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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 태일 목사
작성일 2008-11-04 (화) 00:23
분 류 주일설교
ㆍ조회: 1966    
[11/2/08] 은혜의 방편으로
은혜의 방편으로 (고전 11:23-29)
예수님께서 제정하신 성례(聖禮), 거룩한 예식에는 오직 두 가지, 세례식과 성찬식 밖에는 없습니다. 구약에 나오는 다른 예식들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가르침을 주시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율법을 완성하셨기에 우리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그리고 천주교에서 하는 전통 예식들 가운데서도 사도들을 통하여 계시의 말씀에 비추어보면 해당되지 않는 것이 많습니다. 오직 이 두 예식인, 세례와 성찬만이 예수님께서 직접 제정하신 의식(ceremony)입니다.
즉,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성경의 예식에는 근본적인 변화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구약의 성막, 성전도 없어지고, 제사도 예식으로서 그 의미가 없어지게 되었습니다. 심지어 안식일의 의미도 달라지게 되었습니다. 어떤 예식적인, 의식적인 요소로서 안식일(금요일 저녁부터 토요일 오후 해질 때까지)의 의미는 사라지고, 하나님을 예배하고 섬기는 도덕적인 의미로서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주일(the Lord’s Day)을 지키게 된 것입니다.
그 성례 가운데 오늘 우리가 참여하려는 성찬예식을 앞두고 본문을 통하여 그 성찬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기 원합니다. 사실 이 성찬은 예수님께서 공생애 사역 중 가르치신 모든 진리를 총체적으로 집약한 것입니다. 아니 우리가 그 당시 제자들처럼 말씀으로만 깨닫지 못할 수 있기에 실제로 보여주심으로 그의 교훈을 되새기고 기억하도록 한 것입니다. 주님의 몸을 상징하는 떡을 직접 입에 넣고 씹음으로 정말 ‘주님은 나의 죄를 위하여 죽으셨구나’ 하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고, 또 주님의 피를 상징하는 잔을 마심으로 촉감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는 것입니다. 사실 말씀만으로 은혜 체험을 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은혜의 방편으로, 은혜를 주시는 수단으로 거룩한 예식이 필요한 것입니다. 눈으로 직접 보고 먹는 과정을 통하여 하나님의 언약(약속)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것입니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구약의 성막, 성전이나 제사 제도도 모두 성례에 속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로 이러한 율법 의식은 성취되었습니다. 주님은 새로운 언약의 징표인 성찬을 하게 하셨고, 이것이 하나님 나라에서 우리가 하늘 나라의 포도주로 주님과 눈과 눈을 맞대고 교제할 것을 기다리는 준비를 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유명한 교부 성 어거스틴은 말하기를 ‘성찬은 볼 수 있는 말씀이니 말씀을 종이 위에 쓰듯 잔과 떡으로 눈 앞에 보이는 것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종교개혁가들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는 특별히 시각과 청각 등의 감각을 통하여 계시를 깨닫도록 하셨다. 말씀은 청각에 호소하고, 성례는 시각에 호소한다. 눈이 귀보다는 더 감각적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말씀에 성례를 첨가하심으로써 죄인이 도움을 받도록 하셨다’ 고 말했습니다. 참으로 이 성찬이야말로 ‘눈으로 보는 것과 귀로 듣는 것과 입으로 말하는 것과 몸으로 행하는 것으로서의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제로 증명한 것입니다.

이 성찬 예식을 제정하신 때는 주님께서 잡히시던 밤이었습니다(23절; 마 26:26-28; 막 14:22-24; 눅 22:19-20). 그 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유월절을 지키려고 어린 양을 잡아 먹으며 출애굽의 구속을 기념하는 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몇 시간 후면 제자들을 남겨놓고 떠나셔야 했습니다. 왜 하필이면 성찬의 제정하신 날이 그 밤이었을까요? 이유는 주님 편에서는 아무런 변화가 없지만, 제자들 편에서는 늘 동행해 주시던 예수님을 잃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 날 밤에 제자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심어줄 수 있는 성찬을 제정함으로써 제자들이 비록 주님과 물리적으로 떨어져 있다 하더라도 그 관계가 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깊이 심어주셨습니다. 성찬을 통해 주님을 붙들고 살아갈 수 있는 신앙을 그들에게 넣어주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23절하-24절) 하였습니다. 어떤 종류의 떡이었는지 자세하게 모르겠으나 당시 유대인들이 유월절에 먹던 빵, 누룩이 없는 무교병이 아닌가 생각합니다만 더 정확한 번역은 그들의 주식인 밥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이 떡은 본래 이스라엘 사람들이 주식으로 먹는 빵을 의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유월절이라 누룩이 없는 빵을 그날 밤에 함께 드신 것입니다. 그리고 축사, 즉 감사를 하나님께 드리면서 떼어서 제자들에게 주시면서 이는 너희를 위하여 이제 십자가에서 죽을 자신의 몸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빵이 그들의 생명을 유지하고 에너지를 공급하는 것이라면 그들 영혼의 양식이요 에너지원은 주님이심을 알려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계속하여 포도주 잔을 부어 나누면서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25절하)고 하셨습니다. 