 우리 주위의 이웃들이 앉고 있는 문제를 해결해 주기 위해서는 예수님 앞으로 나와야 함을 알면서도 행동으로 실천에 옮기고 있는지요? 진실로 사랑한다면 어떻게 해서라도 주님 앞으로 인도할 수 밖에 없습니다. 부모님이든, 형제 자매이든, 친척이든, 친구이든, 이웃이든 말입니다.

둘째로, 주님의 권세를 인정하며 그 능력을 확실히 믿었습니다.
그 중풍병자 형제를 예수님께로 데려 가면서 '예수께서 고쳐줄 수 있을까?' 라는 의심이 전혀 없던 그들이었습니다. 그렇기에 많은 사람들 앞에 창피함이나 수치감 따위는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어떤 장애도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믿음은 끈질기고도 과감한 믿음이었습니다. 그냥 우리 한번 기도해보자는 식이 아닙니다. 행동으로 옮기는 믿음입니다. 아무도, 그 어떤 장애도 그들을 막지 못했습니다. 그 어떤 것도 그들을 낙심시키거나 실망시키지를 못했습니다. 마치 마태복음 11장 12절의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말씀처럼 적극적으로 나아가는 믿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그러한 자에게 주어집니다.
또 그들의 믿음은 창조적인 믿음입니다. 그 네 사람 말고는 어느 누가 지붕을 뚫고 주님에게 그 형제를 달아 내리는 생각을 하겠습니까? 지붕을 뜯고 구멍내기가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더라도 말입니다. 아마 후에 어떤 사람들은 왜 우리는 그런 생각을 하지 못하였나 하는 자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그저 평범히 다 남들이 하니까 나도 한다는 식의 믿음보다는 새로운 방법을 생각하고 어떻게 하면 하나님으로부터 축복을 더 받아 누리고, 어떻게 하면 전도할 수 있나 하면서 창조적으로 우리의 믿음을 행동으로 옮기면 축복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이러한 끈질기고도 과감한 믿음, 창조적인 믿음을 보신 것입니다.

세째로, 그러한 믿음의 결과는 데리고 간 형제의 영과 육에 축복을 가져왔습니다.
6절에 보면 그렇게 발 디딜 틈도 없던 그 집에 앉아 있던 서기관들은 그 네 사람의 믿음과는 정반대로 오히려 예수님께 대하여 비판만 하려고 생각하기를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참람하도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7절)고 의논합니다. 물론 구약에서는 하나님 만이 죄를 사하여 주셨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지 않는 그들에게는 당연한 생각이었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그들을 깨우치려고 반문을 하십니다.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9절) 고 말입니다. 물론 그들에게는 죄 사하는 것이야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고, 그 병자에게 걸어서 일어나라 하는 기적은 눈에 보이는 것이니 당연히 죄를 사하는 것이 더 쉬운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기적을 베푸시면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권세가, 능력이 자신에게 주어졌음을,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임을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10절에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하노라"라고 하십니다. 자신을 가리켜 인자(Son of Man) 라고 하십니다. 마가복음에만 이 말이 14번 쓰였는데 자신이 인성을 지닌 메시야, 구세주(Christ)임을 나타내실 때에 쓰셨습니다.  
또 한가지는 그 유대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은 구약에서 가르치는 것처럼(대하 7:14, 시 41:4, 사 19:22, 렘 3:22, 호 14:4) 어쩌면 그 형제의 병은 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고 여겼기에 예수님께서 그의 죄를 사하심은 곧 그의 병이 나음을 뜻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마치 오늘날 AIDS 같은 병은 대부분이 성적인 타락, 죄로 인한 것인 것처럼 말입니다. 그렇지 않은 경우도 물론 있습니다(눅 13:1-5, 요 9:1-3). 모든 질병이 다 죄의 결과는 아니지만, 이 중풍병자의 경우에는 죄의 결과인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중풍병의 치료를 넘어서서 더욱 깊은 영혼의 치료가 필요한 것을 보신 것입니다. 사실 그에게 병 고침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죄 용서함 받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5절에 있는 대로 그 친구 네 사람의 믿음으로, 또 제가 믿기로 그 중풍병자도 믿었다고 여깁니다. 친구들이 그렇게 자신을 상에 들고 주님 앞에 데리고 가며, 지붕을 뚫고 자신을 내릴 때까지 가만히 있는 것도 사실 대단한 용기를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도움을 입는 자체가 자신의 필요를 인정하고 자존심을 다 내려놓은 믿음이 아니겠습니까?
