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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태일 목사
작성일 2012-07-30 (월) 09:03
분 류 주일설교
ㆍ조회: 1815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고전 2:6-11)
세상 지혜나 지식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고린도인들은 이 ‘지혜’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지혜는 깨우침이라 할 수 있는데, 어떤 지식의 체계를 갖고 있어서 세상 일에 무식하지 않고 유식한 것을 지혜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 지혜가 있는 사람들은 모두 말을 잘했으며 똑똑했습니다. 그리고 이 지혜나 지식을 얻는 데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은 잘 받아들이지를 않았습니다. 지난 주일에 말씀드렸듯이 사실 요즘도 마찬가지이지요. 세상 사람들은 다 그렇게 실제적이고 현실적이지 않는 것은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런 세상 지혜, 지식의 아름다운 말로 하나님의 증거를 전한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의 도만을 전했다고 했습니다(1-5절). 왜냐하면 그 안에 하나님의 능력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어서 바울은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 지혜를 말하노니 이는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또 이 세상의 없어질 관원의 지혜도 아니요”(6절)라고 합니다. “그러나”라고 한 것은 세상 지혜와는 다른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기에 때문입니다. 여기 “온전한 자들”이라고 한 것은 완전한 사람들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를 알아 들을 수 있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완전하다, 완성되다, 성숙하다’라는 의미의 형용사인 ‘온전한’이라는 단어는 다른 성경에서 구원을 받은 자를 가리킬 때에 사용되었습니다(히 6:1-2, 10:14).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삶의 주인으로 신뢰하는 자들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 가운데는 똑 같은 내용의 복음을 전하는데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못 알아듣는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이유는 복음은 세상의 지혜도 아니고, 이 세상의 없어질 관원의 지혜도 아니고 하나님의 지혜이기 때문입니다. 6절에서 말하는 “세상의 지혜”는 당시 헬라 사람들이 지혜라고 생각하는 철학, 혹은 어떤 지식 체계를 의미합니다. 헬라인들의 주된 관심은 우주론이었습니다. 이 우주가 물로 되었느냐, 불로 되었느냐 아니면 원자로 되었느냐 하는 것을 두고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그것을 논리적으로 추론해 보려고 애를 많이 썼습니다. 거기에 반하여 “관원의 지혜”는 당시 로마제국의 정치 지도자들이 진리라고 인정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로마 관원들이 가진 현실적인 지식입니다. 어떻게 하면 인간이 갖고 있는 모순된 삶을 벗고 보다 완전한 삶을 살 수 있는가 하는 지혜입니다. 그것을 스토아 학파는 금욕에서 찾았습니다. 인간이 죽을 때까지 정욕을 아예 금하고 사는 것이 완전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비결이라는 주장입니다. 반면에 에피큐로스 학파는 정반대로 인간의 근본적인 목적은 쾌락에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정욕을 채우며, 주어진 상황에서 고통을 적게 받고 쾌락을 누리는 것이 가장 완전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즉 헬라인들의 지혜는 보다 형이상학적이고 철학적이라고 한다면, 로마 관원들의 지혜는 형이하학적이고 현실적이며 처세술에 능한 지혜였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자기가 말하는 지혜는 그런 지혜들과는 완전히 차원이 다른, 하나님의 지혜로 그런 방법으로는 절대로 알 수가 없다고 합니다.
   우리 인간들에게는 지극히 이성적이고 상식적인, 눈으로 보이는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지혜가 있습니다. 또 그런 경험과 지식이 쌓여서 논리적으로 무엇인가를 추론하는 지혜입니다. 그런데 이것 외에 다른 지혜가 있습니다. 인간에게는 눈에 보이지 않는 영혼이 있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지혜, 하나님을 아는 지혜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이 존재한다고 믿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모든 것을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지혜입니다.
