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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 태일 목사
작성일 2009-03-31 (화) 04:07
분 류 주일설교
ㆍ조회: 1941    
[3/29/09] 정말 하나님을 만나셨습니까?
정말 주님을 만나셨습니까? (사도행전 21:40-22:16)
우리 인생에서 누구를 만나 교제하고 사느냐는 너무 중요합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치명적인 만남은 하나님과의 만남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입니다. 이 만남이 없으면 그 인생은 이 땅에서 좀 잘 사는 것 같아도 나중은 비참하게 됩니다. 영원토록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동족인 유대인들이 자신을 향하여 갖고 있는 악한 감정을 풀기 위하여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의 말에 겸손히 순종하여 율법의 결례를 나실인의 서원예식과 함께 지켰으나, 지난 주일에 보았듯이 그 마지막 날에 성전에서 바울을 알아본 유대인들이 큰 소동을 일으키며 폭도로 변하여 구타하며 죽이려고 했을 때에 로마 천부장에 의하여 결박을 당하는 것을 보았습니다(21:27-39).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조금도 요동하지 않고 담담하고 의연하게 천부장에게 동족들에게 말할 기회를 달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 나라와 의에 대한 열정이 있었기에,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있었기에 말입니다.
천부장이 말하도록 허락하니 바울이 서서 백성들에게 손짓으로 조용히 하라고 하면서 히브리 방언(아람어)으로 말합니다(21:40). 그가 자신들의 나라말로 이야기를 하니까 백성들이 더욱 조용해 집니다(22:2). 작금의 상황은 우리 유대인들끼리의 은밀한 문제라는 암시를 주었던 것입니다.
“부형들아 들으라 내가 지금 너희 앞에서 변명하는 말을 들으라”(22:1)! 지난 주에도 보았지만 참으로 놀라운 것은 자기에게 심한 매질을 한 그들을 향해 부형(fathers & brothers)이라고 부릅니다. 아마 보통사람 같았으면 화가 나서 ‘이 미친 폭도들아’라고 불렀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의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기에, 목적이 있었기에 아주 친절하게 그들을 부릅니다. 그리고는 변명하는 말을 들어보라고 사정합니다. 여기 ‘변명(defense)’은 변호를 뜻합니다. 사람이 보통 자기 변명이나 변호를 하게 되면 자신의 결백을 주장해야 하는데, 바울은 그렇지 않습니다. 자기를 지금 유대교의 변절자로 죽이려고 하니까, 자신이 유대교의 변절자가 아닌 것을 변호하면서 살려달라고 해야 할텐데,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합니다. 왜냐하면 이미 그는 자신에 대하여 죽었기 때문입니다. 죽은 척 하는 것이 아닌 정말 죽었기에 매를 맞아 죽는 것이 두렵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어떠합니까? 자신에 대하여 죽었습니까? 여러분! 주님이 얼마나 강조했습니까? 성경이 얼마나 강조하고 있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눅 9:23) 하셨고, 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하; 참고 롬 6장)고 하였습니다. 사실 문제는 우리 자아가 죽지 않고 살아있다는 것입니다. 아니면 죽은 척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죽었어야 할 우리 자아가, 육체가 벌떡 일어나서 ‘나를 이렇게 대우하다니’, ‘나를 못 알아 주다니’ 하고, 조금만 자존심을 건드리면 기분이 상하여 자신도 힘들어 하고, 주위 사람도 힘들게 하는 것 아닙니까? 내 안에 계신 예수님이 아닌 내가 너무 살아 있어서 말입니다. 사도 바울만 자신에 대하여 죽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이 내주하는 성도들은 자신에 대하여 죽을 수 있습니다. 성령의 힘으로 말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죽었기에, 자기 자신은 없고 다만 3절에서 11절까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증거합니다. 과거 믿기 전 자신의 모습과 어떻게 자신이 주님을 만나 변화되었는지, 그 은혜를 간증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는 바울의 이 체험을 세 번에 걸쳐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습니다(9장, 22장, 26장). 이는 초대교회 역사에서 이 간증이 갖는 의미가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바울은 자기도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당신들과 같이 철저히 유대주의를 신봉하는 자였다라는 것입니다. 과거에 자신이 어디서 출생했고, 어떻게 자랐고, 배웠다고 합니다(3절).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그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이라는 유명한 랍비 밑에서 가정 정통한 유대교식 교육을 받았기에 당신들처럼 여호와 하나님께 열심이 특심했던 자라는 것입니다. 아마 그가 주님을 만나고 난 후 처음에 이해하기 어려웠던 것이 아마도 이런 것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나는 최선을 다해서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생각했는데 어째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만했다는 말인가?’ ‘나는 유대교에서 요구하는 것이라면 정말 열심히 모범적으로 살아왔는데 어째서 그것이 다 하나님이 원하지 않는 일이었는가?’
