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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 태일 목사
작성일 2009-04-11 (토) 04:00
분 류 주일설교
ㆍ조회: 1971    
[4/10/09] 정사기념예배
정사기념예배
울며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 (눅 23:27-28)
    지난 종려주일에 예루살렘 성을 보시고 우시는 예수님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잘못된 믿음, 불신앙을 보시고 그들에게 다가올 심판을 생각하며 우시는 예수님을 말입니다. 오늘 저녁,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날을 기념하며 드리는 이 시간에는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시는 주님을 따라가는 몇 여인들이 슬피 울며 십자가를 따라가는 모습을 묵상해 보기 원합니다.
    본문의 문맥은 1절부터 25절까지 예수님이 어떻게 해서 사형 언도를 받게 되셨는지를 자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빌라도에 의하여 행해진 이 재판은 법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보더라도 즉시 그 잘못을 지적해 낼 수 있을 정도로 불법한 재판이었습니다. 우리 예수님이 죄가 없으신 분임에도 재판정에 서셨다는 점에서 이 재판은 시작부터가 잘못된 재판이었습니다. 재판도 사람의 일인지라, 혹 실수로 죄 없는 자를 잡아 재판정에 세우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무죄가 입증이 되면 그를 풀어주어 한 사람이라도 억울하게 벌하지 않는 것이 법의 정신인데, 빌라도는 예수님이 무죄인줄 알면서도 사형을 언도했다는 점에서 불법입니다. 그래서 23절에 보면 법이 이긴 재판이 아니라 백성들의 외치는 소리가 이긴 재판이라고 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실제로 살인하고 민란을 일으킨 죄수 바라바를 풀어준 형평성이 없는 재판이라는 점에서도 불법한 재판이었습니다.
    결국 예수님은 십자가 사형 언도를 받아 자신의 무거운 십자가, 약 120 kg, 260 lb 에 해당하는 십자가를 지시며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십니다. 그 전날 밤 기도하시던 겟세마네 동산에서 체포되시어 밤새도록 대제사장 가야바의 뜰에서 심문과 모욕과 매맞음을 당하신 후, 새벽이 되어 빌라도에게 끌려가서 온갖 심문을 받으시다가 갈릴리 분봉왕 헤롯에게로 끌려가셔서 온갖 모욕과 고초를 당하신 후, 다시 빌라도에게 끌려와서 사형언도를 받고 심한 채찍질과 수모를 당하시고 난 후 십자가를 메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금요일 이른 아침의 일이었습니다. 목요일 저녁 최후의 만찬 이후로 아무것도 잡수시지 연약한 몸으로, 그 혹독한 심문과 채찍질을 당하신 예수님의 어깨 위에 그 무거운 십자가 형틀이 메워졌습니다. 사실 그처럼 매맞아 피투성이가 되고, 밤잠도 못 주무신 몸으로 그 중한 십자가를 지고 가시 면류관을 쓰시고 형장까지 올라가신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이 수난의 과정에는 철저히 주님 자신의 인간 되심에 충실하게 고통을 받으심으로 희생제물로서의 우리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하심을 풀어드려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고 가면서 여러 번 쓰러지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저희가 예수를 끌고 갈 때에 . . .”(26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러가지 이유로 십자가 행렬이 지체되자 로마 군병이 옆에 가던 구레네 시몬이라는 자에게 대신 지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십자가를 따라 힘없이 쓰러질 듯 걸어가시는 예수님 뒤에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따라가고 있었습니다. “또 백성과 및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따라오는지라”(27절). 하나는 백성들이고, 또 다른 무리는 주님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들입니다. 수난 당하시는 주님을 따라가는 이 큰 무리들은 줄을 따로 나누어 선 것도 아닐텐데, 성경은 굳이 두 부류로 나누고 있습니다.
여기서 ‘백성’이라고 표현된 사람들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성경은 말합니다. “백성은 서서 구경하며 관원들도 비웃어 가로되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의 택하신 자 그리스도여든 자기도 구원할지어다 하고”(35절), 또 “이를 구경하러 모인 무리도 그 된 일을 보고 다 가슴을 두드리며 돌아가고’(48절) 하였습니다.
결국 십자가의 주님을 따르던 사람들 가운데 ‘백성’이라고 표현된 무리들은 주님의 십자가 처형을 구경하러 모인 사람들이었습니다. 아이러니칼한 것은 그들도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와 같이 예수님의 뒤를 따랐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이 장면을 오늘날 적용을 해 본다면, 이 백성들은 결코 예수님에 대하여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 아니라, 예수님에 대하여 관심이 있는 사람들 가운데 형식적인 신자들의 모습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주님을 십자가 못 박기 위하여 모함을 하고 채찍질을 하던 불신자들은 지금 예수님을 그 앞에서 끌고 갑니다. 또 주님이 형벌을 받든지 말든지 관심이 없는 사람들은 이 골고다 언덕 오르는 길목에 모이지도 않았고, 십자가를 따라가는 무리에 섞이지도 않았습니다. 이 백성들은 적어도 십자가 처형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혹시나 해서 좇아가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한 때 광야에서 이적으로 베풀어주시던 보리떡과 물고기를 먹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주님께서 섬기시던 손으로 병을 고쳐주시고 싸매어 주시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바로 종려주일에 예루살렘 성에서 소리치며 환호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처참하게 수난당하시며 끌려가시는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고 있습니다. 요즘 말로 하자면 귀에 아이팟을 꽂고 음악을 들으며 껌을 씹으며 옆 사람과 히히덕 거리며 수난당하시는 주님의 뒤를 따라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누구 때문에 지금 그리스도께서 머리에 가시관을 쓰시며 골고다 언덕에 올라가는 것입니까? 죄 없으신 그 분께서 누구 때문에 채찍에 맞으셨습니까? 누구 때문에 십자가 상에서 양손과 양발에 큰 못을 박히시며 6시간의 고통을 겪으셨습니까? 버린 그 백성들 때문이 아니었습니까?