결국 그는 죄 사함을 받았고, 육적으로도 병 고침을 받습니다.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그가 일어나 곧 상을 가지고 모든 사람 앞에서 나가거늘 저희가 다 놀라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며 가로되 우리가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하였다 하더라"(11-12절) 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권세에 병마도 물러가고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난 것입니다.
사람의 죄를 사하는 권세와 기적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 주님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으십니다. 그가 영광을 받으시는 대로, 그 기쁘신 뜻 가운데 어떠한 병도, 어떠한 문제도 해결하십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가장 큰 기적은 죄 사함을 받는 것인데 그것은 영원한 것입니다. 영생에 이르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죄 사함을 받으셨습니까? 주님의 십자가 보혈이 나의 죄 때문임이 믿어집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인생의 가장 중요한 것이 해결되었습니다. 이제는 주위를 돌아다 보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경향가든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믿음은 어떠합니까? 먼저 우리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얼마나 사랑하십니까? 그들의 영혼을 얼마나 염려하십니까? 말로만 하고 있지는 않는지요? 그들이 안고 있는 문제가 주님 앞에 오면 다 해결될 줄을 믿으십니까? 아니 우리 주 예수님이 죄를 사해주시는 권세가 있고 무엇이든지 할 수 있으신 분으로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그들을 위하여, 이웃을 위하여 내 시간을, 내 힘을, 내 물질을 희생하는 사랑을 실천하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끈질기고도 과감한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저 남들이 갖으니 나도 갖는 믿음이 아닙니다. 적극적인 믿음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축복을 받기 위하여는 그 어떤 것도 극복하는 믿음입니다. 우리의 환경이 장애가 되지를 않습니다. 부정적이거나 소극적이고, 내성적인 사람들은 생각도 못하는 지붕을 뚫는 믿음입니다.
또한 창조적인 믿음입니다. 평범한 사람들이나 안이한 사람들은 생각도 못하는 지붕을 뚫는 것입니다. 말보다 생각이 깊은 믿음입니다. 하나님과 깊은 교제 속에서 주시는 지혜로 살아가는 신앙생활입니다.
여러분의 믿음이 되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그런데 여기 네 사람이 합심하여 기적을 체험합니다. 한 목적, 같은 VISION 을 가지고 예수님 앞으로 나아와 축복을 체험합니다. 이 네 사람때문에 그 중풍병자는 죄 사함을 받고, 병도 고치는 기적을 체험하였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모두가 한 마음으로 서로 도우면서 함께 우리의 이웃을 향하여 나아가야 합니다. 한 목적, 같은 VISION 이 아닙니까? 오늘도 인생의 수많은 문제들을 그대로 짊어지고 고난과 고통 속에 살아가는 우리의 이웃들을 진정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행동으로 실천해야 합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주님 앞으로, 몸된 교회로 인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만나도록 해 주어야 합니다. 그들의 죄 문제가 해결되고 많은 인생 문제가 해결될 것입니다. 이유는 예수님께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고 하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 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하고 만나는 자들에게는 영생과, 안식과, 평안과, 기쁨이 있게 마련입니다. 모든 죄를 해결 받고 사니까요.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아버지께서 책임져 주시니까요. 예수님께서 오늘도 함께 계시니까요. 감사하지요. 찬양을 드릴 수 밖에요. 믿으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러므로 지붕을 뚫는 믿음으로 사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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