아마 여러분들 중에서도 자신 스스로 물어보아야 할 질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때로는 모범적이고, 성실하게 살고, 종교적인 열심이 많았다고 해도 성경의 하나님을 잘 믿는 것이 아닐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에 열심을 낼 수도 있다라는 것입니다. 마치 유대교를 철저히 신봉하며 자기 의를 드러내던 유대주의자들처럼 말입니다.
여러분! 사람은 누구든지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만나는 체험을 해야만 하나님을 알 수 있고, 하나님과의 적대관계가 해결될 수 있습니다. 아직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만나보지 못한 사람은 아무리 그 동안 교회를 오래 다녔어도, 나름대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해왔다고 해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주님을 만나기 전에는 하나님을 잘 믿기 위하여 가장 정통한 랍비로부터 양육을, 훈련을 받았고, 더 나아가 율법을 열정적으로 지키려고 했습니다. 거기서도 만족을 얻지 못하고 급기야 더 적극적으로 기독교인들을 박해하는 자리에까지 나가게 되었습니다(4-5절). 지금 자신을 핍박하는 그들처럼 말입니다. 그 증인으로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바울의 삶에서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난 것은 그가 더 많은 기독교인들을 핍박하기 위하여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이었습니다. “가는데 다메섹에 가까웠을 때에 오정쯤 되어 홀연히 하늘로서 큰 빛이 나를 둘러 비취매 내가 땅에 엎드려져 들으니 소리 있어 가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6-7절)!
바울이 변화 받기 전에는 작금의 유대인들처럼 그의 눈에 비친 그리스도인들은 잘 배우지도 못한 무식한 자들이 은혜를 받았다고 큰 소리를 치고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며 온 세상을 뒤집고 다니니까 도저히 화가 나서 참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유대주의자들은 왜 자신들이 그리스도인들을 보면 그렇게 화가 나는지 이유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 내면을 들여다보면 영적인 교만과 시기, 질투심이 자리잡고 있었던 것입니다. 자기들만이 세상에서 최고로 하나님을 잘 아는 자들이고, 자신들만의 예배가 경건생활이, 성경지식이 최고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의 눈에 그리스도인들은 지식도 없고, 경건도 없고, 축복도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오로지 나사렛 예수의 이름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모두 미친듯이 하나님을 사랑했고, 성령의 능력이 나타났던 것입니다. 랍비 중 하나에 불과한 예수가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황당무계한 이야기를 퍼뜨리고 다닌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견딜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다메섹에 열심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많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들을 잡아 죽이려고 그도 거기에 갔던 것입니다. 거의 다 도착했을 즈음 정오에 태양보다 더 강한 빛이 사울에게 비취어 눈이 멀게 되고(행 9:8), 그 충격으로 땅에 엎드러지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생전 처음 참된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아니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사울아 사울아 네가 정말 나를 위해서 수고를 많이 하는구나’라는 말을 들을 줄 알았는데, 정반대로 하나님을 핍박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너무 놀라서 묻습니다. “주여! 뉘시이니까?”(8절) 그런데 대답은 청천벽력과 같은 말씀입니다. “나는 네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라” 하십니다. 사울은 분명히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고 장사를 지냈기에, 그가 살았다고 하는 소문은 날조된 거짓으로 생각했었는데, 예수는 살아있었고 자기를 알고 있었습니다. 이 순간 사울의 모든 것은 다 뒤집어지고 말았습니다. 주님께서는 그가 잘못된 길을 가면서 잘못된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을 알면서도 오래 참고 기다리시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나타나셨습니다.
여러분!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내가 나 나름대로 열심히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서 바른 신앙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바른 신앙은 여러분이 어느날 살아계신 하나님을, 우리 예수님을 만나 그 앞에서 완전히 거꾸러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바로 알고, 그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이 참 신앙입니다. 사울이 예수님을 직접 핍박한 적은 없습니다. 오직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예수님을 핍박한 것이요, 하나님을 대적한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세상 모든 사람들이 들어야 할 음성은 바로 이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나름대로 열심히 살고 돈을 벌면서 나름대로 종교도 가지고 잘난 체 하지만 실제로는 주님을 대적하고 있고, 핍박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거꾸러지기 전의 모든 삶은 하나님을 대적하고 예수님을 핍박하는 삶입니다.