   그러면 다 똑 같은 사람들인데 왜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아는 지혜가 있어서 하나님을 믿는데, 어떤 사람들은 아무리 들어도 하나님을 모를까요? 그 해답을 7절 이하에서 말해주고 있습니다. “오직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니 곧 감취었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7절)고 하였습니다. 즉 하나님의 지혜는 모든 사람에게 감추어졌던 것이었습니다. 이유는 사람들의 죄 때문이었습니다. 죄 때문에 하나님의 지혜를 깨달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죄인인 인간들을 영원토록 영적으로 무지한 상태로 두지 않으셨습니다. 불쌍히 여기시고 사랑하셔서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감추어 두었던 하나님의 지혜를 사람에게 드러내셨습니다. 이를 신학적인 용어로 ‘계시(revelation)’라고 합니다. 본문에서는 특별 계시를 의미합니다. 7절에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니 곧 감취었던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연극을 보러 가면 시작하기 전에 커튼으로 쳐있어서 그 안을 드려다 보지 못하게 하듯이,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이 비밀스러운 하나님의 뜻을 보여주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지혜를 모든 사람에게 다 드러내지 않으셨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오는 자들에게만 열어 보여 주셨습니다. 믿음으로 나온다는 것은 자기 자신 안에 있는 모순된 것을 보고 내가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것만이,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라고 깨닫는 사람입니다. 죄인임을 깨닫는 사람입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은 자기 생각을 끝까지 옳은 것으로 믿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분명히 자기 안에 모순이 있으며, 지금까지 자신이 보고 들은 바가 사실이 아닐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 이상의 어떤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내 나름대로 세워놓은 인생관이 틀렸구나’ 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무엇인가 내 자신이 생각하지 못하는 세계가 있으며, 내 힘으로는 안되는 일들이 있고, 어떤 다른 힘이 내 삶에 작용하고 있는 것을 느낄 때 그는 비로서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바울은 이 지혜를 당시의 로마 관원들이 하나도 알지 못했기 때문에 영광의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8절에 기록하며, 이사야서 64장 4절 말씀을 인용하면서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9절)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보게 되는 것은 내가 현재 보고 듣고 생각하는 이상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깨달을 때입니다. 바로 그 때가 믿음의 눈, 영안이 떠지는 때입니다. 그러나 계속 자기는 다 옳고 자기 손으로 만지며 눈으로 보고 귀로 들리는 것만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결코 믿음의 눈이, 영안이 열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들 중에서 어리석고 무지해 보여도 하나님을 알고 믿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똑똑하고 많이 배우고, 인생 경험이 풍부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에 대하여는 아직 모르는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믿음의 눈이 떠져서 하나님의 지혜를 깨닫게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영, 성령님 때문이라고 합니다.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10절)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게 된 것은 어떤 사람이나 세상 지혜, 지식이 아니라 성령께서 깨우침을 주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성령은 모든 것, 하나님의 깊고도 오묘한 섭리, 그 뜻을 알고 계시고, 우리로 알게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물론 고린도인들은 성령이라는 말 자체를 처음 듣는 사람도 많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11절에 설명을 해 주십니다.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의 속 사정(생각)을 누가 속속히 알겠습니까? 다른 사람에게 상세하게 다 말하지 않는 이상 모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하나님의 일(생각)도 하나님의 영, 성령이 아니고는 알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게 되고, 그 지혜를 깨닫게 되는 것도 하나님의 영, 성령께서 깨닫게 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나에 대하여 상세하게 말해주어서 그 사람이 나에 대하여 알듯이, 하나님께서도 성령을 통해서 자신의 뜻과 생각을 알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기 전에 말씀하시기를 앞으로 우리를 돕는 보혜사, 진리의 성령님이 오시면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들을 가르치시고, 생각나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요 14:26). 그러므로 6절에서 언급한 “온전한 자들”이란 성령의 도우심으로 진리의 말씀을 깨달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자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성령께서 하시는 이 놀라운 역사를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그 과정은 우리가 전혀 알지 못합니다. 단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이 말씀이 나에게 하시는 말씀이며, 내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살아온 것이 죄라는 것을 깨닫게 할 때가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의 역사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말씀을 들어도 내가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며 모순된 존재라는 것을 깨닫지 못할 때 그는 아직 성령께서 역사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성령의 말씀을 듣지 못한 것입니다. 이것을 사람의 논리로, 이성으로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영적인 세계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지혜를 깨달아 복음을 받아들인 분들이라면 이미 성령의 역사로 그렇게 된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 멘!

