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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태일 목사
작성일 2012-03-05 (월) 10:26
분 류 주일설교
ㆍ조회: 1730    
오늘날의 빌라도는 (요 18:28-40)
고사성어 가운데 일석이조(一石二鳥)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돌 하나로 새 두 마리를 잡는다는 뜻입니다. ‘꿩 먹고 알 먹고’라는 속담처럼 한 가지 일을 해서 두 가지 이득을 본다는 일거양득(一擧兩得)이라는 말과 같은 의미입니다. 이런 생각에 사로잡힌 사람들 가운데 두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으려고 양 다리를 걸치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보이다가 한 마리도 못 잡게 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경에도 두 마음을 품은 자를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라고 합니다(약 1:8). 예수님께서도 산상수훈 첫 설교에서 사람들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마 6:24). 아니 성경 전체의 교훈이 하나님 아니면 사탄, 성령 아니면 악령, 의의 종이 아니면 죄의 종, 하나님 나라 아니면 세상 나라로 뚜렷이 구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성도들에게 온 마음(全心)으로, 한 마음(一心)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것을 제일 첫째 되는 계명으로 지키라고 하였습니다(신 6:5; 마 22:37). 이렇게 하나님에게 마음을 다 쏟아 붓는 것이 믿음입니다.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렘 29:13)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전심으로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을 만납니다. 두 마음을 품으면 만날 수 없습니다. 아니 하나님께서 싫어하십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체포 당하시고, 안나스 앞에 끌려가 심문 받으신 후에, 요한복음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대제사장 가야바 앞에서 심문을 당하시고(마 26:57-67; 막 14:53-65), 산헤드린 공의회에서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심으로 신성모독죄로 판결 받고 로마 총독 빌라도에게 넘겨져 재판을 받으시는 장면입니다. 이 본디오 빌라도는 로마 제국 티베리우스 황제의 총애를 받던 최고행정관 세야누스의 도움으로 속국인 유다 나라에 파송된 총독으로 주후 26년부터 36년까지 다스렸습니다.
   그런데 우스운 것은 재판정에 원고와 피고가 함께 있지 않고, 피고만 있습니다. 원고인 유대인들은 유월절 만찬을 맞아 이방인의 재판정에 들어가면 더럽혀 진다고 하여 들어가지를 않고 바깥에서 고소하고 있는 것입니다(28절). 그러니까 빌라도는 예수님께 질문할 때에는 재판정 안으로 들어가고, 또 고소하는 유대인들의 말을 들으려면 밖으로 나오면서, 즉 들락날락 하면서 재판을 하는 것입니다(29절, 33절). 얼마나 보기가 좋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제 살펴보겠지만 빌라도를 가만히 보면 그는 인생을 이렇게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하면서 우유부단하게 살았던 것입니다.
   빌라도가 재판정 밖으로 나아가 유대인들에게 무슨 죄목으로 예수님을 고소하느냐고 물으니(29절), 행악자라고만 하지 분명한 죄목을 밝히지 않습니다(30절). 그래서 너희들도 법이 있으니까 그 유대법에 의하여 재판하라고 합니다(31절상). 그러자 충격적인 말을 듣습니다. “우리에게는 사람을 죽이는 권이 없나이다”(31절하)라고 했습니다. 즉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기 위하여 고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법정에서는 신성모독죄로 판결했지만, 신성모독죄가 로마인들에게는 전혀 죽일 죄가 되지 않기에 ‘유대인의 왕이라고 한다’는 죄목으로 지금 고소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빌라도가 주님에게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33절)에 물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현재 로마제국이 유대 나라를 다스리고 있어서 로마 황제가 유대 나라의 왕이기에 반역죄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로마 제국의 반역죄와 같은 큰 죄목으로로 판결이 나야 십자가 처형이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의 산헤드린 공의회에서는 유대법에 의하여 신성모독죄는 돌로 쳐서 죽이도록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로마 제국이 그런 죄목으로 사람을 함부로 죽이도록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32절에서 로마 법정에서 사형 언도를 받아 십자가에서 죽게 되는 것이 이미 예수님 자신이 어떻게 죽임을 당할 것인지 예언한 말씀의 성취라고 하였습니다.