이제 사울 앞에 남아있는 선택은 오직 하나 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핍박했으니 죽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죽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죽어야 마땅할 죄인을 향해 손을 내미시는 주님의 은혜입니다. 자기가 아는 바에 사형선고를 받는 줄 알지만 끄나풀이라도 잡는 마음으로 주님께 묻습니다. “주여 무엇을 하리이까?”(10절상) 이 말은 ‘주여! 지금 내가 죽어야 합니까? 아니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눈도 보이지 않고 심한 죄책감으로 인하여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라는 뜻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자기 나름대로 하나님을 위해 매우 열심히 잘 살아온 충신이었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완전히 그 반대로 역적이었다는 판정이 났으니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겠습니까?
그 때 주님은 “일어나 다메섹으로 들어가라 정한바 너희 모든 행할 것을 거기서 누가 이르리라”(10절하) 하십니다. 이제 사울은 눈은 멀었지만, 사람은 완전히 변해 있었습니다. 분노와 살기가 등등하여 다메섹에 가는 중이었지만, 이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주님의 포로가 되어있었던 것입니다. 사흘 동안을 식음을 전폐하고 있다가(행 9:9), 주님은 그에게 모든 유대인들에게 칭찬을 받는 아나니아라는 형제를 통하여 사울을 안수하게 하시고 눈을 회복하게 하십니다(12-13절; 행 9:10). 예수님께서 직접 고쳐줄 수도 있었지만, 경건한 형제의 기도를 받게 하심은 그를 낮추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주님의 은혜로 시력이 회복이 되고 나서, 구원을 받고 나자 사울에게 사명을 주십니다. “그가 또 가로되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이 너를 택하여 너로 하여금 자기 뜻을 알게 하시며 저 의인을 보게 하시고 그 입에서 나오는 음성을 듣게 하셨으니 네가 그를 위하여 모든 사람 앞에서 너의 보고 들은 것에 증인이 되리라. 이제는 왜 주저하느뇨? 일어나 주의 이름을 불러 세례를 받고 너희 죄를 씻으라’ 하더라”(14-16절)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진리 둘을 깨닫습니다. 하나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주님을 만난 것으로 다 된 것이 아니라,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말이 세례를 받아야 죄 사함을 받고 구원 받는다는 뜻이 아니라, 정말 구원 받은 사람이라면 세례를 당연히 받아야 하며, 죄 씻는 회개를 하여야 한다는 뜻입니다. 즉 사울이 주님을 만난 체험은 그를 믿음으로 인도하는 하나의 과정이지 체험 자체로 죄 용서를 받고 구원에 이르는 것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물론 주님을 체험한 사람이 회개하고 세례를 받지 않을 수가 없지요. 그런데 사울에게 이런 극적인 체험이 필요했던 이유는 그가 그만큼 완악하고 교만했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두번째는 주님을 만나고 거꾸러져서 회개하고 세례를 받은 후에는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증인의 삶을 살아야 하는 사명이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회심하고 변화를 받은 후에 삶의 새로운 목적과 방향이 정해진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경향가든 교우 여러분!
오늘 본문 9절에 보면 사울 옆에 여러 사람들이 있었지만 오직 사울만 주님의 음성을 듣고 만나는 체험을 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각자 다 고유한 체험을 주십니다. 모두 똑 같은 체험이 아닙니다. 예를 들면 디모데는 모태 신앙이었지만 거짓이 없는 믿음이 있어 자주 주님을 체험하고 눈물로 하나님을 섬겼다고 합니다(딤후 1:4-5). 분명한 것은 어떻게든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것입니다. 이 만남이 참된 회개로 이어져서 구원에 이르고 변화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과거에 주님을 만난 간증이 있을 것입니다. 영적 신비한 체험 말입니다. 만약 없었다면 이 시간이 그런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아니면 앞으로 여러분들에게 반드시 그런 시간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사모하십시오. 그리고 자신을 다 내려 놓으십시오.
아니 과거에 그런 경험이 있으신 분들은 오늘날도 계속 그 만남은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또다시 믿기 전 육신의 모습이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과거에 아무리 체험이 많다 하더라도 지금 주님을 만나지 못하면 또 자기 의를 나타내며, 자기 열심으로 종교생활을 하려고 하게 됩니다. 죽어 있어야 할 송장이 다시 벌떡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정말 주님을 만나고자 하는 간절한 갈망으로 설교를 듣는 가운데, 매일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가운데, 찬양과 기도 가운데 우리는 계속 주님과의 만남이 있어야 합니다. 성령 체험이 있어야 합니다. 더욱 하나님을 알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계속 변화를 받고 주님을 닮아가며, 참되고 바른 신앙생활 가운데 증인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런 은혜가 저와 여러분에게 충만하기를 축원합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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