옛 언약은 인간의 행위를 담보로 세워진 것이지만, 새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구원을 약속받은 은혜의 언약입니다. 은혜언약은 행위를 담보로 세워진 옛 언약과 달리 믿음에 의존합니다. 마태복음 26장 28절에는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고 하셨습니다. 즉 포도주 잔은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 죄 사함의 피를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과 관계가 맺어진 것입니다. “다시 우리를 긍휼히 여기셔서 우리의 죄악을 발로 밟으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시리이다”(미 7:19)! 언약 백성이 누리는 최고의 은혜는 바로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힘입어 죄사함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찬의 가장 중요한 의미는 첫째, 예수님의 죽음을 기념하는 것입니다(25절). 그리고 그 죽음 전하기 위함입니다. 26절에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즉 우리가 산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어느 누구도 나를 대신하여 내 죄 때문에 죽어준 사람이 없습니다. 부모도, 남편이나 아내도, 사랑하는 친구도, 어느 누구도 내 죄 위하여, 나를 대신하여 죽어준 사람이, 죽어줄 사람이 없습니다. 오직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가장 고통스럽고 수치스러운 십자가에 자신을 내어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위대한 희생의 사랑 밖에는 없습니다. 이 사랑을 기념하기 위하여, 이 사랑을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전하기 위하여 성찬예식을 제정하신 것입니다. 교회가 이 성찬식을 행함으로 이 고귀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다시금 기억하고 기념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현재적으로 경험하는 것입니다. 이 예수님의 죽음을 기억하지 못하면 기독교는 기독교가 아닙니다. 교회가 아닙니다. 교회가, 성도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억할 때 죄를 깨닫게 됩니다. 내가 예수님을 죽인 장본인이라는 인식을 갖는 것입니다. 그래서 겸손하게 됩니다. 감사가 일어납니다. 주님을 사랑하며 주께 헌신할 마음이 생깁니다. 주를 위하여 교회와 이웃을 섬기려고 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이 귀한 십자가 죽음의 사랑을 전하려고 합니다.
둘째, 우리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축복하는 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예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예함이 아니냐”(고전 10:16)고 바울은 역설적으로 말했습니다. 성찬에 참여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생명에 동참한다는 뜻입니다. 그의 죽음과 부활에 참예함을 뜻합니다. 잔을 대하는 것이 새 언약의 표시라고 하였습니다. 이 피의 언약이라고 하는 것은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할 언약(약속)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피를 흘리심으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셨기 때문에 우리도 목숨을 걸고 이 언약을 지켜야 합니다. 죄인 중에 괴수와도 같은 우리들을, 사탄의 종으로 지옥에 가서 영원히 고통 중에 거할 수 밖에 없었던 우리들을 건져주시고 하나님의 자녀를 삼으셨기에 그 당하신 십자가의 죽음을 생각하며 자녀답게, 그리스도인(Christian)답게 신앙으로 살아야 합니다. 만일 세상 욕심이나 다른 유혹 때문에 이 신앙을 버리면 저주를 자초하는 것과 같습니다. 주님께서 이 세상에서 겪으셨던 모든 영적인 고통들, 이것들에 믿음으로 동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고난이 있어도 이 피의 언약을 저버려서는 안됩니다. 아니 성령을 받은 참된 그리스도인은 그럴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피로 생명을 받고, 예수님의 부활의 권능으로 훗날 부활의 영광에 동참할 신부들이 신랑되신 예수님과 연합하여, 언약을 맺었는데 저버릴 수 없습니다. 약속을 지켜야 합니다. 우리 존재자체가 부채덩어리 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 큰 은혜에 배은망덕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성찬의 참된 의미를 깨닫고 참여하면 마치 영적 양식처럼 은혜가 넘쳐서 우리의 영혼에 힘과 기쁨을 가져다 줍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사는 삶의 의미를 잘 깨닫게 해 줍니다. 더욱 하늘나라 소망을, 주님 다시 만날 날에 대한 소망을 새롭게 합니다. 할렐루야!

사랑하는 여러분! 그런데 주의하여야 합니다. 27-29절에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있느니라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 주의 몸을 분변치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무엇을 의미합니까? 우선 성찬의 의미를 제대로 알고 참여하라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의미를 깨닫는 자만이 참여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 장로교회에서는 세례를 받은 사람, 유아세례를 받은 사람은 입교를 한 자만 성찬에 참여하도록 합니다.