   빌라도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라는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그 전의 안나스나 가야바 앞에서 와는 달리 상당히 인격적으로 그를 대하면서 대답하십니다. “네가 스스로 하는 말이냐 다른 사람들이 나를 대하여 내게 한 말이냐”(34절)? 그랬더니 빌라도가 자신은 유대인이 아니고, 유대 사람들과 대제사장이 고소하여 데리고 왔으니 도대체 무슨 일을 했느냐고 묻습니다(35절). 그러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기우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36절)고 말씀하셨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예수님은 왕이지만 눈에 보이는 이 세상 나라, 유대나 로마나라의 왕이 아니신 것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주님의 종들이, 천사들이 싸워서 자신을 붙들리지 않게 했을 것이고 그들을 다 처단하여 빌라도 앞에 끌려오지도 않았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빌라도에게 진지하게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그리고 자신의 왕권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는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아마 예수님이 횡설수설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재차 묻습니다. “네가 왕이 아니냐”(37절상)? 그러자 예수님께서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듣느니라”(37절하)고 대답하셨습니다.
   즉 하나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나라가 아니고 눈에 보이지 않는 나라인데, 그 나라에 들어가는데 중요한 것이 진리라는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 나라에 속한 자는 이 진리를 듣는다고 하십니다. 여기 듣는다는 헬라어 원어의 뜻은 히브리어에서처럼 순종의 의미가 함께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진리는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살아계시며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들에게 원하시는 것이 있는데, 바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믿는 것입니다.
   지금 빌라도는 생전 처음으로 예수님으로부터 진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빌라도는 “진리가 무엇이냐” 묻고는 재판정을 나갔다고 합니다(38절). 진리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알기 위해서 물은 것이 아닙니다. ‘그게 무슨 말이냐?’라는 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말로 판단하고 자리를 피한 것입니다. 그는 너무 좋은 기회를 놓치고 말아 버립니다. 심령이 부한 세상 권력에 빠져있는 사람이었기에 진리를 들을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밖에 있었기에 얼마든지 예수님과 개인적으로 대화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혹시 여러분 가운데 아직 진리를 알지 못하거나 예수님을 개인적으로 만나지 못하셨으면 만날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마십시오. 항상 기회가 있는 것 아닙니다.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 6:2하)라고 하였습니다.

   빌라도는 다시 재판정 밖으로 나아가 유대인들에게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노라”(38절하)고 하면서, 머리를 씁니다. 당시 유월절이 되면 총독이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하여 죄수 한 명을 석방하는 관례가 있었는데, 그 관례대로 “유대인의 왕” 예수님을 놓아주면 어떻겠느냐고 말입니다(29절). 사실 빌라도로서는 예수님에게 상당한 호의를 베푸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빌라도에게 필요했던 것은 주님을 향한 그런 호의가 아니라 예수님으로부터 진리의 말씀을 듣고 믿었어야 했습니다.
   헌데 그런 처신이 일석이조, 일거양득을 보려고 잔꾀를 쓴 모양이 되었습니다. 공의도 세우고 민심도 얻겠다는 속셈이었습니다. 그러자 유대 군중들은 소리질러 외치면서 예수님이 아니라 강도 바라바를 놓아주라고 합니다. 사실 빌라도는 그들이 예수님과 비교도 안되는 살인 강도인 바라바를 풀어주라고 외치리라고는 생각조차 못했습니다. 그래서 아시다시피 결국에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하고 맙니다. 심지어 그의 아내조차 불길한 꿈을 꾸게 되어 말렸지만(마 27:19), 군중들의 여론에 밀려 예수님을 내어주고 말았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경향가든 교우 여러분!
   혹시 오늘날 우리들 가운데 이런 빌라도의 모습은 없는지요? 빌라도의 우유부단한 모습, 이랬다 저랬다 하는 모습, 그의 처신을 보면서 느끼는 것이 없습니까?
   스스로 우리 모두의 마음을 판단해 보기 원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나뉘어 있지는 않은지요. 주님을 향한 사랑이 나뉘어 있지는 않은지요. 그 마음이 전심입니까? 일편단심입니까? 아니면 세상에도 적당히 한 발을 담그고, 한 발은 교회에 담그면서 종교생활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사도 요한의 환상 가운데 나타나신 예수님께서 라오디게아 교인들에게 꾸짖었던 것처럼, 차갑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은 미지근한 신앙생활입니까(계 3:25-26)? 우리는 사회생활의 대인관계에서도 우유부단한 사람들보다 화끈한 사람을 좋아하지 않습니까? 맺고 끝는 것이 분명한 사람을 좋아하지 않습니까?
