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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 태일 목사
작성일 2008-12-11 (목) 05:49
분 류 주일설교
ㆍ조회: 1926    
[12/7/08] 죽음과 그 이후
죽음과 그 이후 (시편 49:12-20)
우리 인간에게는 두 종류의 삶이 가능합니다. 하나는 우리 인간이 참으로 천사보다 더 존귀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우리 인간이 짐승처럼 욕망을 쫓아 사는 것입니다. 그 갈림길이 어디에 있습니까? 진리를 ‘깨닫느냐’, ‘깨닫지 못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아는 것’하고 ‘깨닫는 것’하고는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진리를 그냥 지식적으로 아는 것과 깨닫고 사는 것은 다르지요. 그래서 아는 것을 잘 깨닫고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알면서도 잘 깨닫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특별히 죽음에 관하여는 그렇습니다. 사실 자신이 죽을 것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깨닫지 못하고 살기에 짐승처럼 욕망을 쫓아 사는 것입니다.
바로 오늘 본문 마지막 구절,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20절) 라는 말씀이 주는 의미입니다. 인간이 분명히 존귀한 존재인데, 진리를 깨닫지 못할 때에는 우매한 짐승과 다를 바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죽음과 그 이후를 깨닫지 못하니, 본문 첫 구절에도 “사람이 존귀하나 장구치 못함이여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12절)라고 이 시편 기자는 성령의 감동으로 적고 있습니다. 여기서 사람이 존귀하다는 뜻은 존귀하게 살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을 존귀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짐승처럼 절제하지 못하는 욕망과 분노입니다. 죄성으로 인한 욕망과 분노를 그대로 발산하며 사는 삶이 짐승의 삶과 같다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죽음과 그 이후를 인식하고 사는 삶과 마치 이 땅에서 영원히 살 것인 양 사는 삶은 엄청나게 차이가 있습니다. 시편 49편의 기자는 죽음을 깨닫지 못하고 돈, 재물을 의지하고 사는 자의 어리석음을 탓하고 있습니다. “자기의 재물을 의지하고 풍부함으로 자긍하는 자는 아무도 결코 그 형제를 구속하지 못하며”(6-7절상) 합니다. 아마 사람이 이 세상에 살면서 가장 든든한 일이 있다면 돈을 많이 갖는, 재물을 많은 쌓는 일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재물이 많으면 여러가지 많은 것들을 할 수 있는 여유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재물의 힘으로 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한평생 재물을 의지하고 살아온 사람은, 그 형제는 쌓아둔 재물이 통하지 않는 때를 만납니다. 바로 죽음의 순간입니다. 죽음을 막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무서운 것은 죽음 그 이후에 있을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 하였습니다. 그 때의 심판이야말로 죄악으로 그를 에우는 환란의 날이 될 것입니다(5절). 아무리 재물이 많아도 하나님의 심판에서 건져주지 못합니다.
돈으로 많은 것들을 살 수 있지만, 영생만은 살 수 없습니다. 18절에도 보면 돈으로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은 자기를 위하여 축하하며 사람들의 칭찬을 듣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돈을 주면 사람들은 시키는 대로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죽음과 그 이후의 고통은 피할 수 없습니다. 돈 가지고 영원히 고통 없는 곳에서 살 수 없습니다. 성경에서 ‘영생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 안에 들어가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사는 것을 말하는데, 어떻게 돈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살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돈으로 인생을 살겠다고 생각한 사람은, 돈을 목적으로 인생을 사는 사람은 아예 처음부터 단추를 잘못 끼운 것입니다. 그 사람은 우리 존귀한 인생의 가치를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13절에서 “이 행위는 우매하다”, 즉 어리석다 라고 하며, 14절에서는 “사망이 저희의 목자일 것이라”고 합니다. 