그리고 성찬을 기다리며 특별히 구별된 마음으로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준비를 하고 참여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성찬이 진정 은혜의 방편으로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 당시에는 예배 때마다 성찬식을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성찬식을 앞두고 누구와 원한 관계가 있거나 사소한 생각의 차이로 갈라지게 되었다면 화해하고 성찬에 참여하는 것이 바른 태도라는 것입니다. 마음 속에 원한과 미움이 가득차 있는 채로 성찬을 대한다면 이것이 자기에게 유익이 되지 않을 뿐이니라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십자가의 의미를 온전히 깨닫지 못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또 반복적으로 넘어지는 실수나 죄가 있다면 주님 앞에 참회하며, 용서를 확신하는 마음으로, 끊어버리겠다는 각오로 성찬에 임하라는 것입니다. 이번에 내가 믿음으로 성찬에 임함으로 이런 죄를 이길 수 있는 능력을 받게 되리라는 것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죄가 하나도 없는 사람만이 성찬에 참여할 수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저 우리가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인이었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도움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거룩한 예식을 행하기에 앞서 참맘으로, 겸손과 경외심으로 준비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우리 자신을 살피며, 참회와 겸손한 고백과 성령의 도우심을 간구함으로 정결케 하여야 할 것입니다. 혹시 너무 우리들이 세상적이거나, 정욕적이어서 잘못한 일들이 있었으면 부끄럽게 생각하면서 회개하십시다. 또 세상 일에는 쉽게 관계하고 열심을 내면서도 신령한 일들에는 무관심하고, 말씀을 순종하는 일에 열심을 내지 못했다면 그것도 회개합시다. 세상적인 축복은 악착같이 받으려고 부르짖으면서도 신령한 축복에는 별로 관심이 없어 구하지 않았다면 그것도 회개합시다. 뿐만 아니라 마음과 생각으로, 말로 남을 아프게 한 일이 있거든 그것까지도 회개합시다. 그리고 세례 받을 때의 서약, 교회에서 직분 받을 때의 서약을 할 때에 각오에 비하여 우리의 현실과 실상이 너무 동떨어져 있다면, 지키지 못하고 있다면 그것도 회개합시다. 또한 부모로서, 자녀로서, 형제 자매로서 부족하여 상처를 주었다면 용서를 구합시다. 만약 우리의 이웃, 형제, 자매들을 향해 미움의 칼을 품고 살아간다면 이는 하나님께 말할 수 없는 고통입니다. 회개합시다.

사랑하는 경향가든 교우 여러분!
구약의 제사 중에 화목제는 다른 제사와 구별되는 뚜렷한 특징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제사 이후, 예물을 드리는 자와 제사장과 하나님이 함께 그 예물을 먹었다는 것입니다(레 7:15-16). 예물을 드리는 자가 그 예물을 하나님과 함께 즐겼다는 사실이 성찬의 교제를 나타내 줍니다. 성찬에 참여한다는 것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성부 하나님과 함께 식탁을 나누는 것입니다. 물론 제사의 예물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 자신이라기 보다 그분이 행하신 일, 사역과 그 속성입니다. 그러므로 화목제 의미가 내포된 성찬식에 참여하는 것은 하나님과 함께 음식을 나누고 즐기는 일입니다. 뿐만 아니라 성도들과도 아름다운 교제가 이루어지는 제사였습니다. 이 얼마나 고귀하고 복된 일입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도 주님은 자신의 떡과 잔을 거저 받을 자를 찾고 계십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떡과 잔을 무가치하게 여기고 거절하고 있습니까? 믿음으로 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이미 믿음으로 받으신 언약의 백성들이신 여러분! 오늘 성찬예식을 앞두고 그 참된 의미를 다시 한번 깨달았습니다. 성찬식 자체가 이 예식에 참여하는 우리를 성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믿음과 사랑으로 받을 때 은혜의 방편으로서 의의를 갖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서 성령께서 성찬을 믿음과 사랑으로 받을 수 있게 역사하셔야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기억하는, 기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죽음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이었습니다. 주님과 맺은 언약을 잊지 않고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정결한 신부로서, 자녀로서 말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그 죽음을 기억합시다. 그 죽음을 기념합시다. 그 십자가를 전합시다. 다시금 십자가의 고난에 동참하기를 결심합시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을 준비하십시다. 우리 자신을 살펴봅시다. 남을 용서하지 못하여 아직도 원한이 있다면 그것을 해결합시다. 용서할 마음을 달라고 합시다. 세상적인 것, 정욕적인 것, 교만한 것, 생각으로나 말로나 행동으로 실수한 것까지 회개하는 마음으로 성찬에 임합시다. 올해도 다 지나갑니다. 이제 두 달 남았습니다. 새해를 맞이하면서 결심한 것들을 기억합니다. 성령께서 도우심으로 큰 은혜를 우리에게 베푸실 것입니다. 다시금 우리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힘을 내고 일어서게 하실 것입니다. 세상을 이길 능력과 기쁨을 주시며, 삶의 의미를 다시금 새롭게 하실 것입니다. 십자가를 전하게 하실 것입니다. 축복하실 것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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