   지난 주일에도 말씀드렸듯이 기왕에 믿는 것 화끈하게, 확실하게 믿기를 바랍니다. 소극적으로 믿지 마시고, 적극적으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만의 궤계로 유대인들이 다 죽게 되었을 때, 모르드개라는 사람은 조카 에스더가 그녀의 남편 아하수에로 왕에게 소극적인 태도를 취할까봐, 염려하며 이렇게 권면하였습니다. “이 때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대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려니와 너와 네 아비 집은 멸망하리라 네가 왕후의 위를 얻은 것은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아느냐”(에 4:14)? 그 때에 에스더는 모르드개의 염려가 한낮 기우에 불과하다는 듯이 그에게 답하기를, “당신은 가서 수산에 있는 유대인을 다 모으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되 밤낮 삼 일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소서 나도 나의 시녀로 더불어 이렇게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에 4:15-16)라고 하였습니다. 금식기도를 한 후에 죽기 밖에 더하겠느냐는 각오로 왕에게 나아가겠다는 말입니다.
   왜 성경에 이런 오래 전의 기사가 기록되어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습니까? 우리도 에스더처럼 죽기를 각오하고 하나님을 믿고 섬기라는 말씀입니다. 할렐루야!
   제발 빌라도처럼 군중들의 압박, 여론에 밀려 진리를 외면하지 마십시오.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해줄까 하는 것보다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보실까 하는 것이 훨씬 중요하지 않습니까? 얼마나 많은 교인들이 사람을 의식하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사도 바울은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갈 1:10)고 고백하였습니다. 우리들의 입에서 이런 고백이 나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야 진짜 믿음의 사람이라고 인정 받지 않겠습니까?
   물론 하나님께 인정 받고,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성도는 시간이 지나면 결국에는 사람들에게도 인정을 받게 됩니다. 이 진리를 잊고 자꾸 사람을 통해, 정치를 통해, 권모술수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 하니까 오히려 문제가 더 커지는 것입니다. 아니 온 우주를 창조하시고 오늘도 절대주권으로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분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문제에 부딪히게 될 때 하나님께 나아가야 문제가 해결될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한번 역사하시면, 한번 사인만 주시면 끝나는 것 아닙니까? 그러므로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마시고,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셔서 문제들을 해결하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자꾸 잔머리 굴리지 마십시오. 빌라도는 잔머리를 굴리는 대표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총독까지 된지는 모르지만 자꾸 잔머리를 쓰니까 문제가 생기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는 사람이 자기 머리 굴리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다 보고 계신데, 얼마나 그 모습이 가소롭겠습니까?
   우리는 진리대로 밀고 나가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좁은 길이지만 정도(正道)를 가야 합니다. 진리를 고수해야 합니다. 말씀이 Yes 면 Yes 라고, No 이면 No 라고 해야 합니다. 우리가 진리대로 살면 하나님 앞에 거리낄 것이 없어서 담대하게 살 수 있으며 마음에 평강을 누리게 됩니다. 어찌하든지 진실해야 합니다.
   세상의 어떤 위협 속에서도 타협하지 마시고, 올곧은 길을 당당하게 가십시오. 말씀에 철저히 순종하십시오. 기껏해야 죽기 밖에 더하겠습니까? 정말 죽기를 각오하고 산다면 그 사람처럼 무서운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감히 사탄, 마귀들이 어쩌지를 못합니다. 승리의 비결입니다.
   하지만 빌라도 같이 살면 어떻게 됩니까? 그의 말년에 대하여 정확한 역사적인 기록은 없지만 내려오는 전승에 의하면 로마 칼리굴라 황제 때에 자살을 했거나, 네로 황제 때에 참수형을 당했다고 합니다. 얼마나 비참합니까? 뿐만 아니라, 초대교회 때서부터 오늘날까지 2000여 년 동안 수천 수억만의 사람들이 예배 시간 때마다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라는 사도신경을 고백함으로, 수없이 부끄러운 욕을 들어왔습니다. 아마도 가롯 유다 보다도 온 세상에서 가장 많이 저주를 받은 이름이 빌라도가 아닐까요?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날의 빌라도는 되지 마십시오. 선택은 여러분의 것입니다. 양자 택일이 싫어서 양쪽을 다 택하는 것은 사탄의 꾀임에 넘어가는 것입니다. 참된 성도라면 그럴 수가 없습니다. 그 중간을 택할 수도 없습니다. 믿음의 길에는 회색지대가 없습니다. 둘 중에 하나입니다. 어느 길을 갈 것인지, 누구의 말을 들을 것인지, 세상 나라 방법을 따르든지 하나님 나라 법을 따르든지, 이 세상 비진리의 권력, 명예, 돈, sex의 종으로 살든지, 진리를 따라 하나님 나라 시민으로, 주님의 종으로 사랑하고 섬기며 살든지 여러분의 선택입니다. 모쪼록 아무리 어려운 일이 닥쳐도 하나님의 은혜로 진리 편에 서시기를 축원합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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