여기 사망이라는 것은 육체적인 죽음 뿐만 아니라 영원히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하고 비참한 상태로, 고통스러운 상태로 영원히 있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들도 이 세상에 살 때에는 하나님의 일반 은혜를 누리고 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햇빛도 주시고, 비도 주시고, 공기도 주시고, 건강도 주시고, 때때로 부귀와 영화도 주시기도 합니다. 그러나 죽음 이후를 생각하지 않고 자기 욕심을 위하여 산 자들은 죽음 그 이후에는 하나님의 일반 은혜마저 박탈당하고 영원히 어두운 곳에서 이를 갈면서 있게 됩니다(마 8:12; 24:51). 그래서 16-17절에 “사람이 치부하여 그 집 영광이 더할 때에 너는 두려워 말지어다 저가 죽으매 가져가는 것이 없고 그 영광이 저를 따라 내려가지 못함이로다”라고 하였습니다. 일단 사람이 죽으면 그는 생전에 가지고 있던 돈을 한푼도 손대지 못합니다. 그의 모든 재산은 다른 사람의 것이 되고 맙니다. 어머니 뱃 속에서 벌거벗은 채로 세상에 왔다가 벌거벗은 채로 가는 것입니다. 주위 사람들도 그가 살아있을 때에는 그를 부러워하는 선망의 대상이었는지 몰라도 죽을 때에는 하나도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물론 재물이 많은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지요. 얼마든지 잘 선용하여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중요하게 보시는 것은 이 땅에 많은 것을 쌓아놓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쌓아두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아무리 돈이 많아도 쓸 줄을 모릅니다. 그래서 재물이 많은 것보다 믿음을 가지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내가 만일 돈이 없으면 다른 것으로도 얼마든지 사랑을 표현할 수 있습니다. 찾아가서 말로 위로할 수도 있고 아니면 몸으로도 봉사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다 하늘에 쌓아두는 상급입니다.

그런데 왜 어리석은 사람들은 죽기 전에 죽음 그 이후를 대비하지 못합니까? 죽음을 생각하기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당장 살아있어서 모든 것을 누리고 사는 것이 너무 좋아서 최후의 순간까지 생각하지 않습니다. 잠시 생각한다 하더라도 ‘죽으면 그만이지’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은 죽음을 미리 당겨놓고 생각합니다. 진리를 깨닫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심판을 받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죄를 위하여 이미 십자가에서 다 치루신 형벌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영혼을 구속하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시편 기자는 “정직한 자가 아침에 저희를 다스리리니 저희 아름다움이 음부에서 소멸하여 그 거처조차 없어지려니와 하나님은 나를 영접하시리니 이러므로 내 영혼을 음부의 권세에서 구속하시리로다”(14절하-15절)라고 하였습니다. 시편에서 때때로 나오는 정직한 자의 의미는 거짓말하는 자가 아니라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바른 관계를 가진 의인 즉 믿는 자를 가리킵니다.
이 세상에서 죽음 그 이후를 생각하지 않고,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돈을 의지하거나 명예, 권력 등을 의지하고 산 사람들은 음부의 권세 아래 영원한 어두움으로 가지만, 돈이나 명예, 권력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주님을 의지하고 산 사람들은 아침이 되면 14절 말씀처럼 어리석게 살다가 간 사람들을 다스리게 될 것입니다. 밤이 지나면 반드시 아침이 찾아옵니다. 암흑을 내몰리고 빛이 찾아옵니다. 진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을 죽음에서 영원한 구원, 완전한 구원으로 인도하실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네가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롬 10:9) 하였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우리는 부활의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2000여년 전에 죽음의 권세를 이기신 것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과 맺은 언약은 우리 믿는 자들에게도 일어날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롬 6:5) 하였습니다.
바로 이러한 깨달음이 우리 인생의 모든 것을 바꾸어 놓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에게 죽음은 암흑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계시는 본향 집으로 나아가기 때문입니다. 확실한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경향가든 교우 여러분!