지금도 십자가에 조금도 관심이 없는 사람은 교회에 나오지를 않습니다.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은 우리 기독교 신앙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그런 분들의 죄를 위하여, 우리 죄를 위하여 지금 대신 고통을 받고 계신 것입니다.
평생 우리 같은 죄인들을 위하여 사셨지만, 그 분에게 남은 것이라고는 잠시 후 제비 뽑는 군병들에게 나누어줄 옷 한벌에 둘러싸인 육체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남은 육체마저도 우리를 위하여 화목제물로 찢으시기 위하여 지금 골고다 언덕을 오르시고 계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이 받으신 고난은 우리 모두의 형벌 받아 마땅한 죄악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구경하며 따라 올라가고 있습니다. 어떻게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 구경거리가 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이 십자가의 의미를 진정으로 알고 체험한 사람들이라면 그 십자가의 사랑 앞에서 할 말을 잃고 아이작 와츠처럼 이렇게 찬송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나 십자가 대할 때에 그 일이 고마워 내 얼굴 감히 못들고 눈물 흘리도다
눌 울어도 눈물로써 못 갚을 줄 알아 몸 밖에 드릴 것 없어 이 몸 바칩니다.

그래도 그나마 십자가를 따르던 무리들 가운데서는 진실한 신자들이 있었습니다. 백성들과는 다른 태도로 십자가를 따라가고 있었습니다. 단지 구경하기 위하여 따라가는 사람들이 아니라, 성경은 “그를 위하여”(27절) 따라가는 사람들이었다고 적고 있습니다. 어떻게 지금 십자가를 뒤따라 가는 것이 주님을 위한 일이 될 수 있겠습니까? 이 여인들이 애원한다고 해도 로마 병정들이 주님을 풀어줄 리 없습니다. 슬피 운다고 해도 주님의 고통이 덜해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이 여인들은 “예수님을 위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따라 오는지라”고 하였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은 누구를 위하고 있습니까? 무엇을 위하고 있습니까? 백성들처럼 구경을 위하는 자들입니까? 아니면 이 여인들처럼 그리스도를 위하는 이들입니까? 그들이 가슴을 치며 슬피 울었던 까닭은 그 동안 받은 은혜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백성들도 받은 은혜들이 있었지만 잊고 있었고, 더 많은 바람 때문에 구경만 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들은 그 동안 주님께서 자기를 얼마나 사랑했었든지 회상하며 가슴을 치고 통곡합니다. 아니 그 사랑 때문에 자신들도 주님을 전정으로 사랑했기에 웁니다. 사랑하는 주님이 큰 고통 속에 십자가 처형을 당하니 말입니다. 그러니 십자가 앞에서 어떻게 떠들고 히히덕 거리며 웃으며 구경한다는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우리가 만약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로 알고 체험했다면 도무지 우리 자신을 위하여 살 수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 한없는 사랑을 입은 우리가 어떻게 주님이 아닌 다른 것들을 사랑하며 살 수 있다는 말입니까? 우리가 어떻게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한 이 세상의 손을 잡고, 사탄 마귀들과 짝하여 그리스도의 고난을 구경하듯 바라보며 살아갈 수 있다는 말입니까?
어쩌면 그래서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28절)고 하신지 모르겠습니다. 오늘날 안타깝게도 십자가 고난의 구경꾼으로 신앙생활하는 자들을 위하여 울며 통곡하라고 하시는 것은 아닌지 말입니다. 십자가의 사랑을 인간적인 사랑보다 더 천한 것으로 여기며 사는 백성들을 위하여 울라고 말입니다.

사랑하는 경향가든 교우 여러분!
그 날 우리 주님은 이 여인들의 슬피 우는 소리를 귓전에 두신 채 우리들의 구원을 위하여 기꺼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구경하며 따라오던 백성들은 실망한 채 흩어졌고, 슬피 울며 따르던, 주님을 깊이 사랑하던 여인들도 모두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매달았던 피 묻은 십자가도 치워졌습니다.
그러나 지금도 주님의 몸된 교회 안에는 보이지 않는 골고다 언덕이 있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교회 안에 그 때처럼 두 무리가 섞여서 걸어가고 있는지 모릅니다. 고난 받으시는 주님을 구경하며 무슨 역사를 기대하며 따라가는 사람들과 십자가의 주님을 바라보며 가슴치며 슬피 울며 따라가는, 그 분을 위하여, 진심으로 주님을 사랑하며 십자가를 따라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여인들은 주님을 장사 지낸 후에도 무덤을 찾았습니다. 주님을 그리워했기에 말입니다.
당신은 어느 편에 속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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