   사랑하는 경향가든 교우 여러분!
   여러분들은 오늘 바울이 이야기하는 온전한 사람들입니까? 모든 여러분들의 문제를 하나님과의 관계로 생각할 수 있습니까? 그렇다면 이미 성령을 받아,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 확실합니다(롬 8:14). 무슨 성령의 신비한 체험, 몰아의 경지에 빠지는 입신, 그런 것 말하는 것 아닙니다. 하나님의 지혜가 이해가 되고 믿어지는 영적인 사람을 뜻합니다.
   성령의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이나 말이나 행동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기 시작합니다. 내가 이렇게 생각하는 것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실까?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이렇게 행동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말하시고, 어떻게 보실까? 이런 삶을 영적인 삶이라고 합니다. 무엇보다도 영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모든 것을 생각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보통 불신자들이나 아주 어린 초신자들이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왜 선하신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악이 존재하도록 내버려 두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 악이 하나님의 자녀들을 괴롭히고 어려움을 주어도 제거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다가 어려움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바라보고 참고 견디는 자에게 갑자기 임하셔서 치유와 회복을 허락하십니다. 그 이전보다 더 큰 은혜와 축복을 주셔서 그 동안 흘렸던 눈물을 다 닦아 주시며 새롭게 풍성한 삶을 주십니다. 욥의 고난을 생각해 보십시오. 친구들은 인과응보의 논리로 욥이 죄가 있어서 벌을 받는다고 주장하는데, 욥은 그렇지 않고 하나님의 선한 뜻이 있다고 믿었지 않습니까?  
   문제는 우리가 모든 일을 영적으로 생각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눈으로 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자신의 문제를 영적인 눈으로,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바라본다면 어떤 고민이나 갈등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안타깝게도 왔다 갔다 합니다. 어떤 때에는 영적으로 생각하려고 애를 쓰다가, 다른 사람의 처지와 비교하면서 낙심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게 됩니다. 이유는 자신의 문제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생각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아니면 자신의 기대에 비추어서, 자신이 세워놓은 계획에 견주어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지혜나 관원의 지혜를 따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모든 일을 하나님의 눈으로 볼 수 있을까요? 미래의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만세 전에 정하신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우리의 영안이 어두워지지 않도록 하나님 앞에 자주 나아와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영, 성령이 아니고는 하나님의 사정(생각)을, 그 깊으신 뜻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시간을 내야 합니다. 말씀과 기도의 시간, 하나님과의 교제의 시간을 내야 합니다. 어느 누구보다도 하나님과 가깝게 지내셔야 합니다. 말 그대로 친밀하셔야 합니다. 성령을 받아 거듭난 사람이라 하더라도 하루 종일 세상 사람들과 더불어 지내면서, 세상 것들에 빠져 살면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습니다. 하루를 살면서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생각하지 않으면 오늘도 사탄 마귀에게 속고 있는 것입니다. 사탄 마귀들을 위하여 한 일 밖에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목적적 수단으로서의 일이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삶, 코람데오의 삶이 아니면 이 세상 사람들에게 하루를 빼앗긴 것 밖에 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진리에 있어서 더 자라야 합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생각하고 고민할 때 우리는 더 이상 불필요한 시행착오를 하지 않게 됩니다. 무작정 일단 일을 저지르고 보자는 식으로 하다가 잘 안되면 운이 나빠서 그렇게 되었다고 생각한다면 불신자와 다를 바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는 그렇게 살면 안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알려면 다른 성도들과 함께 성전에 모여야 합니다. 함께 찬양과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성도의 참된 교제를 나누어야 합니다. 그러면 나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많은 교인들이 자신의 어려움이 자기만의 어려움으로 보고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그러나 함께 모이면 형편과 처지는 다르지만 다들 어려움을 겪고 있고, 나보다 훨씬 더 열악한 환경에서 놀랍게도 기쁨으로 잘 견디고 있는 것도 보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서 고생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은혜는 낮은 곳으로 흐르게 되어 있습니다. 낮아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저 여러분의 삶 전체를 하나님 앞에 열어놓을 때 주께서 예비하신 영광의 축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런 은혜가 저와 여러분에게 넘치기를 축원합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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