제자훈련 개관에 보면 우리 인생은 다 죽음을 향하여 가고 있음을 강조합니다. 여러분은 앞으로 얼마나 남았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무도 몇 십년 남았다고 장담할 수는 없지요. 6개월, 1년, 2년, 5년, 10년, 30년 남았겠습니까? 모세는 “우리의 년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 뿐이요 신속히 날아가나이다 …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하소서”(시 90:10,12)라고 하였습니다. 정말 얼마나 빨리 지나가는 시간들입니까? 벌써 올해도 12월을 맞았고, 성탄의 노래들이 라디오 방송에서 계속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모두에게 다가오는 죽음과 그 이후를 생각하지 않고, 준비하지 않고 그냥 살아가십니까? 오늘 시편 49편의 기자가 우매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처럼 인생을 돈, 재물을 모으기 위하여 사십니까? 죽은 후에 하나도 가져가지 못할 것들을 위하여 사십니까? 조금만 지혜롭다면 죽음을 준비하고 그 이후의 삶을 위하여 살지 않겠습니까? 예수님 말씀처럼 하늘 나라에 쌓아둘 것을 위하여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선은 믿음이 있으십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믿으십니까? 아직도 믿지 못하십니까? 오늘 시편 49편 1절에도 그런 분들을 초청하고 있습니다. “만민들아 이를 들으라 세상의 거민들아 귀를 기울이라 귀천 빈부를 무론하고 다 들을지어다”라고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향하여 인생의 본질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게 하십니다. 그런데 진리의 말씀을 듣고, 깨닫고, 믿는 자는 죄악이 에우는 환란 날에 두려워하지 않습니다(5절). 예수님께서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고 하였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깨닫고, 이 진리를 믿는 자는 죽음 이후에도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삽니다. 믿으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런데 이미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고, 하늘 나라를 믿고 그 소망 가운데 사사는 성도 여러분!
정말 죽음을, 그 이후의 시간을 준비하고 사십니까?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서 범죄하는 것에 대한 대가는 이 세상에서 다 치르고 주님을 만납니다. 그러나 우리 믿는 자들도 주님을 만나면 주님과 계산해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하늘 나라에 쌓아둔 것들입니다.
믿는 자들도 죽은 후에 이 세상에 쌓아둔 재물, 명예, 권력 등을 가지고 못 갑니다. 그저 다 두고 가야 합니다. 그런데 성도가 죽고 나면 무엇이 남습니까? 남는 게 있습니다. 오직 성도가 살아있을 때에 주님을 사랑하기에 다른 사람을 사랑한 것만이 남습니다. 그런 맥락에서 예수님께서 영생과 영벌의 교훈을 주시면서 비유로 말씀하시기를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 25:40)고 하시면서, 저주를 받아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갈 자와 영생에 들어갈 자를 구분하셨습니다. 왜 실천하는 사랑을 권면하는 문맥 속에 영생과 영벌을 말씀하셨을까요? 이유는 사랑해야 구원을 받는다는 교훈이 아니라, 구원을 받은 성도들에게 반드시 나타나야 할 사랑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주님 사랑한다면 이웃을, 형제 자매를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 사랑한 것이 죽음 이후에 하늘 나라에 쌓아두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정말 믿음이 있다면 다른 사람들을 많이 사랑해야 합니다. 이 세상 한평생 살면서 남을 사랑할 줄 모르고 자기 욕심만을 위하여 산 사람들은 짐승들처럼 멸망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존귀한 인간의 모습을 회복하고,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영혼의 가치를 되찾게 해주는 사람은 영원한 복을 하나님 앞에서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마지막 재림을 경고하시면서 우리 주님의 다시 오심은 도적 같이 올 것이니 깨어 예비하고 있으라 하시면서,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줄 자 누구뇨 주인이 올 때에 그 종의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마 25:45)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양식이 무엇을 말합니까? 저는 사랑의 섬김과 봉사라고 믿습니다.
즉, 죽음과 그 이후를 준비하는 종들은 충성되고 지혜롭게 하나님의 집의 사람들을 섬기고 봉사합니다. 주님의 몸된 교회를 사랑하고, 주께 충성하듯이 지혜롭게 교우들을 사랑하고 삽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들을 가지고 말입니다.
물론 이 길은 쉽지 않습니다. 좁은 길이요, 좁은 문입니다. 내 죄성과, 자아와 싸워야 하는 길입니다. 이 세상 공중 권세를 잡은 사탄, 마귀들과 싸워야 하는 길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치열하게 싸우고 나서 온 몸에 상처가 있다 하더라도, 아니 결국 그렇게 싸우다가 죽더라도 사랑의 섬김과 봉사가 많이 남는다면 그 인생이야말로 값진, 고귀한 인생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삶에서 존귀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빌 1:20) 라고 하였습니다.
죽음과 그 이후에 대한 진리를 깨닫고, 그 날을 준비하고 살아가는 은혜가 충만하기를 축원합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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